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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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 대학교
고등교육기관, 연구중심대학, 대학교 + 카테고리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는 1787년 미국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개척지에서 작은 예비 학교로 출발하여,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초일류 공립형 연구중심대학(State-related research university)으로 성장한 유서 깊은 교육기관입니다. 19세기 두 차례의 파괴적인 대화재를 극복하며 학문적 명맥을 유지했고, 20세기 초 현재의 오클랜드 캠퍼스로 이전한 뒤 '배움의 전당(Cathedral of Learning)'이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며 웅장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 조너스 소크 박사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과 1980년대 토머스 스타즐 박사의 장기 이식 연구 등을 통해 인류 의학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해왔으며, 학술 연구와 대학 스포츠 모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미국 고등교육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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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770

[초창기 예비 학교의 시작]

통나무집에서 예비 학교 형태로 교육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서부 펜실베이니아는 거친 개척지 환경이었습니다.
휴 헨리 브래큰리지(Hugh Henry Brackenridge)에 의해 공식적으로 설립되기 전, 초기 정착민들을 위한 작은 교육 시설로 조촐하게 출발했습니다. 이 시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역 사회에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하며 훗날 대학교로 발전하기 위한 중요한 씨앗을 뿌렸습니다.

1787

[피츠버그 아카데미 인가]

주 의회로부터 피츠버그 아카데미(Pittsburgh Academy)로 공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미국 내 앨러게니 산맥 서쪽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 탄생했습니다.
설립자인 휴 헨리 브래큰리지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회의가 열리기 단 10주 전에 펜실베이니아 연방으로부터 인가를 얻어냈습니다. 미국 18세기에 설립된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교육 기관 중 하나로 공식적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1790

[첫 벽돌 건물 건축]

서드 스트리트(Third Street)와 체리 앨리(Cherry Alley) 남쪽에 학교를 위한 첫 번째 벽돌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본격적인 교육 시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2층짜리 벽돌 건물은 골목을 향해 박공지붕이 나 있는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아래층에 1개, 위층에 2개 등 총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초창기 학생들을 수용하고 가르치는 학문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1819

[대학교로의 승격 및 개칭]

주 의회가 학교의 인가 내용을 수정하여 대학교(University) 지위를 공식 부여했습니다. 이에 따라 웨스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Western University of Pennsylvania, WUP)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피츠버그 지역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산업 발전에 따라 보다 고차원적인 교육의 필요성이 강력히 대두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와 서부 지역에서 자매 결연 기관의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1830

[새로운 3층 건물로의 이전]

학교가 다운타운 피츠버그의 기존 건물 근처에 위치한 새로운 3층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기둥과 둥근 지붕(cupola)을 갖춘 웅장한 외관을 뽐냈습니다.
1830년대 동안 주 의회는 학교가 직업 훈련 위주의 교육을 하기를 원하여 심각한 재정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전통적인 교양 교육(liberal education) 이념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도시와 주의 지원이 끊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교육 철학을 지켜냈습니다.

1845

[피츠버그 대화재로 인한 소실]

피츠버그 대화재(Great Fire of 1845)로 인해 대학교 건물이 전소되었습니다. 이 화재로 학교가 보유했던 대부분의 중요 기록과 파일도 함께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피츠버그 도심의 20개 구역을 무자비하게 휩쓴 대화재는 대학에 치명적이고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후 새로운 건물이 뒤케인 웨이(Duquesne Way)에 건설될 때까지 인근의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에서 임시로 수업을 진행하며 간신히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1849

[두 번째 화재 및 운영 중단]

새로 지어졌던 대학교 건물이 불과 4년 만에 또다시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연속적인 끔찍한 재난으로 인해 대학교는 운영을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하게 됩니다.
두 번의 파괴적인 대형 화재로 인해 학교는 물리적 인프라는 물론 재정적으로도 회복하기 힘든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대학 체계를 재정비하고 건물을 다시 올리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몇 년간 수업을 중단하는 뼈아픈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854

[로스 스트리트 새 건물 건축]

