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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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화가, 판화가, 낭만주의 예술가 서양화가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는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궁정화가로서 왕실과 귀족의 모습을 기록했으나 1792년 청각 상실 이후 그의 예술 세계는 급변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과 반도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며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은 판화집 《카프리초스》와 전쟁 기록화를 남겼다. 말년에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검은 그림》 연작으로 인간 본연의 광기와 무의식을 탐구하며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746

[가난 속 재능의 씨앗]

스페인 아라곤 지방 푸엔데토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고야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훗날 세계적인 화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1749

[사라고사에서의 성장]

고야의 가족이 사라고사로 이사하면서, 그는 이곳에서 마르틴 사파테르와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학교에 다니며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술적 성장을 위한 기반이 다져지는 시기입니다.

1763

[왕립 학회 첫 좌절]

젊은 고야는 왕립 미술 학회에 입회 신청서를 제출하지만 아쉽게도 거절당합니다.

이는 그의 예술 경력 초기에 겪었던 첫 번째 좌절이었습니다.

1765

[거장과의 만남과 불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걸작에 깊은 감동을 받은 고야는 당대 유명 궁정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스승과의 불화로 인해 졸업을 인정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1766

[재차 학회 입회 거절]

왕립 미술 학회에 다시 한번 입회 신청서를 제출하지만, 또다시 거절당하며 고야는 인정을 받기 위한 험난한 과정을 겪게 됩니다.

1771

[이탈리아에서 빛난 재능]

이탈리아로 떠난 고야는 파르마 회화전에서 2등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습니다.

그해 말,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와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 화가로 활동하며 뛰어난 색감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1773

[왕가 테피스트리 제작 참여]

결혼 후 베이유의 도움으로 고야는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합니다.

5년 동안 42개의 패턴을 제작하며 왕가의 눈에 띄게 되고, 뛰어난 실력으로 왕실 미술 학회 회원이 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 작업은 1773년부터 약 5년간 진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

고야는 동료 화가 프란시스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합니다.

이는 그의 삶에 안정과 중요한 인맥 형성의 기회를 가져다주며, 이후 왕실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됩니다.

1783

[백작 초상화, 성공의 발판]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측근인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더욱 높입니다.

이 작업을 계기로 그는 수많은 왕가 및 귀족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되며, 궁정화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됩니다.

1788

[격동의 왕위 교체]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서거하고, 이듬해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합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며 유럽 전역이 격동하는 시대였습니다.

1789

[수석 궁정화가 임명]

카를로스 4세 즉위와 함께 고야는 정식 궁정화가로 임명되며 스페인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가 시작됩니다.

1792

[청각 상실, 예술의 전환]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개인적인 고통은 그의 예술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5년 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깊은 상실감을 맛본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 관련 철학책들을 탐독하며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1798

[성당 벽화 작업]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성 안토니오 성당의 벽화를 그리며, 고야는 청각 상실 이후 더욱 깊어진 통찰력으로 종교적 주제를 표현해냅니다.

1799

[《카프리초스》 발표]

고야는 애쿼틴트 기법의 판화집 《카프리초스》(변덕)를 발표하며 스페인 사회의 미신, 부패한 가톨릭 교회, 그리고 문명 사회의 결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와 함께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어두운 분위기로 대중에게 충격을 안겨줍니다.

이 해 고야는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연봉 50,000 레알과 사륜 마차 비용 500 두캇을 받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도 합니다.

1800

[왕실과 '마하'를 그리다]

고야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초상화를 제작하여 당시 왕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같은 해, 그는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 파격적인 작품 《옷 벗은 마하》를 그려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1803

[논란의 '옷 입은 마하']

《옷 벗은 마하》가 신성 모독 논란에 휩싸여 압력을 받자, 고야는 옷을 입은 모습의 연작 《옷 입은 마하》를 추가로 제작하며 시대의 압력에 저항하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두 작품은 오늘날 프라도 박물관의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1808

[반도 전쟁, 비극의 기록]

프랑스군과 스페인 간의 반도 전쟁이 발발하고, 고야는 이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1808년 5월 3일의 처형》과 같은 충격적인 기록화를 남겨 전쟁의 비극을 고발합니다.

1810

[《전쟁의 재난》 제작]

전쟁 중 벌어진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담은 판화집 《전쟁의 재난》을 제작합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만행뿐 아니라 스페인인들이 자국민에게 벌인 잔혹한 행위까지 가감 없이 기록하여 전쟁의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이 판화집은 1810년부터 1820년까지 제작되었습니다.

1812

[아내의 죽음과 고독]

평생을 함께했던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며 고야는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이 상실감은 그의 말년 작품에 더욱 어둡고 비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13

[종교재판의 압수]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하 연작》을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압수합니다.

고야는 이단 심판을 간신히 면했지만, 예술적 자유가 억압받는 시대 상황을 다시 한번 체감합니다.

1814

[왕궁 떠난 고야의 선택]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합니다.

그러나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정부와 그녀의 사생아와 함께 살며 대중과 거리를 두는 삶을 선택합니다.

이는 그가 왕가의 신임을 잃었음을 시사합니다.

1819

[귀머거리의 집, 검은 그림]

고야는 만사나레스 근처에 '퀸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라는 은둔처를 마련하고, 외부와 단절된 채 충격적인 《검은 그림》 연작을 제작합니다.

이 그림들은 인간 이성 뒤에 숨겨진 광기와 무의식을 탐구하며 말년의 고야의 정신세계를 보여줍니다.

특히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보는 이들을 경악시킵니다.

이 연작은 1819년부터 1823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24

[프랑스 보르도 망명]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하며 말년의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잠시 파리에 머물기도 하며 새로운 환경에서 예술적 영감을 찾습니다.

1826

[병든 몸, 보르도 회귀]

잠시 스페인으로 돌아오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다시 보르도로 향합니다.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1828

[보르도에서 영면하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8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화가의 마지막을 알리는 동시에, 후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의 빈자리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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