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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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고대 그리스 정치가, 장군, 웅변가 + 카테고리

고대 아테나이의 황금기를 이끈 위대한 정치가. 민주주의의 절정을 꽃피우고 아테나이를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아크로폴리스 재건 등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아테나이의 영광을 드높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아테나이를 이끌었으며 그의 리더십은 당대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테네의 제1시민으로 불리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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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탄생]

고대 아테나이의 정치가 크산팁포스와 명문가 출신 아가리스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몽으로 사자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그의 위대함을 암시하는 동시에 큰 머리에 대한 당대의 우스갯거리로 회자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학업에 매진하며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부유함 과시, 첫 정치적 행보]

행정관으로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당대 유명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연극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며 자신의 막대한 재력을 과시했다.

이 희곡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묘사하여, 당시 정적인 테미스토클레스를 옹호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귀족파 영수 키몬 기소]

귀족파의 강력한 지도자 키몬을 마케도니아에서 아테나이의 이익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기소하며 정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비록 키몬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이 사건은 페리클레스에게 주요 정적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나이 민주주의 절정기 이끌다]

민중파 지도자 에피알테스와 함께 아테나이 귀족들의 전통적인 권력 기관인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써 아테나이의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이 민회에서 이루어지는 '급진적 민주정' 시대가 열렸다.

페리클레스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대중영합적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정적 키몬 도편 추방]

민중파의 영향력이 우세해진 가운데, 강력한 정적인 귀족파의 키몬을 도편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키몬이 스파르타의 농노 반란을 지원하려 한 것이 아테나이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로써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

[대중을 위한 파격적 정책 추진]

빈민층의 극장 공연 무료 관람을 위한 국가 입장료 지원, 집정관직 선출을 위한 재산 기준 완화, 최고 법정 배심원에게 후한 수당 지급 등 대중을 위한 파격적인 사회 정책들을 도입하며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하층 계급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아테나이 해군력의 기반이 되는 평민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는 의도였다.

[델로스 동맹 금고 아테나이로 이전]

이집트에서의 패전과 여러 동맹 도시들의 반란으로 에게해의 아테나이 패권이 도전받자, 델로스 섬에 있던 동맹 금고를 아테나이로 옮겼다.

이는 동맹 금고의 안전을 명분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변질을 가속화하고 동맹국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 군사 활동]

스파르타의 반발로 발발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군사 활동에 나섰다.

시키온과 아카르나니아를 공격했으나, 코린토스 만의 오이니아데아 점령에는 실패하고 아테나이로 회군했다.

이 시기 아테나이는 메가라,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으며 스파르타와 대립했다.

[부모 양계 아테나이 출신만 시민권 인정]

부모 양쪽 모두 아테나이 출신인 사람에게만 아테나이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이 법은 아테나이 시민의 순혈성을 강조하고 시민권 남용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비판자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의 퇴보를 야기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스파르타와 5년 휴전 협정 주도]

도편 추방되었던 키몬이 귀환하자, 그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와 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는 페리클레스의 외교 전략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며, 일부 역사가들은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와 페르시아와의 동시 전쟁에서 키몬의 군사적 공로를 인정한 결과라고 평가한다.

[퀴프로스 원정 및 살라미스 해전 승리]

퀴프로스에 군대를 파병하여 키몬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키몬은 전투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

페리클레스는 이집트와 퀴프로스 두 곳 모두에 원정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파르테논 신전 등 대규모 건설 추진]

아테나이 신전을 대대적으로 재건하기 위해 9,000 탈란톤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칙령을 제안했다.

이 자금은 주로 델로스 동맹의 금고에서 충당되었으며, '페리클레스의 아크로폴리스'로 불리는 프로퓔라이아, 파르테논 신전, 아테나 황금상 등 그의 야심찬 건축 계획에 쓰였다.

이 건축 계획은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아테나이의 영광을 드러내며, 시민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등 다목적 목표를 가졌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는 아테나이의 예술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스 도시 회의 제안]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신전 재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 국가들이 모이는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는 회의법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는 스파르타의 반대로 실패했으나, 페리클레스는 이를 통해 모든 그리스 도시들의 연합을 원했거나 아테나이의 수위권을 주장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겔리볼루반도 식민지 건설]

트라케의 겔리볼루반도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아테나이 식민지를 세우는 가장 찬탄받는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아테나이의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코로네이아 전투 패배]

테바이의 과두 지배자들이 민주정파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자, 아테나이는 이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페리클레스는 전쟁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 보이오티아 지역의 상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로 인해 포키스와 로크리스도 적대적인 과두 지배자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우보이아 및 메가라 반란 진압]

에우보이아와 메가라에서 위험한 반란이 발생하자, 페리클레스는 군대를 이끌고 에우보이아로 진군했으나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케를 침입하면서 회군해야 했다.

뇌물과 협상을 통해 스파르타의 위협을 일시적으로 진정시켰고, 이후 에우보이아 반란을 진압하며 칼키스 지주들에게 엄벌을 내리고 이스티아이아 주민을 추방하고 아테나이 정착민을 보냈다.

[30년 평화 협정으로 위기 극복]

일련의 위기 상황을 겪은 후, 기원전 446년 겨울부터 445년에 걸쳐 스파르타와 30년간의 평화 협정을 공식적으로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아테나이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소유권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양측은 서로의 동맹국과 싸우지 않기로 합의했다.

[보수파 지도자 투퀴디데스 제압]

보수파의 새로운 지도자인 정치가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아크로폴리스 건설 계획에 대한 낭비를 비난하며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재산으로 모든 건설 비용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하며 맞섰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투퀴디데스를 압도했다.

결국 2년 뒤 투퀴디데스는 도편 추방되었다.