로스 스트리트(Ross Street)와 포브스 애비뉴 모퉁이에 새로운 대학 건물을 세웠습니다. 학교 운영 재개를 위한 물리적 기반이 마침내 다시 마련되었습니다.
두 차례 화재의 아픔을 극복하고 현재 피츠버그 시-카운티 빌딩(City-County building)이 서 있는 부지에 튼튼한 새 건물을 완공했습니다. 이 건물을 통해 기나긴 운영 중단기를 끝내고 다시 학생들을 맞이하여 학문의 불씨를 되살릴 준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855

[수업 운영 공식 재개]

새 건물이 완공된 후, 수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의 수업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재개되었습니다. 대학이 다시 정상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재난을 이겨내고 다시금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기 시작하며 학생 수 또한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후 학교는 너무도 빠르게 성장한 나머지 기존 다운타운의 시설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1865

[앨러게니 천문대 기증]

웨스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WUP)에 앨러게니 천문대(Allegheny Observatory)가 공식적으로 기증되었습니다. 대학의 과학 및 천문학 연구 역량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천문대의 기증은 대학이 단순한 교양 교육 기관을 넘어 실질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발돋움하는 핵심적인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이 시설을 바탕으로 우주 및 물리학 분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쌓아나가게 되었습니다.

1867

[새뮤얼 피어폰트 랭글리 책임자 임명]

천문학자이자 발명가, 항공 개척자인 새뮤얼 피어폰트 랭글리(Samuel Pierpont Langley)가 앨러게니 천문대의 책임자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대학교의 천문학 및 물리학 교수로 열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랭글리는 향후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의 수장이 되는 매우 저명한 학자로, 대학의 전반적인 학술적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그는 1891년까지 피츠버그 대학교에 재직하며 천문대와 관련 학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1889

[옵저버토리 힐로 캠퍼스 이전]

다운타운 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앨러게니 시(현재의 노스 사이드)의 옵저버토리 힐 10에이커 부지로 캠퍼스를 전격 이전했습니다. 새로운 건물인 사이언스 홀(Science Hall)에 먼저 입주했습니다.
기존에 기증받았던 천문대가 위치한 곳으로 캠퍼스를 통합함으로써 학문적 시너지를 높이고 넓은 교육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은 급격한 양적, 질적 팽창을 겪으며 현대적인 종합 대학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어나갔습니다.

[첫 대학 미식축구팀 창단]

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 미식축구(football) 팀이 결성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체육 활동과 교내 스포츠 문화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해입니다.
스포츠 팀의 창단은 학생들의 결속력을 단단히 다지고 대학의 대외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이 팀은 지역과 전국을 아우르는 맹활약을 펼치며 피츠버그 대학교를 대학 스포츠의 명문으로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1890

[메인 홀 완공 및 입주]

옵저버토리 힐 캠퍼스에 지어진 또 다른 핵심 건물인 메인 홀(Main Hall)의 사용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의 인프라 확장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습니다.
전년도의 사이언스 홀에 이어 메인 홀까지 성공적으로 완공되면서 새로운 캠퍼스에서의 교육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학생 수가 대폭 증가함에 따라 보다 다양하고 심도 있는 학사 운영과 공간 활용이 가능해졌습니다.

1891

[제임스 킬러 천문대 책임자 취임]

저명한 천문학자인 제임스 킬러(James Keeler)가 새뮤얼 피어폰트 랭글리의 뒤를 이어 앨러게니 천문대의 새로운 책임자로 부임했습니다.
최고 수준의 학자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함으로써 대학의 천문학 및 물리학 연구의 위대한 명맥이 끊기지 않고 견고하게 이어졌습니다. 킬러 교수의 탁월한 지휘 아래 앨러게니 천문대는 계속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배출했습니다.

