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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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괴링
정치인, 군인, 나치 전범 + 카테고리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로 출발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강력한 최측근이자 나치 독일의 2인자로 군림했던 인물입니다. 나치당 초창기부터 활동하며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고, 나치 정권 수립 이후에는 국가의회 의장, 프로이센 주 총리, 4개년 계획 전권대사, 독일 공군(루프트바페) 최고사령관 등 막강한 직책들을 독점했습니다. 악명 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장검의 밤' 등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을 주도하여 나치의 독재 체제를 굳건히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공군을 이끌며 승승장구하여 전무후무한 '제국원수(Reichsmarschall)' 계급까지 올랐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패 등으로 점차 신임을 잃고 미술품 약탈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탐닉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히틀러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하다 반역자로 몰려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으며,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 집행 전날 밤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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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3

[바이에른주 로젠하임에서 출생]

독일 바이에른주 로젠하임의 마리엔바트 요양원에서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직 기병 장교이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의 초대 총독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티 총영사로 부임 중일 때 어머니가 출산을 위해 잠시 독일로 돌아와 그를 낳았으며, 유복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1912

[프로이센 육군 입대]

베를린 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프로이센 육군 빌헬름 왕자 연대(제112 보병연대)에 합류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는 것을 몹시 동경했던 그는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거나 아버지가 준 보어인 제복을 입기를 즐겼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자신의 연대와 함께 뮐루즈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916

[항공대(Luftstreitkräfte) 전출]

참호전의 습기로 인해 류머티즘을 앓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친구인 브루노 뢰르처의 강력한 설득으로 독일 제국 육군 항공대로 소속을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공식적인 허가 없이 무단으로 전출을 감행하여 징계를 받을 뻔했으나, 이후 뢰르처와 정식으로 팀을 이루어 정찰 및 폭격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뛰어난 비행 활약으로 황태자로부터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18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훈장 수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맹활약하며 눈부신 격추 기록을 세운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최고 무공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수훈했습니다.
공중전에서의 심각한 부상을 극복하고 Jasta 26과 27 등 여러 전투비행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지속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22기의 적기를 격추한 전설적인 에이스 조종사로 널리 이름을 날렸습니다.

[제1전투비행단(JG 1) 단장 임명]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후임이었던 빌헬름 라인하르트가 사망한 후, 일명 '플라잉 서커스'로 불리던 제1전투비행단의 단장으로 전격 임명되었습니다.
비행단장이 된 이후 특유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부하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지만, 전쟁 막바지 연합군에게 항공기를 넘기라는 상부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할 정도로 굳건한 결단력을 보였습니다.

1922

[카린 폰 칸초와 첫 번째 결혼]

스웨덴에서 비행사로 일하던 중 만난 스웨덴 귀족 출신의 유부녀 카린 폰 칸초와 뮌헨에서 정식으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스웨덴의 에릭 폰 로젠 백작을 비행기로 태워주다 그의 처제였던 카린을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혼 후 괴링과 재혼한 카린은 훗날 그가 나치당 정계에 진출하고 활동하는 데 있어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습니다.

1923

[뮌헨 맥주홀 폭동 가담 및 중상]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뮌헨에서 무력으로 정부를 뒤집으려 일으킨 쿠데타인 '맥주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총상을 입었습니다.
경찰의 총격에 사타구니를 맞아 중상을 입고 체포를 피해 오스트리아로 간신히 도주했습니다. 이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처방받은 진통제로 인해 심각한 모르핀 중독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고질적인 병폐로 남게 됩니다.

1928

[국가의회(Reichstag) 의원 당선]

전체 의석 중 나치당의 득표가 저조했던 1928년 총선에서 바이에른 주를 대표하는 국가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공식적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국회의원 신분을 확보함으로써 나치 운동 내에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으며, 히틀러는 그를 나치즘의 세련된 대외 홍보 담당자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보수적인 사업가들과의 인맥을 구축하여 나치당의 자금줄을 든든히 확보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1932

[국가의회 의장 선출]

나치당이 무려 230석을 싹쓸이하며 제1당으로 강력하게 부상한 1932년 7월 선거 직후, 오랜 관례에 따라 국가의회 의장(President of the Reichstag)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이 막강한 의장 직책을 제3제국이 붕괴하는 1945년까지 유지하며 의회를 철저히 나치당의 입맛에 맞게 통제했습니다. 의회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합법적으로 파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1933

[무임소 장관 및 항공 국가위원 임명]

아돌프 히틀러가 마침내 독일의 수상으로 임명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때, 무임소 장관 겸 항공 국가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독일 내각에서 나치당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2인자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을 비밀리에 재건하는 막중한 임무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회 의사당 방화 사건 개입]

독일 민주주의의 상징인 국가의회 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단정 짓고 대대적인 탄압을 지시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구실로 나치당은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정치적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제국의회 방화 사건 영장'을 신속히 통과시켰습니다. 괴링은 수천 명의 공산당원을 즉각 총살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며 공포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프로이센 주 총리 및 내무장관 임명]

독일에서 가장 크고 핵심적인 영향력을 가진 프로이센 주의 총리(Minister-President) 겸 내무장관으로 전격 임명되어 막강한 행정력과 경찰 통제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취임 직후 그는 프로이센 주 의회의 모든 입법권을 내각으로 이전하는 강력한 수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기존의 프로이센 국가평의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허수아비 자문 기관으로 재편하여 권력을 완벽히 독점했습니다.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 창설]

통일된 국가 경찰 조직을 만들고자 했던 빌헬름 프릭 등 다른 나치 지도자들의 견제에 맞서, 프로이센 주 산하에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라는 특별 비밀경찰 부대를 독자적으로 창설했습니다.
루돌프 딜스를 초기 책임자로 임명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감시하고 억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 조직은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감시 및 공포 정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 가장 두려운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1934

