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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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군인 영화/드라마 배우

할리우드의 제왕이라 불린 20세기 가장 위대한 미국 배우 중 한 명입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백화점 점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배우의 꿈을 이뤘습니다.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역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소령으로 예편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매력적인 외모와 강렬한 연기력으로 오랜 시간 대중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전설적인 스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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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1

[생후 7개월 만에 어머니 사망]

몸이 병약했던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이 그를 낳고 7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어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몸이 병약하였던 그의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은 그를 낳고 7개월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갈구하였고, 여성이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도 청혼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생모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게이블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오하이오주 카디즈에서 출생]

미국 오하이오주 카디즈에서 석유 시추 노동자 윌리엄 헨리 게이블과 아들린 허셸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카디즈에서 석유 시추 노동자와 광부, 일용직을 전전하던 윌리엄 헨리 게이블과 아들린 허셸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은 탐광 기술자로, 게이블의 외가는 탐광 기술자였습니다.

1903

[아버지의 재혼과 불우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아내가 죽은 지 1년 4개월 만에 제니 던랩과 재혼하였고, 두 살 때부터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가 게이블을 낳고 죽은 지 1년 4개월만에 옆 마을에서 온 제니 던랩(1874–1924)과 재혼하였습니다. 아들이 걸음마를 막 시작한 두 살 때였습니다. 계모의 구박과 지독한 가난을 견디다 못한 그는 종종 가출하였고, 고등학교 진학은 야간반으로 하였습니다.

1917

[무성영화 단역배우로 활동 시작]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 극장에서 본 연극에 감동하여, 종종 무성영화나 연극의 단역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17년 극장에서 우연히 관람한 한 편의 연극에 감동한 뒤, 이후 종종 무성영화나 연극의 단역배우로 출연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에는 밴드부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고등학교 야간반을 중퇴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밴드부에서 나팔을 부는 데 낙을 붙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1920

[고등학교 졸업 후 다양한 직업 전전]

고등학교 졸업 후 집을 뛰쳐나와 친구와 함께 방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백화점 점원, 농부, 일용직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에든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클라크는 집을 뛰쳐나와 친구와 둘이서 방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철길 옆에서 친구와 기다리고 있다가 달리는 화물열차에 뛰어올라 열차가 가는 대로 갔고, 역이 아닌 곳에서 내려서 그 근처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식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 일용직 막노동자, 신문 보급소 사환, 전화 설치공, 식당과 레스토랑 종업원 등의 일들을 전전하였으나, 한 직업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고 배고픔조차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숙자가 되기보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1923

[로키산맥에서의 쓸쓸한 크리스마스]

로키산맥을 달리던 기차 안에서 콩 통조림 하나로 쓸쓸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때우며, 인생을 탕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훗날 이 경험을 가장 쓸쓸했지만 훌륭한 디너로 회상했습니다.

1923년 12월 크리스마스에는 친구와 함께 로키산맥의 중간을 달리는 열차에 올라 탔습니다. 기차가 삼림이 울창한 로키산맥을 달리는데 황혼이 지고 이윽고 밤이 왔습니다. 그 밤에 그와 친구가 지니고 있던 것은 콩 통조림 하나와 담배 두 개비가 전부였습니다. 이때 '오늘이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저녁 식사가 콩 통조림 하나라니 하느님도 무심하시네.'라는 친구의 말에 게이블은 "다 자업자득이지 뭐. 난 10년 뒤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만찬을 즐길 거야. 두고 봐." 라고 의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그때 내 이제부터는 인생을 이렇게 탕진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후일 클라크는 "이 때가 가장 쓸쓸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 때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지금 할리우드의 호화로운 레스토랑의 음식보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며 이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작은 극단에서 배우 활동 재개]

로키산맥에서의 경험 이후 지방 순회 작은 극단의 심부름꾼으로 단역을 맡았고, 공장 노동자나 식당 종업원으로도 활동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23년 12월 말부터 그는 지방을 순회하는 작은 극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단역을 맡아보았고, 종종 공장의 노동자나 식당의 종업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24년에는 무성영화에서 단역을 맡아본 이후 영화에 엑스트라나 조연으로도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온갖 잡다한 일을 하다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에드릴리 레퍼토리 극단에 배우 호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우연히 뮤직 홀에서 무대를 보게 되면서 그는 배우가 될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924

[조지핀 딜런과의 결혼]

14년 연상의 배우 겸 연출가 조지핀 딜런에게 연기 지도를 받으며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몇 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그는 극단에서 만난 배우 프랑스 드루프라에게 청혼했지만 드루프라는 게이블이 오랫동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실망하여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상처받았던 그는 14년 연상의 조지핀 달런에게 연기지도를 받으면서 실연을 잊었습니다.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조지핀 딜런에게 연기지도를 받으면서 1928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머시널 (Machinal) 등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얼마 뒤 자신의 멘토이자 연기스승이기도 했던 딜런과 결혼했지만 몇년만에 이혼하고 맙니다.

