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코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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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다리오 프랑코 코렐리(Dario Franco Corelli)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테너 중 한 명입니다. 본래 해군 공학을 전공했으나 친구의 권유로 뒤늦게 성악의 길에 들어섰으며, 정규 음악 교육을 짧게 받은 뒤 독학으로 자신만의 발성법을 구축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마리아 칼라스와의 파트너십으로 전설적인 무대를 남겼으며, 196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이후 '미스터 솔드 아웃(Mr. Sold Out)'이라 불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강력한 고음과 영웅적인 음색, 그리고 '황금 종아리'라 불릴 만큼 매력적인 외모로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을 사로잡았습니다. 1976년 55세의 이른 나이에 무대에서 은퇴한 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2003년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연표
1921
[프랑코 코렐리의 탄생]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에서 해군 조선소 관련 일을 하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음악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 자신도 청소년기에는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본명은 다리오 프랑코 코렐리입니다. 그의 가족은 그가 공학 계열의 직업을 갖기를 원했고, 그 또한 초기에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엔지니어를 꿈꾸었습니다.
1946
[공학도에서 성악가로 진로 변경]
볼로냐 대학에서 해군 공학을 공부하던 중, 친구의 권유로 참가한 노래 대회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성악가가 되라는 격려를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학업을 중단하고 페자로 음악원(Conservatorio di Pesaro)에 입학합니다.하지만 음악원에서의 정규 교육이 자신의 목소리를 오히려 해친다고 판단하여 곧 자퇴했습니다. 이후 그는 엔리코 카루소, 베니아미노 질리 등 위대한 테너들의 레코드를 들으며 독학으로 발성을 연구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1951
[스폴레토에서의 공식 데뷔]
스폴레토의 실험 극장(Teatro Sperimentale)에서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돈 호세 역을 맡아 공식적으로 데뷔합니다. 비록 독학으로 배운 노래였지만, 그의 압도적인 성량과 카리스마는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원래는 '라다메스' 역으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충분한 준비를 위해 3개월간 더 훈련한 뒤 '돈 호세' 역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이 성공적인 데뷔는 그가 로마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1952
[로마 오페라 극장 데뷔]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잔도나이의 오페라 '줄리에타와 로미오(Giulietta e Romeo)'의 로미오 역을 맡아 데뷔합니다. 이 공연을 통해 그는 이탈리아 주요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재목임을 입증했습니다.로마 오페라 극장은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극장 중 하나였으며, 이곳에서의 성공은 그가 곧이어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와 호흡을 맞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3
[마리아 칼라스와의 첫 만남]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벨리니의 '노르마' 공연을 통해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섭니다. 이 공연은 코렐리의 경력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코렐리는 폴리오네 역을 맡아 칼라스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라 스칼라 등 여러 무대에서 파트너로 활약하며 오페라 역사의 황금기를 장식하는 듀오가 되었습니다.
1954
[라 스칼라 극장 데뷔]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지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 공연에 섭니다. 스폰티니의 '베스타의 여사제(La Vestale)'에서 리치니오 역을 맡아 마리아 칼라스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었습니다.이 공연은 루키노 비스콘티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라 스칼라 데뷔는 코렐리가 이탈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무대를 보장받았음을 의미했습니다.
1957
[런던 코벤트 가든 데뷔]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코벤트 가든)에서 푸치니의 '토스카' 중 카바라도시 역으로 데뷔합니다. 이는 그의 첫 번째 주요 해외 원정 공연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영국 관객들에게 그의 강력한 스핀토 테너의 음색을 각인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유럽 전역의 주요 극장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8
[로레타 디 렐리오와 결혼]
동료 소프라노였던 로레타 디 렐리오(Loretta Di Lelio)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녀는 결혼 후 자신의 경력을 접고 남편의 매니저이자 코치, 그리고 가장 엄격한 비평가로서 내조에 전념했습니다.로레타는 코렐리가 무대 공포증이나 신경 과민을 겪을 때마다 그를 지탱해 준 인물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목소리 상태와 공연 계약 등을 세심하게 관리하며 그의 성공을 뒷받침했습니다.
