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베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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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베르제
사업가, 예술품 수집가, 산업가, 작가, 예술 후원자 + 카테고리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는 프랑스의 저명한 사업가이자 예술 후원자로,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의 평생 동반자이자 사업 파트너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61년 이브 생로랑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공동으로 설립하여 브랜드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패션 산업뿐만 아니라 미술품 수집가, 유력 언론 매체(르 몽드, 테튀,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 등)의 소유주,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맹활약했습니다. 또한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정치적 발언과 인권 운동(성소수자 인권, 에이즈 퇴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생로랑이 은퇴한 후에는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을 설립하여 그의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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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0

[피에르 베르제 출생]

프랑스 샤랑트마리팀 주의 생피에르돌레롱(Saint-Pierre-d'Oléron)에서 세무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추어 소프라노이자 몽테소리 교육의 옹호자였던 어머니 크리스티안 시카르 아래에서 자라며 라 로셸 지역의 리세 프로망탱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 라 팔리스 시장을 산책하며 맡았던 향신료 냄새는 훗날 모로코 마라케시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으로 이어졌습니다.

1948

[파리 이주]

18세의 나이에 대학 입학 자격 시험(바칼로레아)을 직전에 두고 학업을 중단한 뒤, 언론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파리로 떠났습니다.
정해진 학업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무작정 프랑스의 수도로 향했습니다. 이는 훗날 예술, 문화, 미디어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베르제 인생의 첫 번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58

[이브 생로랑과의 운명적 만남]

파리에서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의 삶과 패션 역사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만남 직후 깊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이후 평생의 동반자이자 완벽한 사업 파트너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베르제는 생로랑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그의 불안정한 천재성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1961

[이브 생로랑 패션 하우스 공동 창립]

이브 생로랑과 함께 독립적인 오트 쿠튀르(하이패션) 하우스를 전격적으로 설립했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 J. 맥 로빈슨이 중요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회사를 열기 전 자금 마련을 위해 베르제는 과거 연인이기도 했던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들과 파리 4구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를 전부 매각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뼈를 깎는 헌신을 바탕으로 전설적인 명품 브랜드의 튼튼한 기반이 다져졌습니다.

1962

[스퐁티니 거리 첫 매장 개장]

파리 스퐁티니 거리(rue Spontini) 30 bis 번지에 이브 생로랑 하우스의 공식적인 첫 번째 문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여성 패션계에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이브 생로랑 브랜드의 첫 공식 본거지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르 스모킹(Le Smoking) 등 브랜드를 상징하는 혁신적인 초기 컬렉션들이 탄생했습니다.

1974

[마르소 거리로 본사 이전]

사업이 크게 성장함에 따라 이브 생로랑 패션 하우스의 본사를 파리 마르소 거리(avenue Marceau) 5번지로 확장 이전했습니다.
제2제정 양식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이 개인 저택은 브랜드의 상징적인 본사이자 창작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이브 생로랑이 2002년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명작 의상들을 디자인한 마법 같은 공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1984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의 우정]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을 만나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공한 사업가를 넘어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베르제는 이후 '프랑수아 미테랑 연구소의 친구들(Amis de l'institut François-Mitterrand)'의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그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습니다.

1988

[대통령 선거 캠페인 전면 지원]

프랑수아 미테랑의 두 번째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 합류하여, 모든 선거 유세 미팅에 직접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동행했습니다.
1981년 미테랑의 첫 대선 당시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확고한 정치적 동지로서 미테랑의 재선을 돕기 위해 막대한 자금력과 개인적인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1989

[중국 반체제 인사 지원]

톈안먼 광장 시위 이후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피신한 중국 학생들과 반체제 인사들을 위해 파리 투르농 거리(rue de Tournon)에 '중국 민주주의의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베르제는 억압받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재정적으로 구출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해당 단체의 회장직을 기꺼이 맡아 인권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90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 창간]

언론인 자크 로슬랭(Jacques Rosselin) 등과 손을 잡고 국제 주간지인 '쿠리에 앵테르나시오날(Courrier international)'을 공동으로 창간했습니다.
전 세계 주요 언론 기사를 선별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해 제공하는 이 참신한 잡지는 출판 직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성공을 통해 베르제는 프랑스 언론 및 출판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91

[공화국 세속주의 위원회 참여]

프랑스의 핵심 가치인 세속주의(라이시테, laïcité) 원칙을 철저히 수호하기 위해 창립된 '공화국 세속주의 위원회'의 초기 창립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매우 명확한 지적 신념을 바탕으로 종교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지지하는 시민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예술 분야의 후원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상적 후원자로서의 역할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1995

[자크 시라크 대선 지지 및 잡지 '테튀' 창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예외적으로 우파 성향의 자크 시라크 후보를 공개 지지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프랑스 최대의 동성애자 대상 잡지인 '테튀(Têtu)'를 창간했습니다.
좌파 지지자였던 그가 시라크를 지지한 것은 당시 정치계의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그가 사재를 털어 만든 잡지 '테튀'는 프랑스 내 성소수자 인권 증진과 에이즈 투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체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베르제는 2013년까지 이 잡지를 직접 소유했습니다.

