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연표
BC 6C
[제국 수도의 기틀 마련]
다리우스 1세가 제국의 새로운 상징이 될 도시의 위치를 선정하고 거대한 기단을 쌓기 시작합니다. 험준한 산맥을 등진 이 거점은 제국의 위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의례적인 중심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수많은 장인들이 동원되어 지형 평탄화 작업과 배수 시설 구축에 착수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파사르가다에를 대신할 새로운 수도를 건립하기 위해 라마트 산 기슭의 암석 지대를 선택했습니다.
약 12만 5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 테라스는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노동자들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급여를 받는 숙련된 기술자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아파다나 기초 정초식]
제국에서 가장 웅장한 알현실인 아파다나의 건설을 선포하며 황금과 은으로 된 정초판을 매설합니다. 이 판에는 다리우스 1세가 다스리는 광대한 영토의 경계가 기록되어 제국의 정통성을 강조했습니다. 건축가들은 거대한 기둥을 세우기 위한 정밀한 설계에 돌입했습니다.
아파다나의 네 모퉁이에는 제국의 영역을 기록한 금판과 은판이 보관된 석조 상자가 묻혔습니다.
이 기록에는 중앙아시아의 사카족에서부터 아프리카의 쿠시 지역까지 이르는 다리우스의 지배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한 번에 1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설계되었으며, 제국의 외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핵심 시설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 궁전 착공]
황제의 개인적인 거처인 타차라 궁전의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건물은 테라스 위에 세워진 궁전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됩니다. 최고급 석재를 연마하여 거울처럼 빛나는 벽면을 만드는 작업이 병행되었습니다.
타차라는 '겨울 궁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다리우스 1세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석재가 너무나 정교하게 연마되어 '거울의 집'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투입되었습니다.
문틀과 창틀에는 다리우스 1세의 초상과 그를 찬양하는 명문이 새겨져 황제의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BC 5C
[보물창고의 대규모 확장]
제국 전역에서 징수된 막대한 조공과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국고 건물을 크게 확장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창고를 넘어 제국의 경제적 풍요를 관리하는 핵심 행정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철저한 보안을 위해 견고한 벽과 미로 같은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국고(Treasury)는 페르세폴리스 테라스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초기부터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점토판 문서가 발견되어 당시의 급여 지급 체계와 물자 유통 과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확장 공사를 통해 수천 명의 군대와 행정 관료들이 상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 등극]
다리우스 1세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합니다. 그는 선왕의 건축 사업을 이어받아 페르세폴리스를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발전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도시로 소집되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이 시작한 아파다나와 타차라 궁전의 미완성 부분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건물을 완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건축적 이상을 담은 대규모 계획을 추가로 수립했습니다.
이 시기 페르세폴리스는 제국의 정치적 수도인 수사보다 더 상징적인 가치를 지닌 의례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만국의 문 건설 시작]
전 세계의 사절단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거대한 관문을 건설합니다. 이 관문에는 제국의 수호신인 라마수가 조각되어 방문객들에게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했습니다. 문 벽면에는 여러 언어로 된 왕의 명문이 새겨져 제국의 보편성을 과시했습니다.
만국의 문(Gate of All Nations)은 모든 방문자가 테라스로 올라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입니다.
거대한 인면수신상인 라마수가 입구를 지키고 있어 방문자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명문에는 '나 크세르크세스, 위대한 왕, 왕들 중의 왕'이라는 문구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디쉬 궁전의 기획]
크세르크세스 1세가 자신의 이름을 딴 화려한 개인 궁전의 건설을 명합니다. 선왕의 궁전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자신의 권위가 부왕보다 뒤처지지 않음을 시각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정교한 부조 장식들이 궁전 내부 벽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디쉬(Hadish)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사적인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타차라 궁전보다 규모가 더 컸습니다.
궁전 입구에는 왕이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시종들이 우산을 들고 수행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궁전은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구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중앙 알현실 트리필론 착공]
제국의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이 회의를 열 수 있는 중앙 홀의 건설에 착수합니다. 이 건물은 테라스의 주요 건축물들을 연결하는 전략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계단 옆면에는 귀족들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며 행진하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졌습니다.
트리필론(Tripylon) 또는 '회의 홀'은 아파다나와 백주당 사이에 위치하여 기능적인 연결점 역할을 했습니다.
부조에 새겨진 페르시아 귀족과 메디아 귀족들의 모습은 제국 내 핵심 세력 간의 화합을 상징했습니다.