[투리이 등 클레루키아 설치]

안드로스, 낙소스, 투리이, 암피폴리스 등 전략적 요지에 아테나이의 특별 식민지인 '클레루키아'를 설치하여 아테나이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제국적 지배를 공고히 했다.

[투퀴디데스(정치가) 도편 추방]

아테나이 시민들은 페리클레스의 강력한 리더십과 지지에 힘입어 보수파 지도자인 투퀴디데스를 10년간 도편 추방했다.

이로써 페리클레스는 다시 아테나이 정계의 독보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모스 전쟁 발발]

이오니아의 고대 도시 프리에네의 지배권을 놓고 사모스와 밀레토스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밀레토스의 요청에 따라 아테나이는 양측에 전쟁 중단을 명령했으나 사모스가 이를 거부하자, 페리클레스는 사모스에 군대를 파병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사모스 반란 진압]

아테나이 군대는 페리클레스와 다른 아홉 장군들의 지휘 아래 사모스 군대를 무찌르고 섬을 아테나이가 원하는 대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모스의 지속적인 반란으로 8개월간의 지난한 공성전 끝에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 과정에서 아테나이 선원들의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

[아테나이 방어 강화]

아테나이의 요새화에 관심을 기울여 이른바 '중간 성벽'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도시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내부 사업이었다.

[폰토스 지역 그리스 도시들과 우호 관계 확립]

폰토스에 아테나이 함대를 이끌고 가서 이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이 활동은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흑해 지역까지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암피폴리스 클레루키아 설치]

아테나이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제국적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암피폴리스에 아테나이 특별 식민지인 '클레루키아'를 설치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코르키라 함대 지원]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한 페리클레스는 코린토스와 싸우던 코르퀴라 함대를 주저 없이 지원했다.

이는 스파르타와의 긴장 관계를 더욱 고조시키는 조치였다.

[코린토스와 쉬보타 해전]

아테나이와 코르퀴라 연합 함대가 코린토스 함대와 쉬보타 해전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는 코린토스가 아테나이에 대한 오랜 증오심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폰티다이아 전투]

쉬보타 해전 이듬해, 아테나이가 코린토스의 식민시 시민들과 폰티다이아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 또한 코린토스의 반감을 심화시키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메가라 법령 제정]

메가라 상인들을 아테나이 시장과 아테나이 영향권 내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메가라 법령'을 제안했다.

이 무역 봉쇄 조치는 메가라의 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했으며, 스파르타와 아테나이 간의 평화 관계에 극심한 긴장 국면을 조성하여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측근들에 대한 정치 공세]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직전, 아테나이 민주정 체제 내에서 페리클레스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기에 정치 공세에 시달렸다.

그의 건설 계획을 담당한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황금 횡령 및 불경건으로, 그의 친구 아스파시아는 아테나이 여성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고발당하는 등 일련의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나 상의 방패에 자기 자신과 페리클레스의 모습을 새겨넣은 혐의도 받았다.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의 감정적인 변호 덕분에 무죄를 받았으나, 페이디아스는 감옥에서 죽었고, 아낙사고라스는 신앙 문제로 민회의 공격을 받았다. 이 모든 고발은 페리클레스에게 큰 부담이었다.

[스파르타 사절단 거부 및 청야 전술]

스파르타의 마지막 사절단이 메가라 법령 철회와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추방 등을 요구하며 아테나이에 진입하려 했으나, 페리클레스는 이미 적대적 군사 행동을 감행한 스파르타 대표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를 거부했다.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케를 침공하기 전에 미리 모든 주민을 아테나이 성곽 안으로 불러들여 청야 전술을 펼쳤다.

이 청야 전술은 농토와 조상 대대로 이어진 성소를 버려야 하는 농촌 주민들의 불만을 샀으나,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농장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재산을 도시에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설득했다. 그는 적들이 농장을 유린하는 광경에도 불구하고 당초 전략을 고수하며 민회 소집을 기피했다.

[메가라 침공 및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 연설]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케에서 물러나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군대를 이끌고 메가라를 침공했다.

몇 달 뒤, 그는 고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 '전몰자 추도 연설'을 통해 아테나이 민주주의와 전사들의 희생을 기렸다.

[스파르타의 아티케 재약탈에도 전략 고수]

스파르타 군대가 두 번째로 아티케를 약탈했지만, 페리클레스는 적과의 교전을 피하고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약탈할 함대를 파견하는 당초 전략을 흔들림 없이 고수했다.

출항 직전 일식이 발생하여 승무원들이 동요했으나, 페리클레스는 천문학 지식으로 이들을 안심시켰다.

[아테나이 역병 창궐 및 민중의 비난]

그 해 여름 아테나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도시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이로 인해 민중이 동요하고 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자, 페리클레스는 투키디데스에 의해 전해진 인상적인 마지막 연설로 자신을 변호하며 대중의 분노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연설은 페리클레스의 덕성과 동포들의 배은망덕에 대한 쓰라린 마음을 드러냈지만, 결국 내부 정적들의 음해로 장군직을 박탈당하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장군직 복귀와 아들들의 비극적 죽음]

1년 만에 아테나이 시민들의 용서를 받아 다시 총사령관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어 모든 군사 작전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에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적법한 두 아들, 파랄로스와 크산팁포스가 역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상심한 그는 아스파시아의 위로도 소용없을 정도로 슬픔에 잠겼다.

[위대한 리더, 페리클레스 역병으로 사망]

두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자신 또한 아테나이를 휩쓴 역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이로써 고대 아테나이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정치가의 생애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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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원정 실패]

아테나이가 이집트에서 일어난 페르시아 반란을 지원했으나, 나일강 삼각주의 페르시아 요새 포위전이 장기화되면서 결국 패배하고 원정군이 궤멸하는 재앙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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