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연표
1900
[네미리우에서의 탄생]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의 네미리우에서 수학 교사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비 수집을 즐기며 자연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키웠습니다. 이 초기 경험은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할 생물학적 변이와 다양성에 대한 관심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수학 교사인 그리고리 도브잔스키였으며 어머니는 소피아 보브크였습니다.\n그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학문적 기초를 닦았습니다.\n어린 시절의 자연 관찰 경험은 훗날 그가 현장 연구를 중시하는 생물학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0
[키예프로의 이주]
가족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학문적 중심지인 키예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더 넓은 교육 환경 속에서 자연 과학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대도시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드나들며 생물학자로서의 꿈을 구체화했습니다.
키예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지적 자극을 주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n그는 학교 수업 외에도 곤충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전문 지식을 쌓아갔습니다.\n이 시기에 정립된 학문적 기초는 훗날 대학 진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7
[키예프 대학교 입학]
키예프 대학교에 입학하여 생물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대학 시절 만난 스승들로부터 유전학과 세포학의 기초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대학의 학문적 수준은 높게 유지되었습니다.\n그는 실험실 연구와 야외 조사를 병행하며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익혔습니다.\n특히 현미경을 이용한 미세 구조 관찰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21
[대학 졸업과 강사 임용]
키예프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농업 단과대학의 강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딱정벌레의 유전적 변이를 주제로 한 초기 논문들을 발표하며 학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연구 시간을 확보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n주로 무당벌레의 무늬 변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에 집중했습니다.\n이 시기의 연구는 훗날 집단 유전학 연구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24
[레닌그라드 대학 이동]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유전학 강사로 자리를 옮겨 더 넓은 학문 세계를 접했습니다. 당시 소련 유전학의 대가인 유리 필립첸코 휘하에서 연구 역량을 키웠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초파리 유전학 연구를 처음으로 접하며 진화론과의 접점을 찾았습니다.
필립첸코의 연구실은 당시 소련에서 가장 진보적인 유전학 연구지였습니다.\n그는 이곳에서 실험실 내의 유전 현상과 야생의 변이를 비교하는 통찰력을 길렀습니다.\n초파리(Drosophila) 연구는 이후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핵심 과업이 되었습니다.
[나탈리아와의 결혼]
유전학자 동료인 나탈리아 시베르체바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녀는 평생의 학문적 조력자이자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학문적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연구 인생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나탈리아 역시 유전학을 전공했기에 남편의 연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도왔습니다.\n그녀는 훗날 도브잔스키가 미국으로 이주할 때도 가장 큰 지지자가 되었습니다.\n두 사람의 결합은 유전학계에서 보기 드문 학자 부부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1927
[록펠러 장학생 선발]
미국 록펠러 재단의 해외 연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세계 최고의 유전학 연구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이미 국경을 넘어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 유전학의 선구자인 토머스 헌트 모건의 연구실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소련 정부의 승인을 얻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별한 기회였습니다.\n그의 탁월한 연구 실적과 잠재력이 록펠러 재단의 심사위원들을 매료시켰습니다.\n이 기회는 도브잔스키의 연구 무대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미국 뉴욕 도착]
추운 겨울 뉴욕항을 통해 미국에 첫발을 내디디며 새로운 학문적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도착 직후 컬럼비아 대학교의 유명한 '초파리 방(Fly Room)'에 합류했습니다. 신대륙의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 속에서 그는 폭발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모건의 연구실에서 그는 스터티번트, 브리지스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n그는 특유의 근면함으로 연구실의 핵심 인력으로 빠르게 인정받았습니다.\n미국 도착 직후부터 그는 초파리의 염색체 구조 분석에 매진했습니다.
1928
[칼텍으로의 연구지 이동]
스승 모건을 따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로 연구 거점을 옮겼습니다. 서부의 온화한 기후와 칼텍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연구의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야생 초파리 집단의 유전적 다양성을 추적하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칼텍은 당시 생물학 부문을 신설하며 모건 그룹을 전격적으로 영입했습니다.\n도브잔스키는 칼텍 유전학부의 창립 멤버로서 초기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n야생 초파리 채집을 위해 캘리포니아 전역을 누비며 현장 연구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29
[칼텍 조교수 임용]
칼텍의 유전학 조교수로 정식 임용되며 미국 학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기로 한 결정은 그의 학문적 자유를 보장해주었습니다. 연구실을 직접 운영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독자적인 연구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조교수 임용은 그의 연구 능력이 미국 최고 수준임을 공인받은 사건이었습니다.\n그는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며 학부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n이 시기부터 '유전학과 종의 기원'에 대한 초기 아이디어들이 구체화되었습니다.