문 상단에는 왕이 수호신 아후라 마즈다의 가호를 받으며 왕좌에 앉아 있는 장면이 정교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백주당의 대규모 공사]
100개의 거대한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는 웅장한 왕좌의 홀 건설을 시작합니다. 제국 최대 규모의 정방형 홀로서 황제의 강력한 통치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수많은 석공들이 기둥 하단부와 머리 부분을 조각하는 데 투입되었습니다.
백주당(Throne Hall)은 가로세로 약 7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내부 공간을 지닌 페르세폴리스의 대표 건축물입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홀 북쪽 문에는 왕이 사자와 맞서 싸우는 용맹한 모습이 새겨져 왕권의 수호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계승]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암살되는 격변 속에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그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며 미완성으로 남았던 대규모 건축 사업들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부왕의 업적을 기리며 도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이 시작한 백주당과 여러 부속 건물을 완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르세폴리스는 건축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적 성숙기로 평가하며 많은 명문이 이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렘 건물의 완공]
황실 가족과 그 수행원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거주 구역인 하렘이 완성됩니다. 테라스 동남쪽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보안과 사생활이 보장되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이곳은 훗날 복원되어 현대 고고학자들의 연구 본부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하렘(Harem)은 L자 형태의 복도를 따라 수많은 방이 배치된 대규모 단지였습니다.
왕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거주하며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던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문터에는 왕이 환상 속의 괴물과 싸워 이기는 부조가 새겨져 거주자들을 보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증축]
제국의 안정을 되찾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도시 남서쪽에 새로운 궁전 건립을 명합니다. 기존 양식에 새로운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여 도시의 화려함을 한층 더했습니다. 도시 주변에 대규모 정원과 수로 시설이 추가로 보강되었습니다.
그는 선왕들의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소규모 궁전과 부속 건물을 추가했습니다.
도시 외곽의 암벽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이 시기의 비문들은 아후라 마즈다뿐만 아니라 미트라와 아나히타 신의 이름도 함께 언급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BC 4C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대전]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테라스 북서쪽에 새로운 홀을 건설합니다. 제국의 마지막 부흥기를 상징하는 이 건물은 화려한 부조 장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성벽 북쪽 산기슭에 매우 웅장하게 조성했습니다.
그는 무너져가던 제국의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고 페르세폴리스의 의례적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다리우스 1세의 무덤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부조의 정교함이 한층 더해졌습니다.
제국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의 장인 정신은 여전히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르세스 왕의 짧은 통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뒤를 이어 아르세스가 등극하나 짧은 통치 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도시의 대규모 확장은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제국의 성스러운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습니다. 제국 내부에 감도는 불안한 기운이 수도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에 남겨진 그의 건축적 흔적은 거의 없습니다.
궁정 암투로 인해 제국의 지도력이 약화되면서 도시의 방어 체계를 보강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외부의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기 직전의 고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다리우스 3세와 마지막 영광]
제국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하여 기울어가는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창고에는 전 세계에서 거두어들인 막대한 양의 금과 보화가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도시의 경비가 강화되고 사절단들의 방문이 마지막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사적 준비를 서두르는 와중에도 수도의 의례를 챙겼습니다.
당시 페르세폴리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도시의 인구가 수만 명에 달했으며 화려한 궁정 생활이 극에 달했다고 기록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함락]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침내 제국의 심장부인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합니다. 그는 보물창고에 보관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약탈하여 수천 마리의 노새와 낙타에 실어 날랐습니다. 제국의 상징이었던 도시는 마케도니아군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저항 없이 항복한 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역사학자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약탈한 보물을 옮기는 데만 1만 마리의 노새와 5천 마리의 낙타가 동원되었습니다.
점령 초기에는 도시의 파괴가 계획되지 않았으나, 며칠 뒤 제국의 운명을 바꿀 결정이 내려집니다.
[제국 수도의 비극적 소생]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명령에 따라 찬란했던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들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입니다. 이는 과거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던 것에 대한 복수이자 제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목재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화려한 부조들은 열기에 파괴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축제 도중 타이스라는 여인의 제안으로 방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크세르크세스 궁전에서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테라스 전체로 번져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방화로 인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권이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수도의 기능 공식 종결]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장군들 간의 전쟁 중에 페르세폴리스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합니다. 인근의 새로운 거점인 이스타크르로 행정적 기능이 옮겨가며 도시는 점차 버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궁전 터는 양치기들의 쉼터로 변해갔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페르세폴리스는 전략적 중요성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주민들은 파괴된 도시를 떠나 농업과 상업이 용이한 평원 지대로 이주했습니다.
