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고려)
연표
992
[비극적인 탄생]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욱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왕순이 태어납니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정당한 혼인이 아니었기에 왕순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헤어져야 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경종의 비였으나 사별 후 숙부인 왕욱과 사통하여 그를 낳았습니다.
출산 직후 헌정왕후는 산고로 사망하였고 아버지 왕욱은 사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성종은 왕순을 불쌍히 여겨 궁궐에서 키우게 했으나, 이는 훗날 천추태후와의 갈등 원인이 됩니다.
996
[아버지 왕욱의 사망]
유배지에서 아들 왕순을 그리워하던 아버지 왕욱이 세상을 떠납니다. 왕순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왕실의 보호 아래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왕욱은 사망하기 전 아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묻을 장소를 신신당부하며 금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왕순은 지관의 조언에 따라 아버지를 묻었고, 훗날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를 안종으로 추존했습니다.
부모의 부재는 어린 왕순을 왕실 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997
[어머니의 추존]
성종이 서거하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가 효숙왕태후로 추존됩니다. 왕순은 왕실의 정통 혈통으로서 점차 정치적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목종은 자신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더불어 헌정왕후의 지위를 높여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했습니다.
왕순은 비록 부모가 곁에 없었으나 왕실의 어른으로서 대우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을 독점하려던 천추태후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003
[사찰로 내쫓긴 왕손]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왕순을 강제로 머리를 깎아 절로 보냅니다. 숭교사로 보내진 왕순은 승려로서의 삶을 강요받으며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집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야욕을 품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억지로 출가시켜 종교의 틀 안에 가두었습니다.
왕순은 법명을 받고 수행 생활을 시작했으나, 천추태후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1004
[신혈사로의 은둔]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이 거세지자 왕순이 삼각산 신혈사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곳에서 그는 노승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체를 숨기고 목숨을 건 은둔 생활을 이어갑니다.
신혈사는 지형이 험하고 외진 곳에 있어 천추태후의 자객들로부터 몸을 피하기 용이했습니다.
왕순은 이곳에서 불교 경전을 공부하며 내면을 다졌고, 훗날의 통치 철학을 형성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생존 소식은 비밀리에 목종과 조정의 충신들에게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1005
[첫 번째 암살 위기]
천추태후가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살해하려 시도합니다. 신혈사의 노승이 왕순을 방 바닥 밑에 판 비밀 구멍에 숨겨 간신히 화를 면합니다.
자객들은 절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노승들의 기지와 헌신적인 보호 덕분에 왕순을 찾지 못했습니다.
왕순은 좁고 어두운 구멍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왕실 권력 다툼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후 천추태후는 독이 든 음식이나 자객을 수시로 보내 왕순을 압박했습니다.
1006
[목종에게 보낸 혈서]
생명의 위협을 견디다 못한 왕순이 목종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냅니다. 태후가 보낸 음식에 독이 들어있음을 알리며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호소합니다.
왕순은 편지에서 '태후가 나를 죽이려 하니 제발 살려달라'며 눈물로 쓴 내용을 담았습니다.
목종은 이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의 후계자로 왕순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목종이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멀리하고 왕순을 보호하려는 결단을 내리게 했습니다.
1009
[고려 제8대 국왕 즉위]
사찰에서 돌아온 왕순이 고려의 제8대 국왕 현종으로 정식 즉위합니다. 사생아와 승려라는 독특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고려의 정통 국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합니다.
현종은 18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정국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는 데 주력했습니다.
비록 강조의 권력 아래 있었으나 그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즉위 직후 대사면령을 내리고 억울하게 처벌받은 자들을 복권시키며 덕치를 펼쳤습니다.
[강조의 정변 발생]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시킵니다. 강조는 신혈사에 있던 왕순을 모셔와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합니다.
강조는 목종이 위독하다는 소식과 김치양이 왕위를 노린다는 정보를 듣고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천추태후를 유배 보내고 김치양 부자를 처형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왕순은 강조가 보낸 호위 군사들을 따라 개경으로 향하며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1010
[거란의 2차 침공]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현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국가의 존망이 걸린 거대한 외환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란은 고려의 내정 간섭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상은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야욕이었습니다.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며 전면적인 전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현종은 강조에게 총사령관의 지위를 주어 적을 막게 했으나 전황은 고구려에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통주 전투의 패배]
고려의 주력군을 이끌던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패하고 포로로 잡힙니다. 강조의 처형 소식과 함께 고려의 방어선이 무너지며 개경이 위기에 처합니다.
