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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축구 선수, 스포츠인, 국민 영웅 축구 선수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축구의 왕으로 불린다. FIFA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3회 우승을 차지한 선수이다. 선수 생활 동안 비공식 포함 1 363경기 1 279골로 기네스 세계 기록 최다 골을 보유하고 있다. 축구를 아름다운 게임으로 불리게 만들며 스포츠를 넘어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라질 정부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고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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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40

[축구의 왕 탄생]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트레스코라송스에서 태어났다.

전구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 '에드송'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출생 증명서에는 '에지송'으로 오기되었다.

어린 시절 구두닦이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1950

[월드컵 우승 맹세]

브라질에서 열린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패배하는 '마라카낭의 비극'을 라디오 중계로 들으며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이 충격적인 경험은 어린 펠레에게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키겠다'는 평생의 맹세로 이어졌다.

1956

[산투스 데뷔 및 첫 골]

브라질 명문 클럽 산투스 FC에 입단하여 SC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르고 첫 득점을 기록했다.

60kg도 안 되는 작은 체구였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7

[최연소 국가대표 데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아르헨티나와의 A매치에 출전하며 브라질 축구 대표팀 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고, 동시에 데뷔골까지 기록하며 자신의 등장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58

[FIFA 월드컵 첫 우승]

17세의 나이로 FIFA 월드컵에 출전하여 브라질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웨일스와의 8강전에서 월드컵 사상 최연소 득점을 기록했고,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 해트트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축구 신동'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그가 전설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1961

[브라질의 국보 지정]

유럽 명문 클럽들의 끊임없는 이적 제안에 브라질 정부가 그를 '국외로 유출할 수 없는 국보'로 공식 선언하며 이적을 저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그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국가적 차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설의 '고우 지 플라카']

플루미넨시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 6명을 제치고 결승골을 넣었다.

이 골은 '마라카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고우 지 플라카(기념판 골)'라는 별칭을 얻었고, 펠레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골 중 하나로 기억된다.

1962

[클럽 첫 세계 제패]

산투스 FC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클럽 챔피언을 결정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구단 역사상 최초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서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유럽 챔피언 SL 벤피카를 꺾고 우승하며 산투스를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었다.

[FIFA 월드컵 2회 우승]

FIFA 월드컵 조별리그 멕시코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허벅지 근육 부상을 입었다.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브라질은 그의 공백을 메우고 대회 2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969

[내전도 멈춘 펠레 효과]

산투스의 아프리카 원정 중 콩고 내전(콩고 민주 공화국-콩고 공화국)과 나이지리아 내전(비아프라 전쟁) 양측이 펠레의 경기 관전을 위해 일시 휴전을 합의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선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축구 역사상 1000골 달성]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개인 통산 1,000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이 기록은 '기네스 세계 기록'으로 인정되었으며, 당시 브라질 정부는 리우브랑쿠 훈장을 수여하고 다음 날을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국가적인 축제였다.

1970

[월드컵 3회 우승 달성]

마리우 자갈루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의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FIFA 월드컵에서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고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FIFA 월드컵 역사상 한 선수가 3번 우승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잉글랜드전에서 고든 뱅크스의 전설적인 선방을 이끌어냈고,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에서는 환상적인 드리블과 트릭으로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1971

[국가대표 은퇴 선언]

유고슬라비아와의 친선 경기를 끝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총 91경기에 출전하여 77골을 기록, 당시 브라질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1974

[산투스 마지막 경기]

18년간 몸담았던 산투스 FC에서의 마지막 경기에 참가했다.

경기 중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십자가와 유사한 포즈를 취하며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는 클럽 생활을 마감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1975

[뉴욕 코스모스 이적]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사커 리그(NASL)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했다.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의 후원 아래 이뤄진 이 이적은 미국 축구 보급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는 '축구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미국 진출은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라위프 등 당대 최고 선수들이 미국 리그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7

[전 세계를 울린 은퇴]

뉴욕 코스모스와 친정팀 산투스 FC와의 친선 경기를 통해 공식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7만 5천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전 세계에 생중계된 이 경기에서 그는 전반에는 코스모스 선수로, 후반에는 산투스 선수로 뛰며 1골을 기록하는 드라마틱한 은퇴 무대를 장식했다.

1995

[브라질 체육부 장관]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 브라질 대통령 취임 후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장관이 되었다.

재임 기간 중 '올림픽 빌리지' 공공 사업과 선수들의 자유로운 이적을 보장하는 '펠레법' 제정에 힘썼다.

1999

[20세기 최고 영예 석권]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에 올랐고,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 선수'가 되었다.

또한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며 축구계를 넘어선 인류사적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2021

[암 진단 및 투병 시작]

정기 건강 진단 중 오른쪽 결장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어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이후 약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으며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2022

[축구 황제 영면]

상파울루 병원에서 대장암 투병 중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리오넬 메시, 킬리안 음바페 등 수많은 축구 스타들과 전 세계 팬들이 깊은 애도를 표하며 축구계는 큰 슬픔에 잠겼다.

그가 입원 중이던 카타르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 응원단은 펠레의 회복을 기도하는 현수막을 내걸었으며, 카타르의 어스파이어 타워에는 펠레의 모습이 점등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2023년 1월 2일부터 3일까지 산투스 FC의 홈구장인 빌라 베우미루에서 진행되었고, 아버지 돈지뉴가 안치된 공동묘지 9층에 영원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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