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연표
1569
[허균 탄생]
조선 강원도 강릉에서 초당 허엽과 강릉 김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 글을 배웠고, 9세에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1580
[부친 허엽 별세]
12세에 부친 초당 허엽이 상주 객관에서 별세했다.
학문은 둘째 형의 벗인 이달에게서 배우다가 나중에 류성룡에게 배웠고, 서자 출신인 이달의 불우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1585
1588
[형 허봉 병사]
이이 탄핵으로 유배 갔던 친형 허봉이 20세에 병사했다.
누이 허난설헌도 시댁과의 불화와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고통받던 시기였다.
1589
1592
[임진왜란 중 가족 상실]
임진왜란 중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했으며,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했다.
이 비극적인 경험 이후 집필에 몰두하며 호를 '교산'으로 사용했다.
1593
[김종직 비판 『김종직론』 발표]
종전 후 학문 연구와 과거 준비 중, 사림의 중시조 김종직을 위선자라 비판하는 『김종직론』을 발표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했음에도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고 비판하며 그를 '위학자'이자 '이익과 관록을 앉아서 차지한 자'로 혹평했다. 이 비판은 사림파에게 심한 공격을 받는 원인이 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쳤다.
1594
[문과 급제 및 관직 시작]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며 승문원 사관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명나라 사신 접견 업무를 수행하며 예조좌랑, 병조좌랑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1597
[중시 문과 장원급제]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종3품으로 승진했다.
관례상 정3품 당상관 승진이 일반적이었으나 그에게는 인사 불이익이 가해졌다.
1598
[황해도 도사 파직 (기생)]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으나 애첩인 기녀를 데리고 간 일로 탄핵받아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99
[황해도 도사 재파직]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으나, 한성부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지속적인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1601
[전운판관, 매창과 교류]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하여 부안의 유명한 기생이자 시인 매창과 교류했다.
그는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1602
[심희수 탄핵 시도 및 명 사신 종사관]
세자시강원 시절 종1품 대신 심희수를 물러가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 지평에게 탄핵받아 추고당했으나, 같은 해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외교관들을 상대했다.
1604
1606
[명 사신 영접 및 난설헌 시집 출간 계기 마련]
명나라 사신 주지번 영접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주지번과 막힘없이 대화하며 글재주와 넓은 학식을 뽐냈다.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선집을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07
[삼척부사 파직 (숭불 논란)]
명나라에 조선 문화를 알린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 법당 출입과 숭불을 이유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을 받아 석 달이 못 되어 파직되었다.
[공주 목사, 서얼들과 교류]
공주 목사로 부임하여 양반가의 서자 무리와 얼손들과 허물없이 교류하며, 『국조시산』을 편찬했다.
1609
[천주교 기도문 입수]
명나라 사절단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왔다.
이는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입증한다.
1610
[과거 부정 연루, 의금부 갇힘]
전시 대독관으로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받아 의금부에 갇혀 지냈다.
[전라북도 함열로 유배]
과거 부정 혐의로 42일간 의금부에 갇힌 뒤,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로 유배되었다.
당시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1611
[『성소부부고』 저술]
유배지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글을 써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이 책에는 당대의 용사, 충신, 명사들에 대한 인물평이 담겨 있다.
1612
[『홍길동전』 저술]
유배지에서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했다.
이 작품은 조선 초 실존 인물 홍길동을 모티프로 이상향을 표현했으며, 이후 석방되어 몇 년간 태인에 은거했다.
1613
[계축옥사 연루 위기, 대북당 가담]
계축옥사 당시 평소 친교가 있던 서얼들이 처형당하자, 연루 위기를 피하고자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당에 참여하며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
1614
1615
[명나라에서 조선 역사 기록 입수]
명나라 천추사로 파견되어 조선왕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문서를 입수, 조선으로 보내는 등 진귀한 책과 유교, 불교 경전을 입수하여 광해군의 칭송을 받았다.
[가선대부 승진 및 천주교 서적 추가 입수]
문신 정시 문과 수석, 동부승지를 거쳐 명나라에서 많은 서책과 함께 천주교 기도문, 지도 등을 들여온 공로로 가선대부로 특별 승진했다.
1616
1617
[의정부 좌참찬, 흉격 사건 연루]
정2품 의정부 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흉격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해명 후 풀려났다.
[인목대비 폐모론 적극 가담]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며 깡패들을 동원해 궁궐 뒷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역모 누명으로 돌아오는 원인이 되었다.
허균은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또한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기 위해 서자와 불만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기도 했다.
[기준격의 역모 고변 시작]
폐모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유배되자, 그의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했다고 의심하며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상소하여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18
[남대문 벽서 사건 발생]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에 대한 국문과 체포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소부부고』 보존 노력]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체포되기 전 문집 『성소부부고』와 누이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딸의 집으로 옮겨, 외손자 이필진에게 훗날 간행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
기준격의 상소와 남대문 벽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역적모의를 하였다는 심복들의 진술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향년 49세.
그의 아들들은 처형되거나 숨어 살았으나, 출가한 딸들은 연좌되지 않았다.
1623
[인조반정 후 복권 불발]
인조 반정 이후에도 북인 당원이었던 이유로 복권되지 못했다.
정조와 고종 때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노론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어 대한제국 멸망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1668
[외손자 이필진의 문집 간행]
허균이 남긴 유언에 따라 외손자 이필진이 그의 문집과 『성소부부고』를 간행하여 후대에 그의 작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1910
[『홍길동전』 저자 밝혀짐]
대한제국 멸망 이후 허균의 저서 『홍길동전』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유몽인 등의 기록을 통해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임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