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연표
1870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생포되자, 파리의 공화주의자들이 제2제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공화정인 제3공화국을 선포하며 임시 국민방위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혼란 속에서도 프랑스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중요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스당 전투에서 생포되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레옹 강베타 등 공화파들이 주도하여 제2제정의 종말을 선언하고 임시 국민방위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수도 사령관 트로쉬 장군이 지도자로 임명되었으나, 이 정부는 곧 이어질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에 직면하게 됩니다.
[강철 포위망, 파리의 고립 시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에 불리하게 전개되며 프랑스군이 연이어 패배하자, 수도 파리가 프로이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파리 시민들은 극도로 비참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임시정부는 비스마르크의 무리한 요구로 종전 협상이 결렬되자 전투를 계속 수행하기로 했으나, 거듭된 패전으로 파리는 9월 18일 프로이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이 포위는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지며 파리 시민들을 혹독한 추위와 기아로 몰아넣었습니다.
1871
[파리의 고통스러운 항복]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어 비참한 겨울을 보낸 파리가 결국 항복했습니다.
프로이센은 휴전을 받아들였지만, 공식적인 정부와의 종전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이후 프랑스 전역의 급작스러운 선거로 이어지게 됩니다.
장기간의 포위로 인해 식량과 연료가 고갈되고 시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파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항복했습니다. 프로이센은 휴전 후 대표성 있는 정부와의 종전 협상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에 따라 1871년 2월 8일 독일군의 점령 하에 서둘러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왕당파의 의회 장악과 파리 시민의 반발]
독일군의 점령 하에 급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뜻밖에도 왕당파가 임시정부의 의회를 장악하고, 아돌프 티에르가 행정수반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과거 왕정 복고를 꿈꾸는 왕당파의 득세와 무능한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실시된 선거 결과, 왕당파가 60%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반면 공화파는 20%를 겨우 넘기는 저조한 결과를 보였으나, 유독 파리에서는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일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으려는 왕당파 정부에 대해 거센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독일과의 치욕적인 평화 조약]
티에르 행정수반이 이끄는 정부는 알자스-로렌 할양,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굴욕적인 종전 협약을 독일에 제안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행보로 파리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파리 시민들의 뜻과 고통을 외면한 채, 왕당파가 장악한 의회와 티에르 정부는 프로이센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이는 파리 시민들에게 국가적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향후 코뮌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독일군의 파리 승전 행진과 시민들의 침묵 시위]
파리 시민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독일군이 승전 행사를 위해 파리 시내로 입성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이에 분노하며 검은 조기를 내걸고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현했습니다.
독일군의 간소한 승전 행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적었습니다. 이들은 무능한 티에르 정부에 반발하며 저항의 모습을 보였고, 보르도에 있던 티에르 정부의 의회는 시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구체제의 상징인 베르사유로 이동하며 파리 시민들의 불신을 더욱 키웠습니다.
[파리 코뮌의 서막, 정부군의 대포 회수 시도와 시민들의 무장봉기]
행정수반 티에르가 파리 시민들의 무장봉기를 막기 위해 국민방위대가 보유한 대포 227문을 회수하고 강제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시민들의 기부로 사들인 대포였기에 파리 시민들은 격렬하게 거부했고, 몽마르트 언덕에서 군중과 국민방위대가 온몸으로 막아서며 정부군과 대치했습니다.
정부군 병사들은 지휘관의 발포 명령에 항명하거나 국민방위대에 합류하는 등 하극상까지 벌였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르콩트와 토마 장군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티에르 정부는 즉시 베르사유로 퇴각했습니다. 이로써 파리는 사실상 시민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는 파리 코뮌 수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의 자치 조직, 중앙위원회 결성]
파리가 시민들의 손에 장악된 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임시 권력 기관인 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베르사유로 퇴각한 티에르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자치 정부 구성을 위한 코뮌 평의회 선거]
중앙위원회의 주도하에 코뮌 평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파리 시민의 절반 정도만 참여했지만, 이를 통해 85명의 의원이 선출되며 자치 정부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 공식 선포]
코뮌 평의회 의원들의 주도 아래 노동자와 시민 20만여 명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이 세운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후 파리를 자치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며 혁신적인 사회 개혁 정책들을 주장했습니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세운 세계 최초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자치 정부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리옹, 마르세유 등 다른 도시에서도 코뮌 운동이 일어났으나 조기에 진압되어 파리 코뮌과 연대하지 못하고 고립되었습니다. 파리 코뮌은 존속 기간 동안 매우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자치가 이루어졌으며, 10시간 노동제, 제빵 노동자 야간 노동 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 혁신적인 정책들을 논의했습니다.
['피의 일주일' 시작, 정부군의 파리 코뮌 전면 진압]
마크 마옹의 지휘 아래 베르사유 정부군 2만 명이 파리로 진입하며 코뮌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이 대규모 음악회에 참석한 틈을 타 스파이의 신호로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으며, 비무장 시민들에게도 무차별 발포하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파리 코뮌의 비극적인 종말을 알리는 '피의 일주일'의 시작이었습니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프랑스 정부군을 지지하는 가운데, 베르사유 정부군은 생클루 문 인근의 수비대가 없다는 내부 간첩의 신호를 받고 파리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시민들에게 함께 싸우고 죽을 것을 호소하며 저항을 독려했지만, 정부군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파리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파리 코뮌의 비극적인 종말]
7일간의 잔인한 진압작전 끝에 파리 코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정확한 사망자 수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적게는 1만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의 일주일'이라 불린 정부군의 진압 작전은 매우 처참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진압 후 파리 코뮌 연루자 10만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습니다.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파리 코뮌은 비록 실패했지만, 기득권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