1933
[외딸 소피의 탄생]
딸 소피가 태어나며 가정생활에 새로운 기쁨과 활력이 찾아왔습니다. 아내 나탈리아와 함께 딸을 키우며 연구와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소피는 훗날 고고학자가 되어 아버지와는 다른 분야에서 학문적 길을 걷게 됩니다.
딸의 탄생은 도브잔스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과 삶의 새로운 목표를 주었습니다.\n그는 바쁜 연구 일정 중에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n훗날 소피는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와 결혼하여 학문적 가업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1936
[칼텍 정교수 승진]
뛰어난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36세의 젊은 나이에 칼텍의 정교수로 승진했습니다. 이미 유전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연구실은 전 세계 학자들의 교류 장소가 되었습니다. 야생 초파리 집단의 유전적 변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정교수 승진은 그가 미국 유전학계의 중심 인물임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n수많은 박사 과정 학생들과 연구원들이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칼텍으로 몰려들었습니다.\n그는 이 시기에 이미 현대 진화 통합의 핵심 논리를 거의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1937
[미국 시민권 취득]
정식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며 미국 사회와 학계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소련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학문적 고향을 미국으로 확정했습니다. 시민권 취득 후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과학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소련의 리센코주의 득세로 유전학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우려해 귀국을 포기했습니다.\n미국 시민으로서 그는 과학적 엄밀함과 지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n가족 모두가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의 고전 출판]
그의 대표작인 '유전학과 종의 기원(Genetics and the Origin of Species)'을 출간했습니다. 멘델의 유전 법칙과 다윈의 자연 선택설을 통합하여 '현대 진화 통합 이론'을 정립한 역사적 저작입니다. 이 책은 생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진화 생물학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복잡한 유전학 이론을 진화라는 큰 틀 안에서 명료하게 설명해냈습니다.\n다윈 이후 정체되어 있던 진화론에 현대 유전학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n출간 즉시 전 세계 생물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수차례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1940
[컬럼비아 대학 부임]
칼텍을 떠나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인구 유전학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인류학 등 다른 분야 학자들과의 융합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유전학 연구의 새로운 메카로 떠올랐습니다.
대학 측은 그에게 연구와 강의에 있어 최상의 조건을 제공하며 환영했습니다.\n그는 이곳에서 마이아, 심슨 등과 교류하며 진화 생물학의 범위를 확장했습니다.\n뉴욕의 활발한 학문 공동체는 그의 연구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41
[미국 유전학회 회장 당선]
미국 유전학회(GSA)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학계를 대표하는 리더로 활약했습니다. 유전학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신진 학자들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미국 유전학계는 세계 과학계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회장 재임 기간 중 유전학 교육의 표준화와 연구 윤리 강화에 힘썼습니다.\n학술 대회를 정비하여 연구 성과 공유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n그는 행정 업무 중에도 연구의 끈을 놓지 않는 모범적인 학회장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1943
[브라질 아마존 탐험]
브라질 아마존 우림을 탐험하며 열대 지역 초파리들의 유전적 다양성을 연구했습니다. 이 현장 연구는 온대 지역과는 다른 열대 생태계의 복잡한 유전 현상을 규명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브라질 학자들과의 협력 연구를 통해 남미 유전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아마존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채집과 분석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n열대 지역의 높은 종 다양성이 유전적 변이의 결과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n이 탐험 이후 그는 브라질 학계로부터 존경받는 스승으로 대우받게 되었습니다.
