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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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
탐험가, 해적, 해군 제독, 사략선 선장, 정치인 + 카테고리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잉글랜드 최고의 해군 영웅이자 스페인의 가장 끔찍한 악몽인 '용(El Draque)'으로 군림한 인물입니다. 초기 노예 무역선 선원과 사략선 선장을 거치며 바다의 이치를 깨우친 그는, 단일 원정으로는 세계 두 번째이자 영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하는 극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하는 데 부사령관으로서 결정적 공헌을 하여 대영제국 해상 패권의 위대한 서막을 열었습니다. 파나마 원정 중 병으로 허무하게 바다에 수장되며 결말을 맞았으나, 변방의 섬나라 영국을 세계 최강의 해양 제국으로 이끈 입지전적인 상징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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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40

[데번 타비스토크에서 출생]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데번주 타비스토크의 크라운데일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확한 출생일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초상화와 문헌을 통해 대략 1540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신교 농부인 에드먼드 드레이크와 메리 밀웨이 사이에서 12명의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부였던 제2대 베드퍼드 백작 프랜시스 러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49

[켄트주로의 가족 도피]

발생한 '기도서 반란(Prayer Book Rebellion)' 도중 종교적 박해를 피해 드레이크의 가족은 데번을 떠나 켄트 지방으로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바다와 가까워지는 환경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켄트로 이주한 후 그의 아버지는 국왕 해군의 선원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직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부제로 서품을 받아 메드웨이 강변의 업처치 교구 목사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습니다.

1555

[초기 항해 견습 시작]

플리머스의 저명한 선장이자 친척인 윌리엄 호킨스의 배에 견습 선원으로 승선하여 본격적인 해상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무역선을 타며 바다의 생리를 익힌 그는 점차 뛰어난 선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메드웨이 강과 네덜란드 연안을 오가는 소형 바크선의 선주에게 어린 드레이크를 맡겼습니다. 선장은 드레이크의 근면하고 뛰어난 품행에 매우 만족하여, 자식 없이 사망할 때 그 배를 드레이크에게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1562

[첫 노예 무역 항해 참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독점하던 서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영국의 존 호킨스가 뛰어들 때, 드레이크도 일반 선원의 자격으로 첫 노예 무역 항해에 동승했습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번째 대규모 국제 해상 무역이었습니다.
이 원정에서 호킨스는 시에라리온 연안에서 포르투갈 노예선을 무력으로 나포한 뒤, 아프리카인들을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팔아넘겼습니다. 드레이크는 자금 투자자는 아니었으나 이 불법적이지만 수익성이 높은 무역의 실태를 생생히 목격했습니다.

1564

[두 번째 노예 무역 동참]

존 호킨스가 이끄는 두 번째 노예 무역 원정에도 연이어 참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직접 선박을 지원할 정도로 판이 커진 이 원정은 카리브해에서 노예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여왕은 호킨스에게 '지저스 오브 뤼베크'라는 대형 배를 빌려주었고 이 배가 기함 역할을 했습니다. 일개 선원이었던 드레이크도 원정의 큰 성공 덕분에 배분된 수익금의 일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566

[존 러벨과의 항해 참여]

스페인의 거센 외교적 항의로 호킨스의 출항이 금지되자, 친척인 존 러벨이 지휘하는 노예 무역선에 탑승하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항해는 이전과 달리 상업적으로 완벽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당국의 방해로 인해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90명이 넘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드레이크가 해상 무역에서 경험한 첫 번째 뼈아픈 좌절이었습니다.

1567

[호킨스와의 마지막 합동 원정]

존 호킨스와 함께 그들의 마지막 합동 노예 무역 원정에 나섰습니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두 명의 현지 왕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적대 부족을 공격하여 수백 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떠난 후 폭풍과 스페인의 적대 행위, 그리고 허리케인을 연달아 만나 함대가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배를 수리하기 위해 멕시코 만의 베라크루스 근처인 산 후안 데 울루아 항구로 무리하게 진입해야만 했습니다.