궁전의 남은 석재들은 인근 도시의 건축 자재로 재활용되기도 하는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BC 3C
[프라타라카 왕조의 의례]
지역 통치자들인 프라타라카 왕들이 과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제례를 올립니다. 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혈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파괴된 사원 터를 정비했습니다. 비록 도시는 폐허였으나 영적인 상징성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력 아래서도 페르시아 전통의 불꽃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폐허 주변에 소규모 제단을 설치하고 고대 명문을 필사하며 조상들의 역사를 보존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훗날 사산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페르시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24
[사산 왕조의 민족적 각성]
새롭게 일어난 사산 왕조의 아르다시르 1세가 페르세폴리스의 유적을 대대적으로 참배합니다. 그는 자신을 고대 페르시아 대왕들의 적법한 후계자로 선포하며 파괴된 조각들을 보수했습니다. 고대 유적은 제국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선전의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사산 왕조의 왕들은 폐허가 된 궁전 벽면에 자신들의 업적을 기리는 새로운 비문을 새겼습니다.
그들은 아케메네스 시대의 부조 양식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이 시기 페르세폴리스는 종교적, 민족적 성소로서 다시 한번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311
[샤푸르 사칸샤의 기념비]
사산 왕조의 왕자 샤푸르 사칸샤가 타차라 궁전 벽면에 방문 기록을 비문으로 남깁니다. 그는 조상들의 위대한 성취에 경의를 표하며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문구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고대 유적이 후대 왕실 가족들에게 교육적 영감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문에는 '나는 이곳에서 위대한 조상들의 영혼을 보았다'는 내용이 중기 페르시아어로 새겨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폐허를 거닐며 고대 제국의 영광을 회상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비문은 훗날 언어학자들이 중기 페르시아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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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의 진출]
아랍 군대가 이란 고원에 도달하면서 페르세폴리스 주변 지역이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우상 숭배를 경계한 일부 세력에 의해 부조의 얼굴 부분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도시는 '자말-에 잠시드'라는 전설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이슬람 신화 속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이 웅장한 폐허를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설적인 왕 잠시드가 지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곳을 고대의 지혜가 담긴 장소로 기록하며 학술적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페르세폴리스는 역사적 실체보다는 신화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1472
[베네치아 사절의 방문]
베네치아의 외교관 조사파트 바르바로가 유적지를 방문하여 서구인으로는 드물게 상세한 묘사를 남깁니다. 그는 우뚝 솟은 기둥들과 정교한 인간 머리 조각상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중세 유럽에 이 신비로운 폐허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르바로는 유적의 장엄함이 이탈리아의 로마 유적에 뒤지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현지인들이 이 유적을 어떻게 부르는지, 그리고 어떤 전설이 전해지는지를 수집했습니다.
그의 여행기는 이후 유럽 탐험가들이 페르시아를 방문할 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1618
[유적의 역사적 정체 확인]
스페인의 사절 가르시아 데 실바 이 피게로아가 이곳이 고대 기록 속의 페르세폴리스임을 정확히 식별합니다. 그는 그리스 역사서의 묘사와 실제 지형을 대조하여 이 유적의 가치를 재발견했습니다. 서구 지식계에 고대 페르시아 수도의 귀환을 알린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전설 속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의 페르세폴리스를 학계에 보고했습니다.
피게로아는 유적지의 비문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고대의 문자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의 발견으로 인해 페르세폴리스는 유럽의 동양학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1621
[설형문자의 최초 사본 제작]
이탈리아의 탐험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가 벽면에 새겨진 신비로운 쐐기 문자를 최초로 필사합니다. 그는 이 문자들을 '설형문자'라고 명명하고 유럽의 학자들에게 그 사본을 전달했습니다.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 문자의 비밀을 푸는 첫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델라 발레는 이 문자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체계임을 직관적으로 간파했습니다.
그는 유적지의 상세한 도면을 작성하여 건축사 연구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필사본은 훗날 로린슨 등이 설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습니다.
