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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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프로이센 국왕, 계몽군주, 군사 전략가, 작가 + 카테고리

프로이센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받습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프로이센을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고문 폐지 종교 관용 정책 의무교육 확대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스스로를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 칭하며 통치에 임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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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712

[프리드리히 2세의 탄생]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왕녀의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두 형이 요절하여 태어날 때 이미 왕세자였습니다.

1730

[국외 탈출 시도 실패]

부왕의 폭압적인 태도에 지쳐 사촌인 영국 아멜리아 공주와의 혼담을 기회로 삼아 육군 중위 한스 헤르만 폰 카테의 도움을 받아 국외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탈출 모의를 도왔던 소위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 폰 카이스가 도망쳐 모의를 누설하면서 왕세자와 폰 카테가 체포되었습니다. 부왕은 프리드리히를 왕위 대상에서 제외하고 처형까지 고려했으나, 군사재판은 왕세자를 단죄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부왕의 명령으로 폰 카테는 프리드리히 앞에서 참수당했고, 프리드리히는 실신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실의와 함께 큰 시련이 되었으며, 후일 그가 고난을 이겨내는 훈련이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석방 및 복권]

감옥의 목사가 부왕에게 아들이 더 이상 반항적이지 않다고 보고하면서 조건부 사면을 받았습니다.

이후 부왕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73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의 결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오스트리아 원수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공 페르디난트 알베르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습니다.

1740

[프로이센 국왕 즉위 및 초기 개혁]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로이센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직후 계몽주의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며 고문 폐지, 언론 검열 폐지, 종교 차별 금지를 법으로 제정하고 오페라 극장 건설, 빈민 구제, 왕실 근위부대 해산 등을 실행했습니다.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을 단행하고 학문을 멸시했던 선왕 때 폐업 상태였던 베를린 아카데미를 부흥시켜 '북방의 아테네'로 칭송받게 했습니다. 또한 볼테르의 도움으로 《반(反)마키아벨리론》을 공식 발표하며 군주의 윤리를 규정했습니다.

[슐레지엔 침공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죽음을 틈타 4만 명의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합스부르크 왕가 영지인 슐레지엔으로 진격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황위 계승에 대한 반발이자 슐레지엔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황위 계승을 반대하고,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를 지원하여 그를 황위에 앉혔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2세는 일생일대의 숙적이 되었습니다.

1742

[브레슬라우 조약 체결과 슐레지엔 획득]

마리아 테레지아의 협상 요청을 수용하여 브레슬라우 조약을 체결, 거의 모든 슐레지엔 영토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변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그가 신의를 저버렸다며 비판하고 프로이센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1744

[동프리슬란트 병합]

동프리슬란트 공작 카를 에드차르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동프리슬란트를 점령하여 병합했습니다.

[보헤미아 진격과 프랑스 동맹]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로 진격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원하는 동시에, 프랑스 루이 15세에게 비밀 사절을 보내 비밀 협정을 성사시켰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슐레지엔에서 군대를 철수했으나, 1744년 6월부터 9, 12월 세 차례에 걸쳐 슐레지엔을 침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745

[드레스덴 조약 체결과 '대왕' 칭호 획득]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받는 조건을 인정하고 슐레지엔에 대한 권리와 100만 타라의 배상금을 얻어냈습니다.

이 조약으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사실상 황제와 동격이라는 의미를 내포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 어디에서도 최고 실권자로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1756

[7년 전쟁 발발 및 작센 침공]

마리아 테레지아가 러시아와 프랑스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결탁하여 슐레지엔 탈환을 노리자,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전쟁 승리의 비결은 공격에 있다'는 신념으로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작센 공국을 선제 침공하며 7년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 15일 작센이 항복하며 전투에서 큰 손실 없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영국 하노버 왕조와 브라운슈바이크, 헤센카젤로부터 재정과 군사 원조를 약속받았습니다.

1757

[콜린 전투 패배]

그간 무적으로 평가받던 프로이센군이 콜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크게 패배하면서 수세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연합군에 스웨덴과 독일 제후국들까지 가세하며 프로이센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의 침략을 이유로 군사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이 시기 자살까지 생각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1759

[크네르스도르프 전투 패배]

크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총상을 입고 타고 있던 말이 고꾸라지는 등 위기에 처했고, 결국 패주했습니다.

1760년 10월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베를린을 포위하는 등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762

[러시아의 기적적 강화와 위기 탈출]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급사하고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면서 프로이센과 러시아 사이에 기적적으로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러시아는 병력을 넘겨주고 스웨덴도 평화를 선언하며 전쟁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는 뜻밖의 행운으로, 긴 전쟁에 지쳐가던 열강들이 차례로 군사를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63

[7년 전쟁 종결과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공략하여 승리한 후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더 이상 큰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1763년 2월부터 유럽 전체에 평화가 찾아왔으며,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 로마 제국 통치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772

[제1차 폴란드 분할 참여]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여 당시 폴란드령이었던 서프로이센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1778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발발]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다시 교전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부흥을 경계하여 작센 등과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습니다.

1786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에서 갑작스레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만년에 가족과 친구가 모두 죽자 고독과 인간 불신이 심해져 애견 그레이하운드들만이 그의 위로 대상이었으며,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91년 상수시 궁전 마당에 옮겨져 애견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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