[남십자성 훈장 수여]
브라질 과학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브라질 정부로부터 남십자성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성과가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남미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학술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훈장 수여는 남미 지역의 생물학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공인하는 것이었습니다.\n그는 훈장을 받으며 국제적인 과학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n이 사건을 계기로 남미의 수많은 유망한 학생들이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1950
[미국 박물학자 학회장]
미국 박물학자 학회(ASN)의 회장으로 취임하며 생물학 전반에 걸친 통합적 시각을 전파했습니다. 유전학이 단순히 세포 수준의 현상이 아니라 자연사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강연은 과학적 사실과 철학적 통찰이 어우러진 명강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박물학적 전통과 현대 실험 과학의 조화로운 결합을 촉구했습니다.\n진화론적 시각이 모든 생물학 분과를 통합하는 실마리임을 강조했습니다.\n학회지 운영에도 관여하여 질 높은 논문들이 출판되도록 독려하고 관리했습니다.
1951
[대표 저작 제3판 출간]
'유전학과 종의 기원' 제3차 개정판을 출간하며 최신 연구 성과들을 대거 반영했습니다. 이 판본은 유전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수용하여 이론적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 세계 생물학 교육 현장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개정판에는 집단 유전학의 수학적 모델들이 더욱 정교하게 기술되었습니다.\n새로운 실험 증거들을 대량 추가하여 진화 통합 이론의 정당성을 보강했습니다.\n그의 저술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정석이 되었습니다.
1953
[진화학회 회장 수임]
진화 연구 학회(SSE)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진화 생물학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진화론 연구가 생물학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 과제임을 학계에 각인시켰습니다. 다양한 생물학 분과 학자들 간의 소통을 이끄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진화학의 학문적 엄밀성을 높이기 위해 학술지의 심사 기준을 강화했습니다.\n젊은 연구자들에게 현장 연구와 실험실 연구의 조화를 강조하며 교육했습니다.\n그는 회장직을 수행하며 진화 생물학이 독립된 학문 분과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1954
[영국 왕립학회 회원 선출]
영국 왕립학회의 외무 회원으로 선출되어 그의 학문적 명성이 유럽에까지 깊게 뿌리 내렸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 중 하나로 그의 업적이 인류 공통의 자산임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영국 학자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국제적인 학술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다윈의 고향인 영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깊이 감동했습니다.\n왕립학회와의 교류를 통해 유럽의 진화학자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n이후에도 여러 유럽 학술 기구로부터 명예직을 수여받으며 학술적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1958
[인간 진화에 대한 저술]
'진화, 유전학, 그리고 인간'을 출간하며 연구 범위를 인류의 진화 문제로 확장했습니다. 유전학적 원리가 인간 사회와 문화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냈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인문학적 성찰이 결합된 그의 글은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상호작용함을 강조했습니다.\n우생학적 편견을 경계하고 인간 다양성의 가치를 유전학적으로 옹호했습니다.\n그의 저술은 일반인들에게 진화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훌륭한 입문서가 되었습니다.
1962
[록펠러 대학으로 이동]
컬럼비아 대학교를 떠나 록펠러 대학교(당시 록펠러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더 나은 연구 환경과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인생 후반기의 대작들을 준비했습니다. 은퇴를 고려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연구욕을 보이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록펠러 대학교는 그에게 최고의 연구 시설과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제공했습니다.\n그는 이곳에서 실험실 모델을 더욱 정교화하며 새로운 연구 주제를 발굴했습니다.\n그의 연구실은 여전히 유전학과 진화론의 통합을 연구하는 전 세계적인 허브였습니다.
[인류 진화론 대작 출간]
'진화하는 인류(Mankind Evolving)'를 출간하여 인류학적 관점의 유전학 연구를 집대성했습니다. 인간의 적응과 변이가 문명의 발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인류학 및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필독서로 꼽혔습니다.
그는 유전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환경과 유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했습니다.\n인종 간의 지능 차이 등에 대한 과학적 오류를 지적하며 인권 옹호에 기여했습니다.\n이 저술로 그는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고히 했습니다.
