홍준표
연표
1953
[경남 창녕 출생]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에서 홍판표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이후 합천, 대구 등지로 이사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82
[사법시험 합격]
계속된 낙방 속에서 아버지의 불우한 모습을 보고 불공평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한 그는 제24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며 검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85
[검사 임용]
사법연수원 14기를 수료하고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시보로 부임한 후, 정식 검사로 임용되어 부산, 광주, 서울 등지에서 강력계 검사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부임 직후 선배 검사의 권고로 '판표'에서 '세인의 표상'이라는 뜻의 '준표'로 이름을 개명했다. 그는 부임 초기 1년간 2,000건의 사건을 해결하는 등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였다.
1988
[5공 비리 수사 돌입]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재직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 외조카 등 권력 실세 관련 비리 사건들을 수사하며 성역 없는 수사의 시작을 알렸다.
1991
[광주 강력부 검사 부임]
광주지방검찰청 강력부 강력계 검사로 부임하여 각 지역의 조폭 관련 사건들을 수사했다.
당시 광주의 룸살롱들이 조폭과 연루된 것을 보고 술집 출입과 음주를 거의 끊게 되었다.
[국제 PJ파 소탕]
광주 지역의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가 연대하는 것을 포착하여 현장을 급습,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수사 과정에서 고위 공직자들과 국회의원들의 압력, 심지어 살해 협박까지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수사를 강행했다.
1992
[파키스탄 폭력조직 수사]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부임 후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체포, 사형과 징역형을 구형하며 외국인 조직범죄에 강력 대응했다.
1993
[슬롯머신 사건 수사]
'6공의 황태자' 박철언을 비롯한 권력 실세들을 구속 기소하며 전국적으로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결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모티브가 되어 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이건개 전 고검장을 수사하고 구속 기소하며 성역 없는 수사로 대중의 찬사를 받았으나, 검찰과 법무부 내부에서는 한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는 '독버섯 같은 조직폭력배의 비호세력'을 '초보적 마피아'로 규정하고 치밀하게 추적했다.
1994
[온보현 연쇄살인 수사]
심야에 여성들을 납치, 강간, 살해한 연쇄살인범 온보현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로서 직접 현장 검증 등 수사를 진두지휘하여 사건 해결에 기여했다.
1995
[검사 사직 및 변호사 개업]
법무부 특수법령과 검사로 복귀 후 사직서를 제출하고 수리되어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모래시계 검사'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 방송 출연 등 섭외가 이어졌다.
1996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송파구 갑 지역구에 출마,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신한국당 소장파로 활동하며 1996년 9월 어린이/청소년 노동 최저 연령 상향 조정 법안을 발의, 통과시켰다.
1999
[선거법 위반 의원직 상실]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잠시 미국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1
[동대문구 을 국회의원 재선]
2001년 서울 동대문구 을 재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제16대 국회의원으로서 정치권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2006
[국회 환노위 위원장]
제17대 국회 후반기 상임위 교체 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위원장직을 수행했다.
2007
[대선 경선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 '반값 아파트' 정책을 내놓으며 당시 정치권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4위로 탈락했다.
당시 이중국적 보유자의 병역 회피를 금지한 '국적법'과 '재외동포법' 개정을 이끌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완화 추진에 홀로 반대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였다.
2008
[제18대 국회의원 당선]
서울 동대문구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18대 국회 전반기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피선되며 당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된다.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취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태권도협회 회장 중 국회의원으로 임명된 인물 중 최초의 유단자였다.
약 5년간 협회장직을 역임하며 태권도 발전에 기여했다.
2011
[제14대 한나라당 대표 당선]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유효 투표 중 4만 1,666표를 얻어 제14대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그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와서 총선과 대선에서 압승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 유행하던 시사 프로그램 '나꼼수'의 섭외에 응하며 '오래가지 못할 일과성'으로 평가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대표 사퇴]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한나라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19대 총선에 출마 의사가 없었으나, 새누리당의 요구에 따라 출마를 결정했다.
2012
[제35대 경상남도지사 당선]
김두관 지사의 사퇴로 치러진 경상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범야권 단일 후보 권영길을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당당한 경남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3
[진주의료원 폐업 선언]
경상남도청은 적자 누적과 노조 문제 등을 이유로 진주의료원 폐업을 공식 선언하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공공의료와 재정확충의 대립으로 주민소환 운동까지 촉발시켰다.