강조는 방심하여 바둑을 두다가 거란군의 기습을 받아 생포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거란 성종은 강조를 회유하려 했으나 강조는 끝내 거부하고 처형되어 무신으로서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 패배로 고려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항복론과 결사항전론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서경 방어전의 승리]
거란군이 서경(평양)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고했으나 고려군이 끝까지 저항하여 막아냅니다. 조元 등이 중심이 되어 성문을 굳게 닫고 거란의 파상공세를 물리쳤습니다.
서경의 승리는 거란군에게 후방의 불안감을 심어주어 그들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안의 군민들은 하나로 뭉쳐 돌과 화살을 쏟아부으며 대제국의 군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현종은 서경의 승전보를 듣고 용기를 얻어 다음 작전을 구상할 수 있었습니다.
[남쪽으로의 몽진 결정]
거란군이 개경 인근까지 다다르자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도를 비우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이는 적에게 왕의 신변을 넘겨주지 않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현종은 임신 중이던 원정왕후를 먼저 보내고 소수의 신하들과 함께 밤늦게 개경을 빠져나갔습니다.
피난길은 춥고 험난했으며 왕을 호위하는 군사는 불과 5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에 입성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하며 고려를 압박했습니다.
1011
[초조대장경 판각 시작]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대규모 대장경 간행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는 고려의 문화적 역량을 결집시킨 호국 불교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종은 전쟁의 고통을 종교적 신념으로 극복하고자 수만 장의 목판에 경전을 새기게 했습니다.
이 작업은 국가의 안녕을 비는 국민적 염원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은 훗날 몽골 침입 전까지 고려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보존되었습니다.
[하공진의 기만 전술]
하공진이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현종이 이미 남쪽으로 멀리 도망갔다고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거란 성종은 고려 왕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군을 명령합니다.
하공진은 직접 거란의 인질이 되는 희생을 자처하며 고려 왕실을 보호했습니다.
거란군은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터라 하공진의 제안을 받아들여 명분만 챙기고 돌아갔습니다.
이 외교적 담판은 고려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방 민란군의 습격]
피난길의 현종이 적성현에서 지방 아전과 민란군에게 습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왕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현종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방의 불만 세력들은 세력이 약해진 왕을 조롱하며 화살을 쏘고 행차를 방해했습니다.
신하인 지채문이 홀로 활을 쏘아 적들을 물리치며 현종의 목숨을 간신히 구했습니다.
현종은 이 과정에서 지방 통제력의 부재를 절감하며 훗날의 행정 개혁을 다짐했습니다.
[나주 도착과 항전 의지]
현종이 머나먼 전라도 나주에 도착하여 임시 궁궐을 마련합니다. 왕이 끝까지 붙잡히지 않고 버티자 거란군은 전쟁의 목표를 잃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나주 백성들은 피난 온 현종을 정성껏 맞이하며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종은 나주에서 전국의 군사들에게 격문을 보내 거란군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습니다.
거란군은 보급로가 길어지고 후방의 공격이 계속되자 결국 철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개경 환도와 복구 사업]
거란군이 물러가자 현종이 황폐해진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불타버린 궁궐을 수리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등 국가 정상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현종은 전쟁 중에 충성을 다한 신하들에게 포상하고 전사자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또한 거란군이 파괴한 국가 기록물과 서적들을 다시 수집하도록 사관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현종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강한 고려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1012
[12목 폐지와 행정 개편]
현종이 기존의 12목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행정 조직을 실질적으로 재편합니다. 몽진 당시 겪었던 지방관들의 무능과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였습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안찰사를 파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조세 징수 체계를 투명하게 정비했습니다.
이 개혁은 고려가 진정한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013
[5도 양계 체제 확립]
고려의 독특한 행정 구역인 5도 양계를 완성하여 국방과 행정을 분리합니다. 국경 지대인 양계에는 군사력을 집중시키고, 내륙의 5도에는 행정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체제는 외적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면서도 내치의 안정을 꾀하는 이원적 구조였습니다.