2001

[파리 시장 선거 들라노에 지지]

파리 시장 선거에 출마한 사회당 좌파 연합의 베르트랑 들라노에(Bertrand Delanoë) 후보를 적극적으로 공개 지지하고 후원했습니다.
파리 시정에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가 강력히 반영되기를 바라며 선거 유세에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들라노에는 파리 시장으로 당선되었으며, 2008년 선거에서도 베르제의 지지는 계속되었습니다.

2002

[이브 생로랑 은퇴 및 재단 공식 출범]

40년 간의 창작 활동을 끝으로 이브 생로랑이 오트 쿠튀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패션 하우스의 연장선상으로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을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파리 마르소 거리의 유서 깊은 본사 건물을 재단 본부 겸 미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이 재단은 수만 점에 달하는 오리지널 스케치와 의상 등 이브 생로랑 하우스의 눈부신 유산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중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2008

[이브 생로랑과의 사별]

자신의 평생 파트너였던 이브 생로랑이 오랜 투병 끝에 71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불과 며칠 전, 두 사람은 팍스(PACS, 시민결합)를 맺어 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완성했습니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깊은 애정과 연대감을 마지막 순간에 팍스 제도를 통해 증명한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파리 생로슈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베르제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등 수많은 저명인사 앞에서 눈물의 고별사를 낭독했습니다.

2009

['세기의 경매' 컬렉션 매각]

이브 생로랑과 평생 동안 수집해 온 거대한 미술품과 골동품 컬렉션을 크리스티(Christie's) 경매를 통해 모두 매각했습니다. 이 경매는 총 3억 7,350만 유로(약 수천억 원)의 엄청난 수익을 기록하며 '세기의 경매'라 불렸습니다.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등 수많은 거장의 희귀 명작들이 대거 출품되었습니다. 베르제는 이 경매로 모인 천문학적인 수익금 전액을 에이즈 연구 재단과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에 흔쾌히 기부하며 진정한 메세나로서의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

2010

[일간지 '르 몽드' 그룹 인수]

프리 통신사 창업자 그자비에 니엘, 투자은행가 마티유 피가스와 합작하여 자본 재구성을 통해 프랑스의 최고 권위 일간지인 '르 몽드(Le Monde)' 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했습니다.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 있던 프랑스 유력 언론을 극적으로 구제함과 동시에,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진보적 가치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미디어 플랫폼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미디어 업계 내 베르제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2011

[마라케시 베르베르 예술 박물관 개관]

모로코 마라케시의 유명한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 내에 자신이 정성껏 수집한 개인 컬렉션을 바탕으로 '피에르 베르제 베르베르 예술 박물관'을 새롭게 개관했습니다.
이 박물관은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문을 열었으며, 약 600여 점의 아름다운 베르베르족 전통 예술품, 장신구, 의상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모로코 문화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보존 의지를 완벽히 실현한 장소입니다.

2015

[레지옹 도뇌르 대장교 훈장 수훈]

프랑스 문화 예술과 패션 산업에 기여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의 대장교(Grand officier) 등급을 수훈했습니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 산업의 세계적인 성공을 진두지휘하고, 언론 자유 수호 및 에이즈 퇴치 등 공익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헌사였습니다. 또한 문화예술공로훈장 사령관장 등 수많은 서훈을 받았습니다.

2017

[매디슨 콕스와의 결혼]

과거 8년 동안 교제했던 미국 출신의 유명 조경가이자 재단 부회장인 매디슨 콕스(Madison Cox)와 정식으로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매디슨 콕스는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의 핵심 임원으로서 베르제의 사업과 예술적 비전을 오랫동안 공유해 온 동반자였습니다. 생애 마지막 해에 이루어진 이 결합은 그가 남길 거대한 유산이 콕스에게 안정적으로 승계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피에르 베르제 타계]

프랑스 남부 생레미드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에 위치한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피에르 베르제가 86세를 일기로 평온히 눈을 감았습니다.
패션, 예술, 언론, 정치 등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거물의 죽음에 정계와 문화계 각층의 애도가 쏟아졌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메세나이자 이브 생로랑의 영원한 수호자로 역사에 그 이름을 굳건히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브 생로랑 박물관 파리·마라케시 동시 개관]

피에르 베르제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한 달 뒤, 그가 생전에 모든 열정을 쏟아 기획했던 '이브 생로랑 박물관' 두 곳이 파리와 마라케시에 성공적으로 개관했습니다.
파리 마르소 거리의 역사적인 본사와 모로코 마라케시 마조렐 정원 인근에 세워진 이 두 박물관은 이브 생로랑의 경이로운 의상들을 일반에 상설 전시합니다. 베르제의 마지막 헌신 덕분에 두 사람의 빛나는 예술적 유산은 전 세계 대중과 영구적으로 공유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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