1892

[의과대학 전격 병합]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웨스턴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Western Pennsylvania Medical College)이 대학교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피츠버그 대학교 의과대학(School of Medicine)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단일 대학교 체제 내에 의학 분야의 고등 교육 및 전문적인 연구 기능을 정식으로 편입하게 된 매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후 부속 병원 설립 및 선구적인 생명 의료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1893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졸업생 배출]

대학교 역사상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윌리엄 헌터 다먼드(William Hunter Dammond)가 졸업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대학 내 인종 다양성과 평등의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장벽과 편견이 높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먼드의 무사 졸업은 대학의 포용적 교육 철학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빛나는 성취는 이후 수많은 소수 인종 학생들이 고등 교육에 진입하도록 독려하는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1894

[앤드루 멜런 이사회 합류]

훗날 미국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게 되는 당대 최고의 거물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이 대학 이사회의 이사로 선출되었습니다.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지닌 금융가 멜런의 합류로 인해 대학은 강력한 재정적 지원과 인적 네트워크 후원을 동시에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를 비롯한 주요 산업 자본가들의 아낌없는 지원은 대학이 현대적인 명문 기관으로 비약적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1895

[법학대학원 설립]

대학교 내에 법학대학원(School of Law)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훌륭한 법률 전문가 양성을 위한 학술 기관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이 더해졌습니다.
같은 해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와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라는 전설적인 산업가들이 이사회에 추가로 선출되었습니다. 법학대학원의 신설과 당대 최고 자본가들의 이사회 합류가 시너지를 내어 대학의 사회적, 학문적 권위가 수직으로 상승했습니다.

1896

[약학 및 치과대학 병합]

피츠버그 약학대학(Pittsburgh College of Pharmacy)과 피츠버그 치과대학(Pittsburgh Dental School)이 대학교의 일원으로 공식 합류했습니다.
앞서 병합된 의과대학 및 법학대학원에 이어 약학과 치의학까지 아우르는 거대하고 완벽한 종합대학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장을 통해 다양한 전문 의료 직업인을 대거 양성하며 지역 사회 건강과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1898

[최초의 여성 졸업생 배출]

마거릿 스타인(Margaret Stein)과 스텔라 스타인(Stella Stein) 자매가 대학교 최초의 여성 졸업생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여성 고등 교육의 새로운 장이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절대다수가 남성 위주였던 당시의 보수적인 대학 교육 환경에서 스타인 자매의 졸업은 양성평등을 향한 매우 의미 있고 용기 있는 진전이었습니다. 이를 결정적 계기로 삼아 향후 더 많은 여성들이 피츠버그 대학교에 진학하여 탁월한 학업 성취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04

[미식축구팀 무패 시즌 최초 달성]

엑스포지션 파크(Exposition Park)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대학 미식축구팀이 창단 이래 사상 최초로 무패(undefeated) 시즌의 대업을 달성했습니다.
최고 인기 스포츠 분야에서의 압도적인 성과는 학생과 동문, 그리고 지역 주민들 전체에 엄청난 결속력과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스포츠의 대성공은 훗날 피츠버그 대학교가 전국적인 대학 미식축구 명문 강호로 굳건히 군림하는 탄탄한 기틀을 다졌습니다.

1907

[오클랜드 지역 거대 부지 매입]

시내 여러 곳에 중구난방 흩어져 있던 학과와 부서들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현재의 오클랜드(Oakland) 지역에 43에이커 규모의 넓은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당시 노스 사이드 언덕에 위치했던 시설들도 확장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대규모 평지 캠퍼스 조성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부지 매입은 대학이 오늘날의 장엄하고 세련된 도시형(urban) 캠퍼스로 탈바꿈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첫 단추가 되었습니다.

1908

[피츠버그 대학교로 사명 최종 변경]

여름철 주 의회의 통과된 법령에 따라 기존의 '웨스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WUP)'에서 현재의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로 이름이 최종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동부에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Penn)와의 지속적인 명칭 혼동을 피하고, 학교가 굳건히 뿌리내린 피츠버그시와의 강한 유대감을 회복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교명 변경을 단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피츠버그라는 거대 산업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명확히 했습니다.

