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도키무네
연표
1251
[호조 도키무네 출생]
사가미국 가마쿠라 아다치씨 저택에서 호조 도키요리의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측실의 아들인 이복형 홋슈마루 대신 후계자로 지명되며 일찍부터 주목받았습니다.
겐초 3년(1251년) 5월 15일, 사가미국 가마쿠라, 아다치씨의 저택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복형 홋슈마루(훗날 도키스케)가 있었지만, 홋슈마루가 측실의 아이(서자)였던 관계로 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1257
[무네타카 친왕으로부터 이름자 받아 원복]
쇼군노고쇼에서 쇼군 무네타카 친왕을 모시고 원복을 행하며, 친왕의 이름자 중 하나인 '무네'를 받아 사가미타로 도키무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호조 집안의 차기 도료임을 공식화하는 성대한 의식으로, 그의 미래를 예고했습니다.
고겐 2년(1257년), 쇼군노고쇼(將軍御所)에서 당시의 쇼군 무네타카 친왕을 모시고 원복을 행한 뒤, 그의 이름자 하나인 '무네(宗)'를 받아, 사가미타로(相模太郞) 도키무네(時宗)라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도키무네의 원복은 호조 일문이나 여러 문신들이 참석한 성대한 의식으로 이복형 도키스케가 원복을 치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였습니다. 이때의 원복은 도키무네가 명실공히 호조 집안의 차기 도료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1260
[고사무라이도코로 벳토 취임]
쇼군의 봉공 등을 담당하는 고사무라이도코로의 벳토로 취임하며, 장차 싯켄이 될 자신을 위한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복수의 벳토가 임명되는 관행을 만들며 그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분오 원년(1260년), 쇼군의 봉공 등을 담당하는 고사무라이도코로(小侍所)의 벳토(別當)로 취임했습니다. 당시 이미 호조 사네토키(北條實時)가 고사무라이도코로의 벳토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벳토를 따로 더 두지 않아도 되었지만, 도키무네의 취임 이후로는 여러 명의 벳토를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 됩니다. 이것은 이미 사네토키가 벳토 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도키무네가 또 벳토로 취임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관례화였습니다. 또한 도키무네의 고사무라이도코로 입소는 장래 싯켄이 될 그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아버지 도키요리의 배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사무라이도코로의 벳토였던 사네토키는 마음씀이 풍부한 교양 깊은 인물이었고, 도키무네는 그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인격을 형성해나갔다고 여겨집니다.
1261
고초 원년(1261년) 4월에 아다치 요시카게의 딸인 호리우치도노(堀内殿)와 결혼했습니다.
1264
[렌쇼 취임, 무네타카 친왕 폐위 주도]
6대 싯켄 호조 나가토키의 출가 후, 마사무라가 7대 싯켄이 되자, 도키무네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싯켄의 보좌인 렌쇼에 취임했습니다. 이후 막부 전복 혐의를 받은 무네타카 친왕의 쇼군직 폐위와 고레야스 친왕 옹립 등을 주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분에이 원년(1264년) 7월, 6대 싯켄이었던 호조 나가토키(北條長時)가 출가하고, 마사무라(政村)가 7대 싯켄이 되면서, 8월에 도키무네는 싯켄의 보좌인 렌쇼(連署)로 취임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습니다. 싯켄 마사무라나 일족의 중진이었던 호조 사네토키와도 협력해, 분에이 3년(1266년)에 막부 전복을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은 무네타카 친왕의 쇼군직 폐위와 교토 송환, 고레야스 친왕(惟康親王) 쇼군 옹립 등을 주도했습니다.
1268
[8대 싯켄 취임 및 몽골 국서 격노]
18세의 나이로 싯켄직을 물려받아 제8대 싯켄이 되었습니다. 취임 직전 고려 사절을 통해 일본의 복속을 요구하는 쿠빌라이 칸의 몽골 국서를 접하고 격노했으며, 막부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굴복을 거부하고 항전 의지를 굳혔습니다.
분에이 5년(1268년) 정월, 몽골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의 다자이후를 방문한 고려의 사절을 통해, 몽골 제국에의 복속을 요구하는 내용의 국서가 가마쿠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3월 5일에 도키무네는 마사무라로부터 싯켄직을 물려받아 제8대 싯켄이 됩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도키무네는 일본의 굴복을 요구하는 쿠빌라이의 국서를 보고 격노했습니다. 만약 쿠빌라이에게 굴복해 그의 휘하로 들어간다면 가마쿠라 막부 체제는 당장 붕괴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교토의 천황 조정은 쿠빌라이의 책봉을 받아 세력을 만회하고, 반(反)호조 무사들도 몽골이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조 가문 타도에 나설 우려가 있었습니다. 도키무네는 선대 싯켄 마사무라나 호조 사네토키ㆍ아다치 야스모리ㆍ다이라노 요리츠나 등과 함께 몽골의 국서에 대한 대응 및 대외 문제를 협의하면서, 이국에 대한 경고 체제의 강화 및 전국의 지샤로 하여금 '적국항복'의 기도를 올리게 했습니다.
1271
[몽골 무력 침공 경고와 전쟁 준비]
몽골 사절이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무력 침공을 경고했습니다. 이에 도키무네는 사이고쿠 지역 고케닌들에게 전쟁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하며 방어 태세를 강화했습니다.