[게슈타포 지휘권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양도]

기존 책임자 루돌프 딜스가 통제 불능으로 커지는 돌격대(SA)의 세력을 강력하게 억누를 만큼 무자비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게슈타포의 모든 통제권을 친위대(SS)의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과감히 넘겨주었습니다.
이 권력 양도 조치는 나치 정권 내부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친위대(SS)가 독일 전역의 경찰 및 보안 권력을 철저하게 독점하고 나치 최고의 억압적인 집단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굳건한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장검의 밤' 사건 주도]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돌격대(SA)의 군사적 세력 확장을 극도로 우려한 히틀러와 뜻을 모아, SA 수뇌부와 정치적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사건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괴링은 힘러, 하이드리히와 매우 긴밀히 모의하여 체포 및 처형 명단을 직접 꼼꼼히 검토하고 살해 대상을 확정했습니다. 이 피의 숙청 기간 동안 수많은 정적들이 불법적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방군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고 나치의 일당 독재 권력을 피로써 확고히 다졌습니다.

1935

[에미 조네만과 두 번째 결혼]

첫 번째 아내 카린이 안타깝게 투병 중 사망한 지 몇 년 후, 함부르크 출신의 인기 여배우 에미 조네만과 베를린에서 대규모의 화려한 두 번째 결혼식을 거행했습니다.
결혼식 전날 베를린 오페라 하우스에서 국가적 행사 수준의 거대한 리셉션이 열렸고, 당일에는 독일군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축하 비행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히틀러가 직접 신랑 들러리로 나서는 등 괴링의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과시하는 무대였습니다.

1936

[4개년 계획 전권대사 임명]

히틀러에 의해 다가올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여 독일 경제와 산업을 군수 체제로 완벽하게 전환하기 위한 막강한 권한의 '4개년 계획' 전권대사로 전격 임명되었습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노동부와 농업부 등 수많은 국가 정부 부처를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경제부 관료들을 철저히 우회하여 군수 산업과 필수 자원 확보를 총괄하며, 독일 내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실질적인 경제 제1인자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1938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압박 주도]

독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철광석 등 풍부한 자원과 인력이 절실했던 괴링은, 오스트리아의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를 강압적으로 협박하여 사임하게 함으로써 조국 합병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습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의 국민투표 선거 문구에 몹시 불만을 품자, 괴링은 직접 오스트리아 수뇌부에 전화를 걸어 무력 침공과 나치당 폭동을 강력히 암시하며 협박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아침 독일군이 무혈입성하며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완전히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1939

[제국방위각료회의 의장 임명]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국가 방위를 총괄하는 전시 내각 성격의 강력한 6인 위원회인 '제국방위각료회의'의 의장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이는 다가올 전쟁 수행에 있어 경제 및 행정 부문을 철저히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일원화하기 위한 히틀러의 핵심적인 조치였습니다. 괴링은 군사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충실하게 거대한 전쟁 지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히틀러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

폴란드 침공으로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바로 그날, 히틀러는 국가의회 특별 연설을 통해 괴링을 자신의 공식적이고 유일한 1순위 후계자로 공개 지명했습니다.
히틀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독일 전체의 총통으로서 내 후계자는 괴링이다"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나치 독일 내에서 괴링이 가진 절대적인 권력과 히틀러의 깊은 신임을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준 순간이었습니다.

1940

[제국원수(Reichsmarschall)로 진급]

프랑스 침공의 눈부신 군사적 성공 이후, 히틀러는 오직 괴링만을 위해 특별히 창설된 전무후무한 '대독일제국 제국원수'라는 초유의 계급을 수여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진급으로 인해 그는 독일 국방군의 다른 모든 육해공 야전원수들보다 훨씬 더 높은 확고한 선임자가 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군대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최고위 장교로 막강한 위상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1945

[히틀러에게 권력 이양 요구 전보 발송]

소련군이 베를린을 겹겹이 포위하고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할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을 접한 괴링은, 자신이 즉각 국가의 지도력을 인수해도 되는지 허가를 간청하는 전보를 발송했습니다.
1941년에 선포된 공식 후계자 법령에 근거하여 철저한 국가의 붕괴를 막으려는 나름의 시도였으나, 정적인 마르틴 보어만의 교묘한 왜곡 보고와 이에 분노한 히틀러에 의해 철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공직에서 해임 및 당적 박탈]

권력 이양을 오만하게 요구한 전보에 극도로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낀 히틀러는 죽기 며칠 전 괴링을 모든 국가 공직에서 즉각 파면하고 나치당에서 영구 제명할 것을 가차 없이 명령했습니다.
히틀러는 분노에 차 그를 국가 반역자로 공식 선언하고 친위대(SS)에 의해 즉시 체포되도록 지시했습니다. 한때 나치 독일의 명실상부한 무소불위 2인자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오버잘츠베르크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6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사형 선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최고위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며, 평화에 반한 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등의 혐의로 최종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기나긴 재판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벌인 일들에 대해 비겁하게 변명하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나치 정권의 주요 인사로서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며 오히려 재판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총살형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전범에게 어울리는 굴욕적인 교수형을 판결했습니다.

[형 집행 직전 음독자살]

교수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던 바로 전날 밤, 감방 안으로 은밀히 밀반입해 숨겨두었던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형 집행을 회피했습니다.
승전국 적들의 손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는 끔찍한 굴욕을 피하고자 한 오만한 마지막 저항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미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맹독을 그토록 오랫동안 숨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합군 교도관의 묵인설 등 다양한 추측과 논란이 현재까지도 흥미롭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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