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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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소설가, 작가, 변호사, 실존주의자 문학가(시인/소설가)

-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소설가이자 유대계 지식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보험회사에서 근무. - 관료주의 소외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심도 깊게 다룬 작품들을 남김. -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 친구 막스 브로트에 의해 유작들이 출판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음. - 카프카적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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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83

[프란츠 카프카 탄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에서 유대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카프카적'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불후의 작품들을 남길 운명적인 시작이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885

[첫 동생, 짧은 삶]

카프카가 두 살 되던 해, 동생 게오르크가 태어났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겪게 되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1887

[둘째 동생도 떠나다]

네 살 때 또 다른 동생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역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연이은 동생들의 죽음은 그의 유년기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1889

[첫 여동생 엘리 탄생]

여섯 살이 되던 해, 첫 여동생 가브리엘레, 일명 엘리가 태어났다.

이후 그는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자라게 된다.

[초등학교 입학]

프라하의 독일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유대인으로서의 종교 교육은 13세 Bar Mitzvah와 회당 예배가 전부였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정육 시장 근처의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1890

[둘째 여동생 발리 탄생]

둘째 여동생 발레리가 태어났다.

이후 세 명의 여동생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1892

[셋째 여동생 오틀리 탄생]

가장 아끼던 셋째 여동생 오틀리가 태어났다.

그녀는 훗날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1

[엄격한 김나지움 졸업]

구시가지 광장의 킨스키 궁전에 있는 엄격한 주립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했다.

[카를 대학교 입학]

아버지의 요구로 프라하 카를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있었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으며,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904

[문학에 대한 신념 표명]

문학 친구 오스카 폴라크에게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라며 독서와 문학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밝혔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강한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하며,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충격을 주는 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06

[법학 박사 학위 취득]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 창작에 있었다.

1907

[제네랄리 보험사 취업]

이탈리아계 보험회사 제네랄리에 취업했다.

하지만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긴 근무 시간 때문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어 이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1908

[노동자 보험사 취업]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 취업하여 죽기 2년 전까지 법률 고문으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며 자신의 문학적 깊이를 더했다.

그는 종종 이 일을 '밥벌이(Brotberuf)'라고 불렀지만,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을 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보험사 퇴사 후 이직]

글쓰기에 방해가 되던 제네랄리 보험회사를 그만두었다.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회사로 옮기게 된다.

1911

[사업 참여와 문화적 관심]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로부터 석면공장 동업을 제안받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 시기 이디시 극장 공연에 관심을 가지며 유다이즘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염려하면서도 그의 다른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다.

1912

[안전 헬멧 발명 (세계최초)]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 재직 중 세계최초로 안전 헬멧을 발명했다.

이 공로로 메달을 받았으며, 보헤미아 강철 공장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이 발명으로 1912년 메달을 받았으며,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추는 데 기여했다. 이는 그의 직업에 대한 무관심과는 달리,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실천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표작 집필 시작]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될 '실종자' (후에 '아메리카'로 개제)와 '변신' 집필을 시작했다.

'변신'은 그의 생전 유일하게 완성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펠리체 바우어와의 만남]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베를린의 사무원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이후 카프카의 창작열을 불태우고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게 되는 중요한 인연이 된다.

카프카는 일기장에 그녀를 "식모 같은 인상"으로 묘사했지만, 이 만남 이후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단편 '판결' 집필]

펠리체 바우어를 만난 지 약 한 달 만에 하루 밤새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그녀에게 헌정했다.

이는 그의 폭발적인 창작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당시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 여직원이었다.

1914

['유형지', '심판' 집필]

또 다른 대표작인 '유형지에서'와 '심판'의 집필에 들어갔다.

이 시기 그의 문학적 깊이가 더해진다.

1916

['시골 의사' 탈고]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성숙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이다.

1917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

두 번의 약혼에도 불구하고 펠리체 바우어와의 관계는 결국 파혼으로 끝이 났다.

이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종종 만났지만,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결핵 발병]

폐결핵 진단을 받으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요양 생활이 이어지며 그의 삶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는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1920

[밀레나 예젠스카와의 만남]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녀에게 체코어로 몇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22

[보험회사 퇴직]

건강 악화로 인해 14년간 근무했던 보험회사에서 퇴직했다.

이후 글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미완의 걸작 '성' 집필]

그의 또 다른 미완성 걸작인 '성' 집필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료주의 사회 속 개인의 무력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23

[베를린 이주와 도라와의 만남]

가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유치원 교사인 도라 디아만트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는 데 영향을 주었다.

도라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카프카가 생애 마지막 10년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4

[40세의 나이로 사망]

오스트리아 빈 근교 키어링 요양소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핵 악화로 인한 굶주림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죽기 전 모든 서류를 소각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친구 막스 브로트가 그의 유작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은 마치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처럼 비극적이었다.

[프라하 유대인 묘지 매장]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져 지즈코프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위대한 작가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1925

[친구의 출판]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 받지 못했다.

죽기 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했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 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다른 유고와 단편집, 편지, 일기 등을 지속적으로 편집하고 출판하여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25년 : 《심판(The Trial)》 출판

1926년 : 《성(The Castle)》 출판

1927년 : 《실종자(Der Verschollene)》라는 원제를 《아메리카(Amerika)》로 제목을 바꿔서 출판

1933

[파기되지 않은 원고 압수]

연인 도라 디아만트은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 당했다.

1968

[친구 막스 브로트 사망]

막스 브로트는 사망하면서 카프카의 유고를 자신의 비서였던 에스테르 호페(Esther Hoffe)에게 상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십 년간 '카프카 유산 소송'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73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의 소송]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이 에스테르 호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습니다.

당시 법원은 브로트의 최종 유언에 따라 호페가 유산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고 판결했습니다.  

1988

[경매에 나온 원본]

에스테르 호페는 카프카의 주요 원고 중 하나인 《소송》의 원본을 경매에 내놓아 엄청난 수익을 얻었고, 이는 유산의 공공성 논란을 키웠습니다.  

2007

[9년 소송의 시작]

에스테르 호페 사망.

그녀의 딸 에바 호페와 다른 상속인이 유산을 상속하려 하자,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이 "브로트의 진정한 의도는 유고를 공공에 기증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다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본격적인 9년간의 소송 시작)  

2007년~2012년 :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이 '브로트의 뜻은 신탁이었다'고 주장하며 원고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가정법원은 호페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습니다.


2012년~2015년 :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이 항소. 이 단계에서 카프카의 유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독일 문학 아카이브(마르바흐 아카이브)도 소송에 간접적으로 참전하여 국제적인 '문화 전쟁' 양상을 띠었습니다.


2015년 :  지방법원은 카프카의 유고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유대 민족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논리를 채택하며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2016

2016.8 사후 92년

[도서관의 승소]

이스라엘 대법원은 막스 브로트의 서류와 진술 등을 검토했을 때, 그가 카프카의 원고가 사적으로 비싸게 팔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졌다고 판단했습니다.  

9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에바 호페가 보관하고 있던 카프카의 방대한 미발표 유고(원고, 일기, 서신 등)는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으로 최종 이관되어 일반에게 공개 및 연구용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은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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