1964
[국가 과학 메달 수여]
미국 정부로부터 과학 분야 최고의 영예인 '국가 과학 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생명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현대 진화론을 확립한 공적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한 사건입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직접 메달을 수여하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메달 수여식은 그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하고 축하하는 역사적인 자리가 되었습니다.\n국가 과학 메달은 과학자로서 그의 사회적 영향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상이었습니다.\n그는 이 영광을 전 세계 모든 생물학자들에게 돌리며 끝까지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1968
[백혈병 진단과 투병]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개인적으로 힘겨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마에 굴하지 않고 치료와 연구를 병행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현장 채집과 논문 집필 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백혈병 진단 이후에도 그의 학문적 열정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n그는 자신의 병을 과학적으로 수용하며 담담하게 투병 생활을 이어갔습니다.\n주변 동료들은 그의 초연한 태도와 헌신적인 연구 자세에 깊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1969
[아내 나탈리아의 별세]
평생의 반려자이자 연구 조력자였던 아내 나탈리아가 세상을 떠나며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도브잔스키에게 정서적으로 큰 타격이었으며 한동안 연구에 집중하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아내를 추모하며 그녀의 이름을 딴 장학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나탈리아의 사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n그녀는 45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며 학문적 성취를 함께 나누고 도왔습니다.\n그는 아내가 없는 적막함 속에서도 그녀가 사랑했던 과학의 길을 계속 걷기로 다짐했습니다.
1970
[마지막 대작 출간]
'진화 과정의 유전학(Genetics of the Evolutionary Process)'을 출간하며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했습니다. 1937년 작 '유전학과 종의 기원'을 현대적 관점에서 전면 재구성한 결정판입니다. 분자 유전학의 성과들을 진화론과 완벽하게 통합하며 이론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서 후배 학자들에게 남기는 소중한 학문적 유산입니다.\n분자 수준의 변이가 어떻게 종 분화로 이어지는지를 논리적으로 명확히 규명했습니다.\n이 저작은 오늘날까지도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71
[록펠러 대학 명예교수]
록펠러 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며 명예교수 직위를 수여받았습니다. 공식적인 교수 생활은 마무리되었으나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여전했으며 많은 기관에서 그를 초빙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의 삶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동했습니다.
은퇴식에는 수많은 제자와 동료들이 참석하여 그의 공로를 기리고 축하했습니다.\n그는 명예교수로서 대학의 학문적 조언자 역할을 계속 수행하며 후학을 도왔습니다.\n퇴임 후에도 여전히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일기에 기록하는 성실함을 유지했습니다.
[UC 데이비스 연구 지속]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UC Davis)로 자리를 옮겨 연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서부의 자연 환경 속에서 야생 초파리 채집 활동을 재개하며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UC 데이비스 유전학부는 그의 합류로 단숨에 세계적인 연구지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데이비스 캠퍼스의 젊은 교수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학문적 영감을 주었습니다.\n야외 채집 활동은 그의 체력을 유지하고 학문적 호기심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n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논문들을 준비하며 생의 끝자락까지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73
[불멸의 명언 발표]
'진화의 빛 없이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장은 오늘날 생물학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명언이 되었으며 그의 학문적 철학을 압축한 것입니다. 생물학의 모든 현상은 결국 진화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과학교사협회지에 실려 교육적으로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n그는 종교적 믿음과 진화론이 반드시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전향적인 시각도 보여주었습니다.\n이 명언은 현재 전 세계 거의 모든 생물학 교과서의 서문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프랭클린 메달 수여]
프랭클린 연구소로부터 최고 영예인 프랭클린 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과학적 업적과 인류에 대한 헌신적인 공헌을 기리는 뜻깊은 상이었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는 과학의 진보가 인류의 지적 자유를 확장하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프랭클린 메달은 아인슈타인 등 위대한 과학자들이 받은 매우 권위 있는 상입니다.\n도브잔스키는 이 상을 받으며 자신의 연구가 과학사의 큰 흐름 속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n건강이 악화되는 중에도 시상식에 직접 참여하여 학문적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1975
[생애 마지막 야외 채집]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캘리포니아 산맥에서 마지막 야생 초파리 채집을 시도했습니다. 자연과 끝까지 함께하려 했던 그의 열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채집된 표본들은 그의 사후에도 귀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는 채집 도구를 직접 챙기며 자연으로 나가는 것을 생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n숨이 가빠오는 중에도 현미경으로 초파리의 염색체를 관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n그의 집념 어린 마지막 현장 조사는 진화학자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거인의 영면]
캘리포니아주 산하신토 인근의 요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병 중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과학적 통찰을 잃지 않았던 그의 죽음은 전 세계 과학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수많은 동료와 제자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애도했습니다.
백혈병 악화에 따른 심부전으로 평화롭게 눈을 감으며 생을 마감했습니다.\n임종 직전까지도 옆에 있던 제자와 유전학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집니다.\n그의 유해는 그가 평소 사랑했던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안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