분에이 8년(1271년), 몽골의 사절이 다시 일본을 방문해 무력 침공을 경고했을 때에도, 쇼니씨 집안을 필두로 하는 사이고쿠(西國) 지역의 고케닌들에게 전쟁 준비를 갖추게 하고 있습니다.
1272
[2월 소동으로 이복형 및 일족 숙청]
호조 총령가인 도쿠소케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로쿠하라 단다이의 남방 벳토직을 맡았던 이복형 도키스케와 일족의 효죠슈인 호조 도키아키라, 노리토키 형제를 주살했습니다. 이는 '2월 소동'으로 불리며 막부 내 권력 장악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호조 총령가인 도쿠소케(得宗家)의 권력을 반석에 올리고자 분에이 9년(1272년)에는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의 남방의 벳토직으로 조정과 가까운 입장이었던 이복형 도키스케나(그는 아우가 자신을 제치고 싯켄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족의 효죠슈(評定衆) 호조 도키아키라(北條時章, 나고에 도키아키라)ㆍ노리토키(敎時, 나고에 노리토키) 형제를 주살합니다(2월 소동).
1274
[승려 니치렌 사도 유배]
'입정안국론'을 막부에 상정한 승려 니치렌을 사도(佐渡)로 유배 보냈습니다. 이는 당시 막부의 종교적 통제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분에이 11년(1274년)에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막부에 상정한 승려 니치렌(日蓮)을 사도(佐渡)로 유배보내기도 했습니다.
[제1차 몽골 침공 성공적 방어 ('겐코우의 역')]
마침내 몽골군이 일본을 침공했습니다. 일본군은 몽골군의 신병기와 집단 전법에 고전했으나, 난데없는 폭풍(후에 '가미카제'로 불림)과 몽골 지휘관들의 분열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일본은 전면적인 전투 없이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분에이 11년(1274년), 마침내 몽골군이 일본을 침공했습니다.(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겐코우元寇'입니다.) 이 때의 일본군은 몽골군의 집단 전법이나 화약 같은 신병기 등에 고전했지만, 난데없는 폭풍(훗날 '가미카제'라 불리게 되는)과 지휘관들의 방침 분열로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전면적 전투는 치르지 않았습니다.
1275
[몽골 선유사 두세충 일행 처형]
제1차 원정을 물리친 후, 항복을 권하는 몽골 사절 두세충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자, 도키무네는 그들을 가마쿠라에서 접견한 뒤 모두 처형했습니다. 이는 몽골에 대한 강력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시위 행동이었습니다.
제1차 원정을 물리친 도키무네는 의기양양하여 그 이듬해, 항복을 권하는 사절 두세충 등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접견한 뒤 그들을 모두 처형해버렸습니다.
1279
[남송 사절 주복 일행 처형]
일본과 우호적이었던 남송의 옛 신하 주복 등 사절이 일본을 방문했으나,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다자이후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 역시 몽골(원)에 대한 강력한 시위 행동의 일환이었습니다.
고안(弘安) 2년(1279년)에 일본을 방문한, 일본과 우호적이었던 남송의 옛 신하 주복(周福) 등 사절도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바로 다자이후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러한 처형에는 몽골(원)에 대한 시위 행동의 의도도 있었습니다.
1281
[제2차 몽골 침공 성공적 방어 ('고안의 역')]
도키무네의 작전 지시에 따라 몽골군이 다시 침공했으나, 일본은 이미 구축된 방루와 조직적인 방어로 몽골군의 상륙을 막아냈습니다. 결국 또 다시 불어닥친 폭풍우로 몽골군이 괴멸하면서 일본은 국난을 성공적으로 극복했습니다.
고안 4년(1281년)의 고안의 역(제2차 일본원정)에서는 도키무네의 이름으로 발호된 작전 지시에 따라 도쿠소히칸(得宗被官)이 전장에 파견되어 지휘를 맡았습니다. 몽골군은 방루에 가로막혀 상륙할 지대를 찾지 못해 고생했고, 더욱이 내륙에 진을 치고 규슈 무사에 혼슈 무사들까지 방어에 동원한 일본군의 저항에 고전하다 결국 또 다시 폭풍우 때문에 괴멸당했습니다. 이렇게 도키무네는 몽골군의 침공이라는 국난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전후에 참전한 고케닌들에 대한 은상 문제 등이 발생하거나 또다시 있을지 모를 몽골군의 침공에 대비해 재차 국방을 강화해야 하는 등의 난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1282
[무가쿠 소겐 초청 및 엔가쿠지 창건]
중국에서 무가쿠 소겐 선사를 초청하고 사찰 엔가쿠지를 창건하여 일본에 선종이 전파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신앙심과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282년 중국에서 무가쿠 소겐(無学祖元) 선사를 초청하고 사찰 엔가쿠지(円覚寺)를 창건하여 일본에 선불교(선종)이 전파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1284
[34세의 나이로 병사]
몸이 약해져 병상에 눕게 되었고, 출가한 같은 날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그 자신이 직접 열었던 가마쿠라 엔가쿠지에 묻혔습니다.
고안 7년(1284년)에는 이미 병상에 눕게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4월 4일에 출가하여 같은 날 34세의 나이로 병사합니다.(사인은 결핵 또는 심장병이었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직접 열었던 가마쿠라 야마노우치의 서록산(瑞鹿山) 엔가쿠지(円覺寺)에 묻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