1568

[산후안데울루아 전투 패배]

산 후안 데 울루아 항구에서 협상 중이던 스페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잉글랜드 함대가 사실상 궤멸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주디스'호의 선장이었던 드레이크는 사령관 호킨스를 남겨둔 채 배를 이끌고 도주했습니다.
스페인군의 화공선 공격으로 두 척을 제외한 모든 영국 배가 소실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백 명의 선원이 버려졌습니다. 간신히 영국으로 살아 돌아온 호킨스는 드레이크가 자신을 버렸다고 비난했으며,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대한 평생의 지독한 복수심을 품게 됩니다.

1572

[첫 독자적 대규모 원정 출항]

단순한 무역을 넘어 스페인에 대한 보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한 첫 독자적 원정을 조직하여 출항했습니다. 73명의 선원과 파샤호, 스완호라는 두 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플리머스 항을 힘차게 떠났습니다.
그의 주요 표적은 페루의 엄청난 은과 금이 집결되어 스페인 갤리언선으로 옮겨 실리는 파나마 지협의 핵심 항구 도시 '놈브레 데 디오스'를 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전설적인 사략선 선장(해적)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신호탄이었습니다.

[놈브레 데 디오스 첫 습격]

밤을 틈타 놈브레 데 디오스 시내를 기습적으로 점령했으나, 전투 중 드레이크 본인이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부하들이 부상당한 그를 피신시키느라 왕실 금고의 막대한 보물은 챙기지 못한 채 서둘러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 뼈아픈 실패 이후 그는 정면 공격 대신 연안의 스페인 갤리언선들을 끈질기게 괴롭혔습니다. 또한 스페인 주인의 손아귀에서 도망친 아프리카 노예들인 '시마론'들과 굳건한 동맹을 맺어 밀림의 지형지물과 정보를 제공받으며 새로운 작전을 도모했습니다.

1573

[부와 함께 영국으로 귀환]

막대한 보물을 싣고 잉글랜드 플리머스 항으로 무사히 귀환하며 길었던 원정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는 스페인과 임시 휴전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에 그의 업적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치하할 수는 없었습니다.
숨겨둔 보트에 도착하여 기다리던 동료들을 만났을 때, 그는 장난기가 발동해 침울한 표정을 짓다가 곧 스페인 금화를 내던지며 "우리의 항해는 끝내주게 성공했다!"라고 외쳤습니다. 비록 비공식적 환영이었으나 영국 사회는 그의 성과에 열광했습니다.

[태평양을 처음으로 목격함]

파나마 지협 중앙의 험준한 산맥을 넘던 중 부관 존 옥슨햄과 함께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 잉글랜드인 최초로 광활한 태평양을 목격했습니다. 이 순간 그는 언젠가 반드시 영국 배를 이끌고 저 바다를 항해하겠다는 굳은 맹세를 남겼습니다.
시마론 부족민들이 거대한 나무 기둥에 계단을 파주어 꼭대기 플랫폼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역사적인 목격과 다짐은 훗날 그가 남미 대륙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무모한 세계 일주를 단행하는 거대한 정신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스페인 은 수송대 대규모 나포]

프랑스 사략선 선장 기욤 르 테스튀 일행 및 시마론 동맹군과 연합하여 놈브레 데 디오스로 향하던 스페인 노새 수송대를 정글 깊숙한 곳에서 습격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20만 페소 이상의 막대한 금과 은을 탈취하며 상상 초월의 부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탈취한 보물이 너무 무거워 가져갈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은은 땅에 묻거나 덤불 속에 몰래 숨겨두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이 압도적인 약탈의 성공으로 인해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대중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스페인에게는 가장 악랄한 해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1575

[아일랜드 래슬린 섬 학살 가담]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벌 작전 중 하나인 래슬린 섬 포위 공격에 해상 지휘관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항복한 아일랜드 방어군과 수백 명의 민간인, 여성, 아이들이 잉글랜드 지상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작전 중 드레이크는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의 게일족 지원군이 배를 타고 섬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해상 봉쇄를 담당했습니다. 이 봉쇄로 인해 게일족 지도자 솔리 보이 맥도넬은 본토에서 발이 묶인 채 자신의 일족이 도륙당하는 것을 눈물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1577

[세계 일주를 향한 첫 출항]