진주의료원 건물은 이후 경상남도청 서부청사로 리모델링되어 사용되었다. 이 정책은 '국고의 무분별한 지출을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2014
[제36대 경상남도지사 재선]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김경수 후보를 꺾고 경상남도지사 재선에 성공하며, 만년 꼴찌였던 경남의 청렴도를 전국 1위로 끌어올리는 등 '흑자 도정'의 성과를 이끌었다.
재임 기간 동안 약 1조 3,000억 원의 부채를 거의 상환하고 전국 최초로 '흑자도정 광역자치단체'를 달성했다. 또한 2년 연속 '가장 기업하기 좋은 광역자치단체'로 선정되는 등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2015
[성완종 리스트 논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 직전 폭로로 홍준표 대표에게 불법 정치자금 1억원을 건넸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검찰 수사 대상이 되었다.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으나 1심 유죄, 2심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논란은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며 마무리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윤승모 전 부사장의 진술 신빙성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2017
[19대 대선 후보 확정]
자유한국당의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여 최종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당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출마를 강행했다.
[경남도지사 심야 사퇴]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출마를 위해 사퇴 시한 3분을 앞두고 경상남도지사직을 전자 문서로 사임 통지하며 보궐선거를 무산시켰다.
300억 원의 혈세를 아끼기 위함이라 해명했으나,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회찬, 유승민, 하태경 등 정치권 인사들은 그의 행동을 '선거권 박탈'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일명 '홍준표 방지법' 제정의 필요성까지 제기되었다.
[사법고시 부활 공약]
사법고시 폐지에 반대하며 양화대교 아치 위에서 농성하던 시위자를 설득하여 구조되도록 도왔다.
집권 시 사법고시 부활을 약속하는 등 정책적 소신을 보였다.
[19대 대선 문재인에 밀려 낙선]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24.03%의 득표율로 문재인 후보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낙선했다.
그는 '무너진 자유한국당 복원에 만족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자유한국당 대표 선출]
제19대 대선 낙선 후 같은 해 자유한국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당협위원장 임명 과정에서 '셀프 입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8
[자유한국당 대표 사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대참패하자, 이를 자신의 잘못이라고 뉘우치고 자유한국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정계 복귀 선언]
미국에서의 휴식을 마치고 귀국하여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고 경제가 통째로 망가지고 있다'며 현실 정치 복귀의 의지를 밝혔다.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TV홍카콜라'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 6일 만에 구독자 10만을 넘어서며 파급력을 입증했다.
2019
[100분 토론 출연]
MBC 100분 토론 20주년을 맞아 유시민 작가와 함께 토론자로 참여해 시청률 9.6%를 기록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2020
[제21대 국회의원 당선 (5선)]
제21대 총선 공천 갈등으로 미래통합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조속히 당에 돌아가 당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인선 미래통합당 후보와의 초접전 끝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자신을 도왔던 이인선 후보와의 경쟁으로 '배신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21
[국민의힘 복당]
무소속 당선 1년 2개월 만에 '이제 당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며 국민의힘 복당을 신청했고, 최고위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집안의 맏아들이 돌아온 셈'이라 표현했다.
[20대 대선 출마 선언]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나라를 정상 국가로 만들고 선진국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로스쿨 폐지, 사법고시 부활 등을 공약했다.
[대선 경선 윤석열에 패배]
여론조사에서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당원 투표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밀려 국민의힘 제20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탈락했다.
경선 패배 후 그를 지지하던 많은 20, 30대 당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22
[국회의원직 사퇴]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자신의 지역구를 이인선 후보에게 넘겨주며 '대구로 하방'하는 뜻을 밝혔다.
[제35대 대구광역시장 당선]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78.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구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영남권 민선 광역단체장만 2번 맡는 진기록을 세웠다.
취임사에서 '지방 소멸의 위기에 처한 대구를 시정 혁신과 강한 리더십으로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시정 구호는 '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파워풀 대구'이다.
[대구광역시장 취임 및 시정 개편]
대구광역시장에 정식 취임하며 옛 경북도청 건물을 대구광역시청 산격청사로 개칭하고 시장실을 이전하는 등 대대적인 시정 개편을 단행했다.
경상남도지사 재임 당시처럼 대구광역시의 지방채 발행을 금지하는 등 부채 감축에 힘썼다. 또한 광주광역시장 강기정과의 '달빛동맹'을 통해 지방 소멸 문제 해결과 남부지방 경기 회복에 기여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