1909

[오클랜드 캠퍼스로의 대대적 이전]

새롭게 매입한 오클랜드 부지로 대학의 여러 분산된 부서와 시설들이 성공적으로 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의 지리적 통합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건축가 헨리 혼보스텔(Henry Hornbostel)의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30개 동 규모의 장대한 캠퍼스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다만 재정적인 제약 등으로 인해 이 우아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단 4개에 불과했으며, 현재는 소 홀(Thaw Hall)만이 그 흔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팬서(Panther) 마스코트 공식 채택]

가을 학기에 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표범(panther)을 대학의 공식 마스코트로 전격 채택했습니다. 이는 미국 내 대학 중 최초로 표범을 마스코트로 삼은 선구적인 사례입니다.
역동적인 마스코트 채택은 학생들의 애교심과 소속감을 크게 고취시켰으며 대학의 대외적인 브랜딩에도 매우 긍정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도 '피츠버그 팬서스(Pittsburgh Panthers)'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NCAA 디비전 I 무대에서 맹활약하며 그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1925

[배움의 전당 디자인 확정]

존 가버트 보먼(John Gabbert Bowman) 총장이 대학 캠퍼스의 구심점이 될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가 찰스 클라우더(Charles Klauder)의 디자인을 최종 채택했습니다.
보먼 총장은 진정한 교육을 받은 사람의 드높은 인격과 용기, 두려움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무려 535피트(약 163m) 높이의 수직적 타워 디자인을 과감히 구상했습니다. 이 웅장한 건물의 끝이 평평하게 잘린 것은, 인간의 배움과 진리 탐구에는 영원히 끝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숭고한 의도였습니다.

1926

[배움의 전당 착공]

대학의 영원한 상징이자 서반구 전체에서 가장 높은 교육용 건물로 기록된 '배움의 전당(Cathedral of Learning)'의 거대한 건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유한 기부자들의 후원과 더불어, 지역 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 10센트 동전을 모아 기부하는 대대적이고 감동적인 캠페인을 통해 천문학적인 건축 자금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혹독한 여파 속에서도 보먼 총장의 설득력 있는 강력한 리더십 덕분에 공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1931

[배움의 전당 내 첫 수업 실시]

아직 건축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미완성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배움의 전당 건물 내부 공간에서 공식적인 대학 첫 수업들이 감격스럽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네오고딕 양식으로 치장된 경이로운 내부 건축물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학문적 영감과 경외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의 웅장한 1층 커먼스 룸 주변으로는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기리는 31개의 국적의 방(Nationality Rooms)이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1937

[배움의 전당 공식 헌정식]

수년에 걸친 험난한 대공사를 마침내 끝내고 '배움의 전당' 건물이 완공되어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헌정되었습니다. 대학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무려 42층 규모로 치솟은 이 네오고딕 부흥 양식 건물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대학교 건물로 기록되어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이 타워형 건물의 완공으로 인해 피츠버그 대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거대하고 독보적인 랜드마크 캠퍼스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1951

[소아마비 백신 동물 실험 개시]

조너스 소크(Jonas Salk)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대학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사균 소아마비 백신 예방접종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는 소아마비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만 명의 아동이 마비 판정을 받거나 철의 폐(iron lung)에 갇히는 등 사회적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현재 소크 홀(Salk Hall)의 지하실로 불리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를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위대한 의학적 도전이 막을 올린 것입니다.

1953

[소아마비 백신 인체 임상시험 돌입]

소크 박사 연구팀이 마비 증상이 있는 기존 환자들을 대상으로 첫 접종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마침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체 임상시험(human trials)을 전격 개시했습니다.
단순한 실험실 수준의 성과를 넘어 실제 인체에 직접 적용하여 안전성과 예방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매우 중요하고도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획기적 단계였습니다. 이 용기 있는 결정은 전 세계적인 소아마비의 완전한 종식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한 현대 의학계의 가장 기념비적인 전진이었습니다.