이른바 '유명한 항해(Famous Voyage)'로 명명된 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타격 및 세계 일주 원정을 위해 플리머스 항에서 닻을 올렸습니다. 프랜시스 월싱엄, 로버트 더들리 등 엘리자베스 여왕의 핵심 측근들이 은밀히 자금을 댄 사적 신디케이트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여왕 역시 이 대담한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공식적인 위임장은 발급해주지 않았습니다. 야심 찬 출발과 달리 곧바로 극심한 악천후를 만나 함대가 위협받았고, 결국 수리를 위해 플리머스로 되돌아와야 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펠리컨호를 기함으로 재출항]

배의 수리를 마친 후 펠리컨(Pelican)호를 기함으로 삼아 4척의 배와 164명의 선원을 이끌고 다시 거친 대서양으로 나아갔습니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포르투갈 상선을 나포한 뒤 남미 해역에 정통한 선장 누노 다 실바를 납치하여 길잡이로 삼았습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가혹한 여정 동안 심각한 인명 손실과 선박 파손을 입어 두 척의 배를 불태우고 버려야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닿은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산 훌리안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으며, 그곳에서 50여 년 전 마젤란 함대가 남긴 음산한 처형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1578

[선상 반란 혐의 토마스 다우티 처형]

푸에르토 산 훌리안에 머무는 동안 함대 내에서 끔찍한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워 공동 지휘관 격이었던 귀족 토마스 다우티를 약식 재판에 회부하고 즉각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마젤란이 과거 선상 반란자를 처형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사건입니다. 합법적인 사법 권한 없이 이루어진 드레이크의 독단적이고 무자비한 조치였기에 잉글랜드 내에서 큰 정치적 논란을 빚었으나, 처형 직후 함대의 느슨해진 규율은 무섭게 다잡아졌습니다.

1579

[북미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 도달]

남미 서해안의 스페인 항구와 보물선들을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맹렬히 추격해 오는 스페인 함대를 따돌리기 위해 북쪽으로 기수를 돌려 오리건 주 인근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영국 선박으로서는 북미 서해안을 가장 깊숙이 탐험한 첫 사례였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탐험가들조차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선 일부만 파악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드레이크는 최소 북위 48도 부근의 척박한 바다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나, 매서운 악천후와 거센 파도에 막혀 결국 뱃머리를 다시 남쪽으로 돌린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노바 알비온(새로운 잉글랜드) 영유권 선포]

현재의 북캘리포니아 연안에 있는 평화로운 만에 닻을 내리고 수주 동안 파손된 배를 대대적으로 수리했습니다. 그는 이 미지의 땅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신성한 영토임을 선언하고 '노바 알비온(New Albion)'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여왕의 이름과 통치권을 새긴 황동 명판을 튼튼한 기둥에 박아 세웠습니다. 이는 스페인의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던 드넓은 태평양 연안에 영국이 처음으로 제국주의적 영토 권리를 당당히 선포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580

[위대한 세계 일주 달성 및 무사 귀환]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횡단하고 동인도 제도와 아프리카 희망봉을 차례로 돌아 마침내 잉글랜드 플리머스 항으로 극적인 귀환을 완수했습니다. 이는 단일 원정으로는 마젤란 함대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이룩한 불멸의 세계 일주 기록이었습니다.
그의 낡은 기함 '골든 하인드(Golden Hind)'호의 창고에는 스페인 선박에서 빼앗은 엄청난 양의 금과 은, 진귀한 향신료가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보물은 투자자들에게 원금의 4,700%라는 천문학적인 배당금을 안겨주었으며, 영국 왕실의 외채를 단번에 탕감할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였습니다.

1581

[카멜포드 지역구 하원의원(MP) 선출]

국가적 명성을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제4대 의회 마지막 회기에서 카멜포드 선거구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공식 선출되어 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입법부의 일원이 되긴 했으나 해상 임무와 쏟아지는 각종 국사 업무가 너무 바빠 의정 활동에 꾸준히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실제로 선출 직후인 2월 17일에 여왕의 중대한 공무 수행을 이유로 의회로부터 장기 휴가 허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

스페인 대사의 맹렬하고 노골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템스 강에 화려하게 정박한 '골든 하인드'호의 갑판에 직접 올라 그에게 영예로운 기사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평민 출신의 해적이 단숨에 국가적 영웅이자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빛나는 순간입니다.
외교적 마찰을 분산시키기 위해 여왕은 동맹국인 프랑스의 외교관에게 칼을 쥐어주며 작위 수여를 대행하게 하는 고도의 정치적 수사를 발휘했습니다. 이후 드레이크는 여왕으로부터 독자적인 문장을 하사받고 "작은 시작에서 위대한 성취를(Sic Parvis Magna)"이라는 웅장한 모토를 평생 사용하게 됩니다.

