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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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힌덴부르크
군인, 정치인, 대통령 + 카테고리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독일 제국의 전설적인 군인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독일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논쟁적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군에 헌신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독일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은퇴 후 평범한 여생을 보낼 뻔했으나, 시대의 부름을 받고 77세의 늦은 나이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독일을 끔찍한 독재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구국의 영웅과 역사의 방관자라는 두 가지 엇갈린 얼굴을 가진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20세기 격동의 역사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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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47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다]

독일 프로이센의 포젠(현재 폴란드 포즈난)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군인의 길을 걷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파울 루트비히 한스 안톤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로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프로이센 장교이자 지주였던 아버지와 평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규율과 명예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1859

[소년, 늠름한 군복을 입다]

슐레지엔의 발슈타트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엘리트 군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로 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혹독하고 엄격한 군사 훈련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습니다. 1863년에는 베를린에 위치한 중앙 사관학교로 옮겨가며 장교로서의 자질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습니다.

1865

[왕비의 곁을 지키는 소년]

작고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 왕비의 개인 시종(Leibpage)으로 특별 발탁되었습니다.
이는 젊고 유망한 사관생도에게 주어지는 아주 특별하고 명예로운 자리였습니다. 왕실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일하면서 힌덴부르크는 프로이센 왕정에 대한 깊은 충성심과 뜨거운 애국심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1866

[전장으로 나선 청년 장교]

제3근위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하여 보오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며 처음으로 실제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습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적의 총알이 그의 투구를 뚫고 지나가는 아찔한 순간을 겪었지만, 다행히 머리에 가벼운 상처만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긴 이 아찔한 경험은 그를 더욱 단단하고 냉철한 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1871

[독일 제국의 탄생을 지켜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역사적인 독일 제국 선포식에 직접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라블로트 전투와 스당 전투 등 굵직한 피의 전투를 무사히 치러낸 그는 자랑스러운 승전국의 장교로서 이 뜻깊은 자리에 당당히 섰습니다. 수많은 영방 국가로 쪼개져 있던 독일이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되는 가슴 벅찬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입니다.

1877

[엘리트 군인의 길, 참모본부 입성]

베를린의 전쟁학교에서 고등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군의 최고 두뇌라 할 수 있는 참모본부로 발령받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전술적 이해도와 성실함을 군 수뇌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이듬해인 1878년에는 대위로 진급하며 누구나 부러워하는 탄탄대로의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879

[평생의 동반자를 맞이하다]

첫사랑을 병으로 잃은 가슴 아픈 상처를 딛고, 게르트루트 폰 슈페를링과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원래 그는 17세의 소녀 이름가르트 폰 라파르트와 약혼했으나 그녀가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그는 평생토록 그녀의 기일마다 무덤에 화환을 보낼 만큼 순정적이었습니다). 이후 게르트루트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며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이어갔습니다.

1888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다]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관 옆에서 묵묵히 밤을 새우며 곁을 지키는 명예로운 호위 임무를 맡았습니다.
황제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에게 이 마지막 임무는 매우 각별했습니다. 제국의 시작을 함께했던 황제와 슬픈 작별을 고하며, 힌덴부르크는 자신이 뼛속까지 제국의 군인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겼습니다.

1897

[별을 달고 장군의 반열에 오르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두루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하며 마침내 장군의 별을 다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코블렌츠의 제8군단 참모장을 거쳐 장군이 된 그는, 이후 1900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카를스루에의 제28사단을 지휘하는 등 핵심 지휘관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과 묵묵한 성실함이 빛을 발한 결과였습니다.

1911

[명예로운 은퇴와 휴식]

보병대장까지 진급했던 그는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흑독수리 훈장'을 받으며 본인의 요청에 따라 군에서 명예롭게 은퇴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길고 험난했던 군 생활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노버에 집을 구해 조용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는 그저 역사 속의 훌륭한 평범한 퇴역 장군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1914

[타넨베르크 전투의 위대한 승리와 신화 탄생]

동프로이센을 침공한 러시아 대군을 늪지대로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하는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그는 독일을 구한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실제 세부 전투 전략은 참모장 루덴도르프가 짰고 힌덴부르크 본인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다고 알려질 정도였지만, 대중은 이 엄청난 승리를 그의 공로로 열광하며 돌렸습니다. 과거 독일 기사단이 크게 패배했던 '타넨베르크'의 이름을 이 전투에 일부러 붙임으로써 역사적 굴욕을 씻어냈다는 극적인 영웅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노장, 다시 조국의 부름을 받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동부전선이 위태로워지자, 은퇴했던 66세의 노장 힌덴부르크는 제8군 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다시 군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러시아군이 독일 영토인 동프로이센으로 밀고 들어오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참모장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급히 전장으로 향하며 역사의 무대 전면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독일군 최고의 자리, 야전원수 진급]

타넨베르크에 이어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도 러시아군을 연달아 격파한 놀라운 공로를 인정받아 군의 최고 계급인 '야전원수'로 진급했습니다.
은퇴했던 늙은 장군의 완벽하고도 극적인 부활이었습니다.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받은 그는 동부전선 최고 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진정한 구원자로서 막강한 권위와 인기를 한 몸에 쥐게 되었습니다.