1954

[대규모 소아마비 백신 현장 시험]

봄철을 기점으로 백신의 효능을 최종 검증하기 위한 의학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통제된 현장 시험(controlled field trials)이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정성껏 개발된 이 백신을 수십만 명의 자원자와 어린 아동들에게 직접 접종하여 그 안정성과 효능을 오랜 기간 면밀히 추적 관찰했습니다. 이 유례없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미국 전 국민적인 뜨거운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매우 성공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1955

[소아마비 백신 효과 공식 선언]

조너스 소크 박사와 피츠버그 대학 연구진이 피땀 흘려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이 마침내 안전하고 기적적으로 효과적임이 전 세계에 공식 선언되었습니다.
인류 의학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숭고한 과학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수많은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소아마비의 지독한 공포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습니다. 이 획기적인 백신 발명으로 인해 피츠버그 대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글로벌 생명의학 및 면역학 연구의 독보적인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1962

[미국 내 소아마비 발병률 95% 감소]

소크 박사가 개발한 백신이 수년간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된 결과, 미국 내 소아마비 발병률이 무려 95%나 급감하는 경이로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치명적이고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를 백신이라는 예방적 수단을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박멸할 수 있는지를 전 세계에 완벽하게 증명한 빛나는 사례입니다. 이 압도적인 질병 감소 수치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면역학 및 백신 개발 연구 역량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다시 한번 명백히 입증했습니다.

1966

[주 연계(State-related) 대학교 전격 지정]

오랜 기간 순수 사립 기관으로 운영되던 피츠버그 대학교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연방 고등교육 시스템의 일원인 '주 연계(state-related)' 공립형 대학으로 전격 지정되었습니다.
이 중대한 법적 지위 변경을 통해 대학은 막대한 공공 자금의 지원을 안정적으로 받게 되었고, 펜실베이니아 거주 학생들에게 대폭 인하된 학비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학비 보조금 혜택은 신입생들의 대규모 유입을 이끌어내어 대학의 물리적 규모와 학문적 범위가 비약적으로 급팽창하는 거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6

[대학 미식축구 전국 챔피언십 달성]

피츠버그 대학교 미식축구팀이 전설적인 명예의 전당 러닝백 토니 도셋(Tony Dorsett)의 맹활약에 힘입어 무패 시즌을 기록하며 영광의 전국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위대한 우승은 1970년대 대학 스포츠의 화려한 부활과 황금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피츠버그 팬서스의 명성을 미 전역에 다시 한번 크게 떨쳤습니다. 이러한 무적의 스포츠 성과는 1980년대에 댄 마리노(Dan Marino)와 같은 역대 최고의 쿼터백을 배출하며 꾸준히 최정상의 인기를 이어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0

[장기 이식 분야의 세계적 권위 확보]

1980년대를 관통하며 토머스 스타즐(Thomas Starzl) 박사의 획기적인 외과 연구를 통해 대학과 부속 병원이 장기 이식(organ transplantation) 분야에서 압도적인 세계적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스타즐 박사의 지휘 아래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선구적이고 기적적인 장기 이식 수술들이 피츠버그 캠퍼스에서 잇달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임상 의학의 눈부신 성과는 피츠버그 대학교 의료센터(UPMC)가 자타공인 미국 최고의 병원 네트워크로 급성장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91

[웨슬리 포스버 총장 명예로운 퇴임]

장장 24년간 대학을 이끌며 1960년대의 극심했던 재정 위기를 완벽하게 타개하고 대학의 학문적 명성을 최고조로 높인 웨슬리 포스버(Wesley Posvar) 총장이 공식적으로 은퇴했습니다.
포스버 총장의 눈부신 재임 기간 동안 대학의 1년 운영 예산은 무려 7배나 증가하여 6억 3천만 달러에 이르렀고, 든든한 기부금 자산은 3배인 2억 5천7백만 달러로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그의 탁월하고 헌신적인 경영 관리 덕분에 대학은 파산의 위기를 극복하고 초일류 글로벌 연구 대학으로 거침없이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2013

[대서양 해안 연맹(ACC) 정식 가입]

대학교 산하의 모든 주요 체육 대표팀들이 미국 최고의 대학 스포츠 콘퍼런스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서양 해안 연맹(ACC, Atlantic Coast Conference)의 정식 멤버로 합류하여 경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소속 리그를 옮긴 것을 넘어 피츠버그 대학교 스포츠의 경기 수준과 재정적, 상업적 가치를 일거에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최상위권 팀들이 즐비한 새로운 리그에서의 치열한 활약을 통해 대학의 브랜드 가치와 인지도를 미국 전역에 더욱 널리 홍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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