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파울 루벤스
연표
1577
[위대한 화가의 탄생]
유럽 전역을 매료시킬 미술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독일 지겐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불륜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파란만장한 배경을 지녔다.
루벤스의 아버지는 법률가이자 칼뱅주의자였으며, 작센의 안나와의 불륜이 들통나 감옥에 갇혔다. 어머니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쾰른으로 도망쳐 온 상태였다.
1578
[쾰른으로의 이주]
루벤스의 가족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독일 쾰른으로 이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어린 루벤스에게는 새로운 환경이 펼쳐진 셈이다.
1589
[고향 귀환과 학업]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루벤스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고향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며 종교적 토대를 다졌다.
종교는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이후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591
[화가로서 첫걸음]
14세가 된 루벤스는 Tobias Verhaeght 밑에서 미술 실습생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도시의 유명 매너리즘 화가들에게 집중적인 지도를 받으며 천재적 재능을 꽃피웠다.
한스 홀바인이나 라파엘로 등 이전 시대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1598
[화가조합 가입]
수련 과정을 마친 루벤스는 '성 루크 화가조합'에 가입하여 조합장 및 교사직을 맡게 되었다.
이는 그가 정식 화가로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00
[이탈리아 예술 기행]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떠난 루벤스는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 베로니스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 심취했다.
이후 만토바 공작 빈첸초 1세의 후원을 받으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
베로니스와 틴토레토의 색감과 구도는 루벤스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숙기 스타일은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1601
[로마에서 영감을 얻다]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한 루벤스는 고전 예술 작품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영감을 얻었다.
특히 혁신적인 카라바조의 사실주의 화풍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헬레니즘 시대 조각 <라오콘과 그의 아들>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무덤>을 모작하고 <마리아의 죽음> 구입을 추천하기도 했다.
1603
[스페인 외교 무대 데뷔]
만토바 공작의 외교 임무를 띠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펠리페 2세가 모았던 티티안과 라파엘로의 걸작들을 감상하며, 말을 탄 러마 백작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예술과 외교의 재능을 처음으로 동시에 발휘했다.
이 여행은 루벤스가 예술적 재능과 외교적 수완을 결합한 첫 번째 경험이었으며, 훗날 그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604
[이탈리아 전역 활동]
이탈리아로 돌아온 루벤스는 만투아, 로마, 제노바 등지에서 4년간 활동하며 <마르케사 브리히다 스피놀라 도리아> 등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초상화는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훗날 안토니 반 다이크, 조슈아 레이놀드, 토마스 게인즈보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도시의 성들을 삽화 형식으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1606
[로마에서 명성 확립]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으로 떠오른 루벤스는 새로 지어진 발리셀라 산타 마리아 교회를 위해 제단화를 완성하며 명성을 공고히 했다.
교회 제단화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모 마리아와 아들을 숭배하는 모습을 주제로 했으며, 첫 번째 작품은 한 폭이었으나 두 번째 작품은 세 폭으로 교체되었다.
1608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위독 소식에 급히 안트베르펜으로 달려갔으나, 안타깝게도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비극은 그의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1609
[왕실 화가로 지명]
오스트리아 알베르트 7세 대공 부부에게 왕실 화가로 지명되며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브뤼셀이 아닌 안트베르펜에서 화실을 운영할 특별 허가까지 받았다.
같은 해 4월, '12년의 휴전'이 시작되며 안트베르펜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루벤스는 이때 안트베르펜에 계속 머무르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
안트베르펜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장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했다.
이는 그가 고향에 정착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대공비 이사벨라가 죽기 전 1633년까지 그녀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으며, 화가 직무 외에 대사나 외교 임무도 수행했다.
1610
[루벤스 하우스와 대화실]
이탈리아 건축 양식에 영감을 받아 직접 설계한 '루벤스 하우스'로 이사하며, 수많은 제자 및 실습생들과 함께 대규모 화실을 운영했다.
여기에는 훗날 유명해질 안토니 반 다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벤스 하우스는 안트베르펜 중심지에 지어졌으며, 루벤스의 작업실, 개인 작품실, 도서관 등을 갖춘 다목적 공간이었다. 그는 동물화가 프란스 스나이더, 꽃을 그리는 장 브루겔 등 여러 전문가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플랑드르 대표작 탄생]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한 대형 제단화 <십자가를 세움>을 완성하며 플랑드르 대표 화가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 종교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베니스의 틴토레토의 '십자가 처형'과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인체, 그리고 루벤스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모두 녹아든 걸작이다.