1704
[코르넬리스 드 브륀의 기록]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여행가인 드 브륀이 유적지의 정교한 풍경화와 평면도를 완성합니다. 그의 정밀한 그림들은 사진이 없던 시대에 유럽인들에게 페르세폴리스의 실제 모습을 시각적으로 전달했습니다. 유적의 보존 상태를 기록한 귀중한 시각 자료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유적지에 몇 달간 머물며 빛의 변화에 따른 부조의 그림자까지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드 브륀의 화첩은 당시 유럽 귀족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기록 덕분에 유실되기 전의 일부 부조와 건축 요소들의 원형을 오늘날에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767
[카르스텐 니부르의 정밀 사본]
독일의 학자 카르스텐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의 명문들을 가장 완벽하고 정밀하게 필사해냅니다. 그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된 설형문자 체계를 명확히 구분하여 해독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고대 오리엔트 학문 체계의 토대가 마련된 사건이었습니다.
니부르는 문자의 각 획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여 오차 없는 사본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사본은 훗날 그로테펜트가 고대 페르시아어 문자를 해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학계에서는 니부르의 작업을 현대 고고학적 기록의 표준을 제시한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1821
[클로디어스 리치의 학술 조사]
영국인 학자 클로디어스 리치가 유적지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측량과 조사를 실시합니다. 그는 유적의 규모와 배치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학계에 보고했습니다.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본격적인 고고학적 접근이 시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리치는 유적지 주변의 지형과 수로 체계까지 조사하여 도시의 기능을 입체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는 부조 장식의 예술적 특징을 양식사적으로 분류하려 시도했습니다.
그의 보고서는 대영박물관 등에 전달되어 고대 페르시아 유물에 대한 서구의 관심을 고조시켰습니다.
1839
[찰스 텍시에의 건축 도판]
프랑스의 건축가 찰스 텍시에가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적 복원안을 담은 화려한 도판을 제작합니다. 그는 무너진 기둥과 벽체를 건축학적으로 분석하여 원래의 장엄한 모습을 상상해냈습니다. 대중에게 고대 제국의 화려함을 시각적으로 재현해준 작업이었습니다.
텍시에는 현장에서 직접 정밀 측량을 수행하여 도면의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그의 도판은 19세기 유럽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건축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기록들은 당시 유적의 파손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비교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840
[플랑댕과 코스트의 정밀 묘사]
프랑스의 화가 외젠 플랑댕과 건축가 파스칼 코스트가 공동으로 유적의 부조들을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남긴 방대한 분량의 스케치와 도면은 당시 유적의 세부 상태를 알 수 있는 최상의 자료가 되었습니다. 예술과 고고학이 결합된 최고의 기록물이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유적지 구석구석을 정밀하게 조사했습니다.
부조의 질감과 조각된 인물들의 의상 세부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들의 기록은 오늘날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 부조의 세부 문양을 복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1891
[웰드-블런델의 체계적 발굴]
영국인 탐험가 허버트 웰드-블런델이 현대적인 의미의 최초 발굴 조사를 수행합니다. 그는 흙에 덮여 있던 일부 궁전의 기단부와 계단을 노출시켜 유적의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단순한 표면 조사를 넘어 지하의 유물을 찾는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발굴된 부조들의 보존을 위해 석고 캐스트를 제작하여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적의 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활동으로 인해 페르세폴리스는 전 세계 고고학자들이 가장 발굴하고 싶어 하는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1931
[오리엔탈 연구소의 본격 발굴]
시카고 대학교 오리엔탈 연구소의 에른스트 헤르츠펠트가 주도하는 대규모 학술 발굴이 시작됩니다. 현대적인 고고학 기법이 총동원되어 테라스 전체의 흙을 걷어내고 웅장한 궁전의 원형을 노출시켰습니다. 페르세폴리스의 진면목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헤르츠펠트는 수년간 현장에 상주하며 과학적인 층위 조사를 통해 도시의 발전 과정을 규명했습니다.
발굴된 유물들은 체계적으로 기록되고 분류되어 현대 페르시아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아파다나의 계단 부조가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33
[요새 행정 점토판의 발견]
도시 북동쪽 요새 벽 내부에서 수만 점의 엘람어 점토판 문서가 무더기로 발견됩니다. 이 문서들은 제국의 일상적인 행정과 경제 활동을 기록한 실제 장부로 판명되었습니다. 제국의 역사를 왕의 비문이 아닌 실제 행정 기록으로 보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이 점토판들은 다리우스 1세 시대의 식량 배급, 임금 지급, 세금 징수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사회의 계층 구조와 다민족 구성원들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혁명적인 자료가 되었습니다.
현재 시카고 대학교에 소장된 이 점토판들은 점차 이란 정부로 반환되는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