[나폴리에서의 '검' 사건]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일 트로바토레' 공연 중 야유를 보낸 관객에게 격분하여 무대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무대 의상인 검을 든 채 관객석(박스석)으로 달려가 항의했다고 합니다.이 사건은 코렐리의 불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그는 관객의 야유를 참지 못하고 공연을 중단시킬 뻔했으나, 이러한 열정적인 기질은 오히려 그의 무대 장악력을 대변하는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1960
[라 스칼라에서 '폴리우토' 공연]
도니제티의 오페라 '폴리우토'에 출연하여 마리아 칼라스의 라 스칼라 복귀 무대를 함께했습니다. 이 공연은 두 거장의 만남으로 인해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이 공연은 칼라스와 코렐리가 함께한 마지막 전성기 공연 중 하나로 꼽힙니다. 코렐리는 난이도 높은 도니제티의 악곡을 드라마틱하게 소화해 내며 극찬을 받았습니다.
1961
[비르기트 닐손과의 '투란도트' 전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 전문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손과 함께 '투란도트'를 공연합니다. 두 사람의 성량 대결은 '세기의 대결'이라 불리며 오페라계의 전설로 남았습니다.닐손의 거대한 성량에 맞서 코렐리는 2막의 고음 파트에서 엄청난 길이로 음을 끌어 관객들을 열광시켰습니다.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최고의 파트너로 인정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레온틴 프라이스와 함께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공연이 끝난 후 40분 이상 기립 박수가 이어지는 등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루돌프 빙 총감독은 그를 '카루소 이후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평했습니다. 이 데뷔를 기점으로 그는 1975년까지 메트로폴리탄의 간판스타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1962
[라 스칼라 '위그노 교도들' 공연]
라 스칼라 극장에서 조안 서덜랜드와 함께 마이어베어의 대작 '위그노 교도들(Les Huguenots)'을 공연합니다. 라울 역을 맡은 코렐리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이 공연은 20세기 오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캐스팅 중 하나로 회자됩니다. 코렐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 레퍼토리를 넘어 프랑스 오페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함을 증명했습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데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합니다. 카라얀은 코렐리의 목소리를 '천둥과 번개'에 비유하며 그를 아꼈습니다.카라얀과의 협업은 코렐리의 음악적 해석을 한층 깊게 만들었습니다. 이 공연 실황은 녹음으로 남아 있어 전성기 코렐리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1964
[파리 오페라 극장 데뷔]
파리 오페라 극장(가르니에)에 데뷔하여 '토스카'와 '노르마'를 공연합니다. 프랑스 관객들은 그의 완벽한 불어 발음(후에 베르테르 등에서 보여줄)과 영웅적인 외모에 열광했습니다.파리에서의 성공은 그가 프랑스 오페라 레퍼토리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낭만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1967
[메트에서의 '로미오와 줄리엣' 성공]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즌 개막작으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합니다. 미렐라 프레니와 함께한 이 공연은 그의 개인적인 최고의 승리 중 하나로 꼽힙니다.당시 비평가들은 그의 불어 딕션과 서정적인 표현력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로미오' 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테너라는 평을 들으며 대중적인 인기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1971
[메트에서의 '베르테르' 공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마스네의 '베르테르' 타이틀 롤을 맡습니다. 그는 기존의 서정적인 해석과 달리 더욱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베르테르를 창조해 냈습니다.그는 이 역할을 위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깎는 등 외모적인 변화도 주었습니다. 일부 비평가는 스타일의 변화를 지적했지만, 관객들은 그의 비극적이고 강렬한 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1973
[일본 순회공연]
일본을 방문하여 순회공연을 가집니다. 당시 일본에서의 공연은 그의 경력 후반부를 장식하는 중요한 이벤트였으며, 아시아 팬들에게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줄 기회였습니다.목소리의 기량이 조금씩 쇠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대 장악력은 여전했습니다. 일본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그가 세계적인 스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1976
[오페라 무대 은퇴]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을 끝으로 55세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합니다. 아직 노래할 수 있는 나이였기에 그의 은퇴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아쉬움을 주었습니다.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손상된 상태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과 무대 공포증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른 은퇴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1981
[마지막 콘서트 출연]
미국 뉴저지 뉴어크에서 열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멈춥니다. 이후 그는 뉴욕과 밀라노를 오가며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등 교육 활동에 전념합니다.안드레아 보첼리 등 후배 가수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오페라계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많은 성악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2003
[밀라노에서 사망]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뇌졸중과 심장 질환으로 투병하던 중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유해는 밀라노의 기념비적 묘지(Cimitero Monumentale)에 안장되었습니다.그의 죽음과 함께 전 세계 언론은 '황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며 애도했습니다.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그를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20세기 최고의 테너 중 한 명을 떠나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