1925

[계모 제니 던랩 사망]

그를 구박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던 계모 제니 던랩이 사망했습니다.

그의 계모 제니 던랩은 1925년에 사망합니다.

1928

[브로드웨이 뮤지컬 '머시널' 주연]

조지핀 딜런의 연기 지도를 받아 브로드웨이 연극 '머시널'에 출연하며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주연을 맡아 이름을 알렸습니다.

배우 겸 연출가 조지핀 딜런의 연기지도를 받아 1928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머시널 (Machinal) 등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1930

[할리우드 복귀 및 본격적인 배우 활동 시작]

유성영화 도입 후 할리우드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이터 포인트', '야간근무 간호원' 등에서 갱 역할을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인상을 남겼습니다.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인 1930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1931년 《파이터 포인트》(The Finger Points), 1931년 《야간근무 간호원 Night Nurs》 등에서 갱 역을 소화해냈는데 이때의 이미지가 인상깊게 대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1931

[리아 랭햄과의 재혼]

17세 연상의 부유한 사교계 여왕 리아 랭햄의 도움과 인맥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며 조지핀 딜런과 이혼 후 재혼했습니다.

두 번째로 재혼한 17세 연상의 리어 랭험 부인은 사교계의 여왕으로서 무명의 게이블이 유명 영화에 섭외되도록 인맥과 자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였습니다. 사교계에서 인기있는 부잣집 유한마담이던 그녀가 게이블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유명감독의 영화 출연에도 다리 역할을 하자 게이블은 그만 마음이 흔들려 조지핀 딜런과 이혼하고 리어 랭험과 재혼하였습니다.

1932

['붉은 먼지'로 인기 배우 반열에 오름]

배우 진 할로와 함께 출연한 영화 '붉은 먼지 Red Dust'가 흥행에 성공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인기 배우 반열에 올랐습니다.

1932년 배우 진 할로와 함께 출연한 "붉은 먼지 Red Dust"의 흥행 이후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 캐스팅되었습니다.

1934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이 크게 성공하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에 그는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까지 호평을 얻었습니다. 1935년 제7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935

['바운티호의 반란' 성공 및 아카데미 후보]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이 대성공을 거두며 많은 팬을 얻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함께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에 올랐습니다.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으로 그는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에 올랐습니다.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서는 스펜서 트레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랭험이 인맥을 이용해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습니다. 이때 촬영한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여성팬이 생겨났고, 게이블 주변에는 여성팬들이 몰려왔습니다.

1938

[인기 코미디 배우 캐롤 롬바드와 재혼]

리아 랭햄과의 이혼 후, 인기 코미디 배우 캐롤 롬바드와 재혼하며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캐롤에게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1938년 인기 코메디 배우 캐롤 롬바드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캐롤에게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다 합니다.

193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및 리아 랭험과 이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한 여성 편력 등 스트레스로 리아 랭햄과 이혼했습니다.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60년대, 그의 사후 대한민국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남북전쟁의 동란기를 꿋꿋하게 버티는 강인한 사나이 역할로 인상을 남겼습니다. 결국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리어 랭험과는 8년만인 1939년 이혼하게 됩니다. 그는 일부 여자배우들과 염문을 뿌렸고, 이때 이름이 거론된 일부 여자배우들과는 실제로 연인관계였습니다.

1942

[아내 캐롤 롬바드의 비행기 사고 사망 및 공군 입대]

세 번째 부인이었던 캐롤 롬바드가 전쟁 기금 모금 활동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자 비탄에 잠겨 이를 이겨내고자 미 공군 장교로 입대했습니다.

세번째 부인이었던 배우 캐롤 롬바드가 1942년 1월 라스베가스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 공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하였습니다. 그는 비행기 사고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민간 항공기끼리의 충돌 사고로 밝혀졌습니다. 1942년 1월 16일 그는 미국 공군에 입해 사관학교(OCS)에 사관생도가 되었습니다.

[공군 포병 주특기 소위로 임관]

미 공군 사관학교에 입대하여 공군 포병 주특기를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과의 교전 및 공습에 참여했습니다.

