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2월 혁명
연표
1830
[7월 왕정 수립]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 1세가 입헌 군주로 즉위하면서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그러나 이는 2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소수 부유층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여, 일부 자본가들이 의회를 독점하는 불공정한 체제로 이어지면서 후일 혁명의 주요 원인을 제공했다.
프랑스 산업 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 개혁과 민주적 입헌정, 공화정을 열망했으며, 근대공업 발달로 성장한 노동자 계급은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점차 큰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1847
[경제 위기 및 개혁운동]
1846년 소맥 흉작으로 농민 폭동이 발생하고 도시 식량 부족, 물가 상승, 중소기업 도산, 실업 증대 등 심각한 경제 공황이 프랑스를 덮쳤다.1847년 기조 내각은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고, 이에 개혁파는 '개혁연회'를 개최하며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정부는 이러한 위기에 아무런 타개책도 내놓지 못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
1848
[임시정부 수립]
루이 필리프 1세가 영국으로 망명하자 프랑스에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이 임시정부 내에서는 공화주의파와 사회주의파(루이 블랑 등)가 대립했으며,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무산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국립작업장'이 설치되었다.
[제헌의회 선거]
1848년 4월 말,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이 선거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하며 공화주의파와 보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국립작업장 폐쇄의 빌미를 제공했다.
[국립작업장 폐쇄]
임시정부에서 설립했던 국립작업장이 정부에 의해 폐쇄되자, 많은 노동자들이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그러나 정부는 카베냐크 장군을 보내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눌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유층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득권 논쟁이 발생했으며, 은행가, 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을 결성하고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했다.
[루이 나폴레옹 당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고, 남성 보통 선거의 도입으로 투표권을 얻은 농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이로써 프랑스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제정 시대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농민들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재현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재임 중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2제정 시대를 열었으며,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개혁연회 금지령]
파리에서 개최 예정이던 전국 개혁연회에 대해 정부가 금지령을 내렸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들의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조 내각 사임]
개혁연회 금지령으로 촉발된 민중의 폭동이 격화되자, 다음 날 기조 내각이 사임했다.그러나 민중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파리 시내에서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며 혁명의 기운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루이 필리프 1세 퇴위]
파리 시가전이 절정에 달하자, 시민들의 거센 압력과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이 결국 퇴위했다.이로써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작된 7월 왕정은 18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