1611
[종교화 걸작 연속 탄생]
성모 마리아 성당의 또 다른 대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완성하며 그의 종교화 역량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 작품 또한 바로크 미술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최고가 작품 제작]
소더비 경매에서 서양 고전 예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게 될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을 그림으로써 그의 독보적인 예술적 가치를 증명했다.
이 작품은 2002년 7월 10일 소더비 경매에서 7천 6백 2십만 달러에 팔리며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1621
[프랑스 왕실 주문]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로부터 파리 룩셈부르크 성에 전시될 대규모 그림 시리즈 두 점을 주문받으며, 그의 명성이 유럽 왕실까지 미쳤음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시리즈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시대>는 1625년에 전시되었으나, 두 번째 시리즈는 완성되지 못했다.
[본격적인 외교 활동 시작]
'12년의 휴전' 만기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여러 차례 외교 임무를 강제로 맡게 되며 화가이자 외교관으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24
[펠리페 4세에게 기사 작위]
폴란드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며 예술가이자 신사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는 당대 예술가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영광이었다.
이 해 프랑스 대사는 루벤스가 황녀의 명에 따라 폴란드 왕자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브뤼셀에 와 있었다고 기록했다.
1626
[첫 아내와의 사별]
사랑하는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녀는 1609년 결혼 후 17년간 루벤스의 삶과 예술에 중요한 존재였다.
1627
[평화 중재 외교관]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등 외교관으로서 가장 적극적이고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예술가라는 편견에 맞서며 신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북부 네덜란드 지방에도 외교관이자 화가로서 여러 번 방문했으며, 왕실에서 조신들이 미술이나 작품 거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과 종종 마주해야 했다.
1628
[벨라스케스와의 우정]
8개월간 스페인 마드리드에 체류하며 펠리페 4세의 의뢰를 수행하고 티치안의 작품을 깊이 연구했다.
이곳에서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친구가 되는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마드리드에서 <인간의 타락> 모작을 포함하여 티치안의 작품에 대해 새로이 공부했다. 루벤스와 벨라스케스는 다음 해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것을 약속했으나,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가야 했다.
1629
[케임브리지 석사 학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수여받으며, 그의 예술적 업적뿐만 아니라 학문적 깊이까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1630
[평화 염원 걸작 탄생]
런던에 체류하며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걸작 <평화와 전쟁의 알레고리>를 완성하고 찰스 1세에게 선물했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 외교관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찰스 1세에게 기사 작위]
영국의 찰스 1세로부터 두 번째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 전례 없는 영광을 누렸다.
이는 당대 어떤 예술가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루벤스는 1624년 스페인 펠리페 4세에게 첫 기사 작위를 받은 데 이어, 1630년에는 잉글랜드 찰스 1세에게 또 한 번 기사 작위를 받으며 당대 최고의 인물이 되었다.
[헬레나 푸르망과의 재혼]
첫 아내와 사별한 지 4년 후, 53세의 나이로 16세 소녀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했다.
젊은 아내는 그의 후기 작품에 관능미 넘치는 영감을 불어넣으며 새로운 황금기를 열었다.
헬레나는 <비너스의 향연>, <삼미신>, <파리스의 심판> 등 루벤스의 후기 대표작에 자주 등장하는 뮤즈가 되었다.
1635
[스텐 성 구입, 풍경화에 몰두]
안트베르펜 외곽에 있는 '스텐 성'(the Château de Steen) 사유지를 구입하여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풍경화에 깊이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린 작품으로는 <사냥꾼이 있는 스텐 성>이나 <밭에서 돌아오는 농부들> 등이 있으며, 그의 후기 작품들은 화가 자신의 내면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1640
[위대한 거장의 영면]
통풍으로 투병하던 루벤스는 6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안트베르펜 성 야곱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여덟 명의 자녀를 남겼다.
그가 죽었을 때 가장 어린 자녀는 겨우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2002
[경이로운 최고가 기록]
루벤스의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이 소더비 경매에서 서양 고전 예술품 사상 최고가인 7천 6백 2십만 달러에 낙찰되며, 300년이 넘는 시간 뒤에도 그의 예술적 가치가 경이로운 기록으로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케네스 톰슨에게 팔렸으며, 현재까지도 서양 고전 예술품 경매 최고가 중 하나로 남아있다.
2006
[숨겨진 걸작의 재발견]
오랫동안 루벤스 제자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칼리도니아 멧돼지 사냥>이 전문가의 감정으로 루벤스의 진품임이 밝혀져 Getty Collection에 높은 가격으로 팔리며 숨겨진 걸작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벤스 특유의 역동적인 사냥 장면을 담고 있으며, 재발견 후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