현종은 이를 통해 전후 국방력을 급격히 회복시켰으며 효율적인 징병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고려 왕조 내내 유지된 이 행정 틀은 현종의 뛰어난 통치 감각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1014
[김훈과 최질의 반란]
전쟁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한 무신들이 문신들에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킵니다. 김훈과 최질은 현종을 위협하여 권력을 잡고 문관 중심의 정책에 강력히 저항합니다.
반란군은 무관들의 토지를 빼앗아 문관들의 녹봉으로 충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대궐을 점령하고 현종에게 문신들을 축출할 것을 강요하는 등 왕권을 압박했습니다.
현종은 힘의 열세를 인정하고 일단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였습니다.
1015
[무신 반란 세력의 숙청]
현종이 서경에서 잔치를 베풀어 반란 주동자들을 안심시킨 뒤 한꺼번에 처형합니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6개월 만에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권이 다시 확립됩니다.
현종은 직접 술을 권하며 적들의 경계를 풀게 한 뒤 매복했던 병사들로 하여금 처단하게 했습니다.
김훈과 최질 등 19명의 주동자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되었습니다.
이후 현종은 무신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병행 정책을 통해 군 내부의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1016
[곽주 전투의 승리]
거란군이 다시 국경을 넘어 공격해왔으나 고려군이 곽주에서 이를 격퇴합니다.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은 이전과 달리 조직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며 거란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고려군은 성벽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적의 보급로를 끊는 유격 전술을 병행했습니다.
수천 명의 거란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거란은 고려의 방어선이 매우 견고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현종은 이 승리를 계기로 국경 지대의 성곽을 더욱 보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017
[흥화진에서의 대승]
거란의 소적렬이 이끄는 군대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고려군이 완벽하게 방어해냅니다. 고려의 수성 전술은 이제 거란군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고려군은 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현종은 흥화진 장수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이들의 용맹함을 전국에 널리 알렸습니다.
1018
[거란의 3차 대침공]
소배압이 10만 정예군을 이끌고 고려를 끝장내기 위해 마지막 총공세를 펼칩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여 20만 명의 대군으로 맞서게 합니다.
거란은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최정예 기병을 동원하여 개경으로 직공하는 전술을 썼습니다.
강감찬은 흥화진 근처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리는 수공으로 적의 선봉대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소배압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남하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을 노렸습니다.
1019
[개경 사수 작전]
거란군이 개경 인근까지 다다르자 현종이 직접 성을 지키며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2차 전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왕이 피난을 가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웠습니다.
현종은 성 밖의 모든 물자를 성안으로 들이는 철저한 청야 전술로 적의 보급을 차단했습니다.
거란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성벽을 넘지 못하고 지쳐갔으며 사기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현종의 단호한 항전 의지는 고려 군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귀주대첩의 역사적 승리]
후퇴하는 거란군을 강감찬이 귀주 벌판에서 포착하여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힙니다. 고려 역사상 가장 찬란한 승리이자 거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전투 중 갑자기 불어온 남풍과 비바람이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화살의 사거리를 늘려주었습니다.
김종현이 이끄는 기병 원군이 적의 뒤를 치면서 거란군은 대열이 무너진 채 패주했습니다.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거란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강감찬의 개선식]
승전하고 돌아온 강감찬 장군을 위해 현종이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환영합니다. 왕이 신하에게 금꽃을 꽂아주고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장관이 연출되었습니다.
현종은 풍악을 크게 울리고 전국의 군사들에게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강감찬은 겸손하게 모든 공을 왕의 덕으로 돌렸으나 현종은 그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했습니다.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며 송, 거란과 함께 삼각 세력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1020
[거란과의 평화 조약]
전쟁의 패배를 인정한 거란이 화친을 요청해오고 현종이 이를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실리를 챙긴 이 협정을 통해 고려는 수십 년간의 평화기를 확보하게 됩니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형식을 갖추되, 강동 6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습니다.
전쟁 포로들을 교환하고 무역을 재개하며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현종은 이 평화를 바탕으로 국가 내실을 다지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습니다.
1021
[개경 나성 축조 시작]
수도 개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도성 주위를 감싸는 외성인 나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전란의 교훈을 잊지 않고 적의 침입에 대비한 철저한 국방 대책을 세운 것입니다.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작된 이 공사는 전국의 인력을 동원한 거대한 토목 사업이었습니다.
