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연표
1917
1917년 12월 21일 독일 쾰른에서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소년기 나치 하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는 등 저항적인 면모를 보였다.
1939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및 전업 작가 전환]
쾰른대학교 입학 후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 1945년 포로가 되었다가 2년 뒤 30세에 귀향하여 전업 작가로서 전쟁과 폐허를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점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프랑스,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 복무하며 4차례 부상을 당했다. 1945년 4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2년이 지나 그의 나이 30에 전업작가가 된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
[첫 주요 작품 『열차는 정확했다』 발표]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첫 주요 작품 『열차는 정확했다』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열차는 정확했다』를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51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3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성공]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출간하여 비평가와 독자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해 『9시 반의 당구』, 『어느 광대의 견해』, 『신변 보호』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1967
[독일 최고 권위 게오르크 뷔흐너 상 수상]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1969
[사회민주당 선거 유세 참여]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참여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으며, 1969년과 1972년에는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의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1970년대에는 사회 참여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1971
[독일인 최초 국제 펜클럽 회장 역임]
독일인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전 세계적으로 탄압받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활발히 노력했다.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1972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세계적 명성]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소설 ≪여인과 군상≫을 전년도에 발표하고, 이듬해인 1972년 독일인으로는 토마스 만 이후 43년 만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그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는 아직까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74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발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하여 당대 사회의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해 『9시 반의 당구』, 『어느 광대의 견해』, 『신변 보호』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85
[하인리히 뵐 연구소 설립]
그의 저항적 삶과 사회 참여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독일 녹색당은 당의 정책 연구소 이름을 '하인리히 뵐 연구소'라고 명명했다.
하인리히 뵐의 죽음 이후 독일 녹색당은 그의 저항적 삶을 기리기 위하여 당의 정책 연구소 이름을 '하인리히 뵐 연구소'라고 짓기로 결정하였다.
[문학과 사회 참여 정신을 남기고 영면]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진력했던 하인리히 뵐은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7월 16일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