[플리머스 시장 취임 및 행정가 활약]

하원의원 선출에 이어 같은 해 가을,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항구 도시 플리머스의 시장으로 성대하게 취임했습니다. 해양 거점 도시의 행정가로서 인프라 구축과 지역 경제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남겼습니다.
시장 재임 중 도시 호(Hoe) 언덕에 대형 나침반을 세우고, 지역의 핵심 산업인 정어리 무역을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또한 미비 강에서 맑은 물을 끌어오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하고 수력 제분소를 세워 도시의 발전과 개인의 막대한 부를 동시에 일구어냈습니다.

1585

[영국-스페인 전쟁 발발과 서인도 제도 타격]

영국과 스페인 간의 피할 수 없는 공식적인 전쟁이 발발하자, 여왕의 명을 받아 대규모 공격 함대를 이끌고 아메리카 대륙의 굵직한 스페인 식민지 항구들을 타격하는 선봉장으로 나섰습니다. 무자비한 '용(El Draque)'의 공포가 재현되었습니다.
카리브해의 핵심 거점인 산토도밍고,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 그리고 플로리다의 세인트 어거스틴 등을 연달아 점령하고 철저히 불태웠습니다. 이는 스페인의 신대륙 방어망과 자금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며 펠리페 2세의 거대한 복수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1588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 역사적 격파]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영국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띄운 무적함대를 상대로, 잉글랜드 방어 함대의 부사령관(중장)으로 참전하여 조국을 구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영국이 스페인을 꺾고 세계 해상 패권을 거머쥐는 거대한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칼레 앞바다와 그레벨린 해전 등에서 잉글랜드 갤리언선의 우수한 기동력과 치명적인 화공선 전술을 지휘하여, 초승달 진형으로 밀려오던 스페인 대함대를 완벽히 흩어놓고 궤멸시켰습니다. 이 극적인 승리로 그는 잉글랜드뿐 아니라 전 유럽에 전설적인 해군 명장으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1589

[영국 아르마다(드레이크-노리스 원정) 대참패]

무적함대를 격파한 기세를 몰아 스페인의 해군력을 완전히 뿌리 뽑고 포르투갈에서 반란을 선동하기 위해 이른바 '영국 아르마다'로 불리는 거대한 원정대를 이끌고 출정했으나 뼈아프고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스페인의 코루냐와 리스본을 자신만만하게 포위 공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번번이 격퇴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끔찍한 전염병과 보급 물자 부족이 겹치면서 잉글랜드군은 수많은 전사자와 막대한 국가적 재정 손실만 남긴 채 처참하게 패퇴했고, 이로 인해 드레이크의 무패 명성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1593

[플리머스 하원의원 재선출 및 국방 논의]

원정 대참패의 책임으로 한동안 야인으로 물러나 있던 드레이크는 자신이 시장을 지냈던 플리머스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다시 선출되며 정계의 일선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의회에 돌아온 그는 지역구인 플리머스의 상업적 이익을 대변하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스페인의 재침공 위협이 여전히 잉글랜드의 목줄을 겨누고 있음을 강경하게 역설하며 해안 방어망 확충과 해군력 강화를 위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습니다.

1596

[파나마 원정 중 병으로 비극적 사망]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선 생애 마지막 파나마 카리브해 원정 도중, 심한 이질에 걸려 포르토벨로 앞바다의 선상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생 험난한 파도를 누비며 제국의 초석을 다진 전설적인 제독의 허무하고 안타까운 최후였습니다.
산 후안 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나마 상륙 공격마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간 절망적인 고립 상황 속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납으로 만든 무거운 관에 담겨 화려한 군사적 예우를 받으며 그가 일평생 호령했던 카리브해의 깊고 푸른 바닷속으로 영원히 수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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