1916

[전쟁의 실권자, 군부 독재를 펼치다]

루덴도르프와 함께 야전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이른바 '제3차 최고사령부(OHL)'를 이끌며 사실상 독일의 모든 국정을 장악하고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권력은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마저 뒷방 늙은이로 만들 만큼 무소불위로 강력했습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행하고 평화 협상을 철저히 거부하는 등, 군사적 결정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거대한 전쟁 기계로 만드는 군부 독재 체제를 공고히 구축했습니다.

1918

[모시던 황제에게 망명을 권유하다]

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가 확실해지고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자, 평생을 충성으로 모신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조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망명할 것을 눈물로 조언했습니다.
무너져가는 제국과 혼란에 빠진 군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뼈아픈 선택이었습니다. 황제가 쫓겨나듯 떠난 직후 그는 군의 최고 지휘권을 온전히 넘겨받아 새로운 혁명 정부와 협력하며 군 내부의 거센 혼란을 수습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1919

[전쟁의 상처를 안고 두 번째 은퇴]

제1차 세계 대전의 끔찍한 종지부를 찍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후, 총참모장 자리에서 씁쓸하게 물러나며 두 번째로 군복을 벗었습니다.
패전이라는 너무나도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진 채 그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 패전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교묘하게 돌리기 위한 무서운 계획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위험한 거짓말, '배후 중상설'을 퍼뜨리다]

국회 조사 위원회에 출석하여, 용감한 독일군은 전장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후방의 비겁한 정치인들과 사회주의자들에게 '등 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거짓 주장을 펼쳤습니다.
사실 독일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철저히 한계에 부딪혀 패배한 상황이었지만, 영웅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꾸며낸 이 음모론(Dolchstoßlegende)은 혼란스러운 독일 사회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 끔찍한 거짓말은 훗날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대중을 선동하는 데 사용할 거대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1925

[77세 노구로 대통령에 당선되다]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급사한 후, 우파 진영의 간곡하고 끈질긴 부탁을 수락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평생 군주제를 지지하고 뼛속까지 제국의 군인이었던 그가 민주 공화국의 수장이 된 것은 역사의 거대한 아이러니였습니다. 하지만 몹시 지쳐 있던 독일 국민들은 전쟁 영웅인 그가 아버지처럼 나라의 중심을 굳건히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1930

[의회를 무시한 권위주의 통치 시작]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국회의 정상적인 동의 없이 오직 대통령의 비상 대권(긴급 명령권)만으로 나라를 억누르는 권위주의적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나라가 벼랑 끝에 몰리자, 복잡한 의회 민주주의의 작동을 포기하고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한 민주주의가 스스로 허물어져 내리는 치명적인 신호탄이었습니다.

1932

[히틀러를 꺾고 대통령에 재선되다]

84세의 고령으로 육신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맹렬하게 추격해 오던 극우 파시스트 아돌프 히틀러를 뿌리치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히틀러의 광기 어린 독재를 두려워한 민주주의 세력과 좌파가 오히려 보수적인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켜줄 '마지막 방파제'로 여겨졌으나, 그의 육체와 정치적 판단력은 이미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1933

[히틀러에게 권력의 문을 열어주다]

끝내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로써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하고 끔찍한 독재를 펼칠 수 있는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동안 그는 히틀러를 경멸하여 여러 차례 총리 임명을 거부했으나, 정치적 혼란이 멈추지 않고 주변 측근들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힌덴부르크 본인은 자신이 히틀러를 잘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것은 완전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착각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는 서명]

히틀러가 교활하게 요구한 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비상 법령에 묵묵히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2월 4일에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고, 2월 28일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 사건 직후에는 국민의 기본권을 완전히 짓밟는 긴급 명령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힌덴부르크의 이 무책임한 서명 하나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는 법적으로 완벽한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1934

[폭풍 같았던 생을 마감하다]

자신의 영지인 동프로이센의 노이데크에서 8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조용히 마감했습니다. 한 시대의 거인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히틀러의 광기를 털끝만큼이라도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끈마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는 지체 없이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쳐 절대 권력인 '총통(Führer)'에 올랐고, 힌덴부르크가 평생을 바친 조국 독일은 전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갈 제2차 세계 대전의 끔찍한 소용돌이 속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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