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연표
1922
[역사학자의 탄생]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계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부모님이 쿠폰으로 마련해준 찰스 디킨스 전집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깊은 시야를 갖게 되었고,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창의적인 글쓰기 과정을 통해 작문 실력을 키웠습니다.
1940
[전쟁의 참상 목격]
반파시즘 신념으로 미 육군 항공대 폭격수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베를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을 폭격했으며, 특히 1945년 4월 프랑스 로얀에서 초기 네이팜탄 폭격에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목격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평생 전쟁의 비극과 비윤리성을 비판하고 반전 운동을 펼치는 뿌리가 됩니다.
폭격 9년 뒤 박사후 연구 과정에서 로얀을 방문해 거주민들을 인터뷰하고 공문서를 확인한 결과, 자신이 참여했던 폭격으로 독일군뿐만 아니라 1000명 이상의 프랑스 민간인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를 '비참한 실수'라고 표현하며, 군사적 승진을 위한 명령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플젠 폭격에서도 공식 기록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음을 알게 되면서 전쟁의 윤리적 딜레마에 깊이 천착하게 됩니다. 훗날 그의 저서와 팜플렛에서 드레스덴, 히로시마, 나가사키, 베트남, 이라크 등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비난하며 공중 폭격의 정당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1951
1952
[탄광 파업 연구로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콜로라도 남부의 1913-1914년 탄광 파업 사건을 다룬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는 민중의 삶과 투쟁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56
[민권 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스펠만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흑인 민권 운동의 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들의 학습권과 민권을 위해 투쟁하며, 흔치 않은 백인 교수로서 수많은 흑인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까다로운 절차로 막혀있던 흑인들의 투표권 쟁취 투쟁에 앞장섰고, 흑인 활동가들에 대한 폭력에 항의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 상세히 실려있습니다.
1958
[라과디아 연구로 박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뉴욕시장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연방 하원 의원 시절 입법 활동을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은 공적 권력, 파업 권리, 부의 재분배 등 뉴딜 정책과 유사한 의제를 제시했다고 평가받았으며, 1959년 'LaGuardia in Congres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1963
[행동하는 지성인, 해고되다]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활동 때문에 스펠만 대학교에서 종신 재직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해고당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을 없애려는 그의 노력과 제자들의 투쟁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스펠만에서의 7년을 "가장 즐겁고, 흥분되고, 교육적이었던 순간들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내게 배워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학생들에게서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1964
[보스턴에서의 활동]
보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88년 은퇴할 때까지 학문 활동과 함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SNCC 기록서 출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흑인 민권 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1980
[《미국 민중사》 출간]
권력자 중심의 기존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민중의 관점에서 미국사를 재조명한 《미국 민중사》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어 역사학계와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정복'을 학살과 기만으로 당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시선으로, '프론티어 정책'을 빈곤 계층과 노예, 여성들의 인권 쟁취 투쟁으로 다루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 정부 주류 언론의 합리화 논조와 대비되는 민중의 고통과 우후죽순 일어난 반대 운동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희망은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민중의 쉼 없는 노력에 달려있다고 진단했습니다.
2005
[스펠만대 졸업 연설]
과거 자신을 해고했던 스펠만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실의에 맞서서"라는 제목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08
[배우자 로슬린 진 사망]
평생을 함께하며 그의 활동에 큰 지지가 되었던 아티스트이자 배우자인 로슬린 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0
[위대한 역사가의 타계]
87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스턴 대학교의 명예교수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활동하며, 《미국 민중사》와 평생의 사회운동을 통해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묘비는 보스턴 근처 뉴턴 묘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