나성은 총 길이가 23km에 달했으며 수십 개의 성문을 두어 교통과 방어를 동시에 고려했습니다.
현종은 직접 공사 현장을 시찰하며 백성들을 독려하고 국가 방어 의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1022
[7대실록 편찬 사업]
전쟁 중 불타버린 기록을 복구하기 위해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7대실록을 만듭니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고 역사를 보존하려는 현종의 문화적 의지였습니다.
황주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역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록은 고려의 통치 규범을 확립하고 후대 왕들에게 교훈을 주는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전란의 폐허 속에서 문화를 다시 꽃피운 현종의 업적 중 하나로 높게 평가받습니다.
1023
[과거 제도의 정비]
실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인원을 늘립니다. 문벌 귀족에 의존하지 않는 유능한 관료 집단을 육성하려 노력했습니다.
지방 출신 인재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을 넓혀 사회적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행정의 전문성과 합리성이 향상되었습니다.
현종은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자감을 정비하고 유학 교육을 장려했습니다.
1024
[아라비아 상인의 방문]
멀리 아라비아(대식국) 상인 100여 명이 고려를 방문하여 진귀한 보물을 바칩니다. 고려가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수은, 향료, 상아 등 서역의 물품들이 들어오고 고려의 인삼과 비단이 세계로 나갔습니다.
현종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고려의 개방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를 과시했습니다.
이 교류를 통해 고려는 서구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는 기초를 닦았습니다.
1025
[전국적인 호구 조사]
정확한 인구와 재산을 파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 제도를 정비합니다. 국가의 재정 기반을 튼튼히 하여 민생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전쟁으로 유랑하던 백성들을 정착시키고 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였습니다.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던 관리들을 처벌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했습니다.
현종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강조하며 세금 감면 혜택을 수시로 베풀었습니다.
1026
[현화사 창건 시작]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거대한 사찰인 현화사를 짓습니다. 현종의 효심과 종교적 열정이 집약된 고려 전기의 대표적 건축물입니다.
현종은 부모님이 묻힌 선릉 근처에 사찰을 지어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올렸습니다.
현화사는 단순한 절을 넘어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과 공예 기술이 집결된 문화의 보고였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현화사비와 석탑은 당시 고려의 찬란한 문화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1027
[전통 축제의 화려한 부활]
중단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개최하여 국민적 화합을 도모합니다. 화려한 등불과 의식을 통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라의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팔관회에는 주변국 사신들과 상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고려의 국력을 확인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며칠간 노래와 춤을 즐기며 고려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현종은 직접 축제에 참여하여 백성들과 소통하며 왕실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1028
[농업 장려 정책 강화]
전국에 농기구를 보급하고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농업 생산성 향상에 주력합니다.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곡창 지대를 관리하고 농법을 개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백성들에게는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주어 생산 의욕을 고취시켰습니다.
흉년이 들 때는 국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는 구휼 제도를 체계화했습니다.
현종의 민생 위주 정책 덕분에 고려는 전후 빠른 경제 회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1029
[흥료국의 지원 요청]
발해의 후예인 대연림이 거란에 맞서 세운 흥료국이 고려에 도움을 청해옵니다. 현종은 북방 정세를 주시하며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대규모 파병은 신중히 결정했으나, 망명해 온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수용했습니다.
현종은 거란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북방 세력들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자라는 자의식을 대내외에 보여준 사례입니다.
1030
[서경의 지위 격상]
북진 정책의 상징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경(평양)의 지위를 높이고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합니다. 제2의 수도로서 서경의 역할을 강화하여 북방 방어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서경에 분사 제도를 확립하여 독자적인 행정 기능을 갖추게 하고 인구를 유입시켰습니다.
현종은 직접 서경에 행차하여 성곽을 점검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이후 서경은 고려의 정신적 지주이자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1031
[위대한 군주의 서거]
고려를 전란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현종이 40세의 나이로 장락전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죽음은 고려 전체에 큰 슬픔이었으며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현종은 유언으로 백성들을 아끼고 나라를 튼튼히 할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사후 그는 부모가 계신 근처 선릉에 안장되었으며, 사후에도 고려의 성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현종의 치세는 고려의 기틀을 다진 시기로 평가받으며, 이후 문종 대의 황금기로 이어지는 가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