그해 8월 12일 공군 포병 주특기를 받고 미국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1942년부터는 미군 공군으로 독일과의 교전에 참여했고, 1943년에는 미국-영국군 공군 연합부대에 참여하여 독일 공습에 참가했습니다.

1944

[공군 소령으로 승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에서 복무하며 소령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예편을 신청했습니다.

1944년 5월 공군 소령으로 승진했고, 그해 6월 12일 예편을 신청하여 9월 26일부로 소령으로 예편하였습니다.

[미 공군 소령으로 예편]

미 공군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이후 다시 영화계로 복귀했습니다. 공군 생활 중 캐롤 롬바드가 추락한 지점을 수색하여 그녀의 스카프 조각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공군 장교로 자원한 그는 소령으로 예편했습니다. 공군 생활 중 비행기를 몰던 그는 라스베가스 산으로 자주 찾아가 착륙 후 캐롤 롬바드가 추락한 지점을 계속 수색했고, 나중에 아내 캐롤의 추락 현장에서 비행기 잔해들 중에 캐롤의 스카프 조각을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캐롤을 잊지 못했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캐롤의 옆에 안치됩니다.

1949

[실비아 애슐리와 네 번째 결혼]

유명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비아 애슐리와 네 번째 재혼했으나, 그녀의 가정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인해 이혼하게 됩니다.

유명 배우였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러 아실레와 네번째 재혼을 했지만 곧 이혼하고 맙니다. 실러 아실레는 사교성이 좋고 스포츠를 잘 했습니다. 게이블은 여성편력을 그만두고 가정에 정착하려 했지만, 전혀 가정적이지 않은 실러 아실레는 늘 일 아니면 집 바깥을 돌았습니다.

1952

[실비아 애슐리와 이혼]

가정에 정착하려 했으나 아내 실비아 애슐리와의 성격 차이로 실망하여 이혼했습니다.

실망한 그는 1952년 실러와 이혼합니다.

1955

[케이 윌리엄스와 다섯 번째 결혼]

세 번의 이혼 경험과 두 자녀가 있던 39세의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와 다섯 번째로 재혼했습니다.

1955년 그는 세 번의 이혼 경험과 두 자녀가 있던 39세의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와 재혼하였습니다.

1956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 제작 및 출연]

영화 제작에도 투자하여 제인 러셀 등과 공동으로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을 촬영했습니다.

1955년에는 영화 제작에도 투자하여 제인 러셀과 그의 남편 밥 워터 필드와 공동으로 투자, 제작에 참여하여, 한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1956)을 촬영하였습니다.

1958

[건강 악화로 인한 영화 출연]

병세가 악화되어 영화 '어느 교사의 애완동물'에서는 필름 편집으로 노화된 얼굴과 급격히 증가한 체중을 보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었던 그는 1958년에 출연한 영화 어느 교사의 애완동물에서는 필름 편집으로 노화된 얼굴과 급격히 증가한 체중을 보정하기도 했습니다.

1960

[유작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촬영]

아서 밀러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 캐스팅되어 늙은 카우보이 역을 맡았으며, 이 작품은 그의 죽기 2주 전 촬영이 끝난 유작이자 마릴린 먼로의 유작이기도 합니다.

1960년 "거친 말(馬)과 여자"의 주연을 맡은 뒤 몇편의 영화와 연극, 뮤지컬에 출연한 뒤 1960년 말 아서 밀러의 "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The Misfits"에 캐스팅되었는데 여기서는 늙은 카우보이 역을 맡았습니다. 이는 그가 죽기 2주 전에 끝내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클라크 게이블의 유작이면서 동시에 마릴린 먼로의 유작이기도 합니다.

[관상 동맥 혈전증 및 심근경색으로 사망]

혈관질환과 심장 질환을 앓아오던 중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품과 양아들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관에 넣어졌습니다.

혈관질환과 심장 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는 1960년 무렵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1960년 11월 16일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근경색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1960년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입원 중이었던 그는 11월 16일 케이 윌리암스의 전남편 소생 아들로 그가 양아들로 받아들였던 두 아들이 그의 병실에 왔다가 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데스 마스크를 뜬 뒤, 다섯번째 아내 케이 윌리엄스와 결혼할 때 입었던 청색 양복, 결혼반지, 메달, 그리고 케이 윌리암스의 전남편 소생 아들로 그가 양아들로 받아들였던 두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관에 넣어졌습니다.

1961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 출생]

그가 사망했던 병원에서 4개월 뒤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났으며, 마릴린 먼로가 병원에 찾아와 이를 지켜봤습니다.

그가 사망했던 병원에서 4개월 뒤 그의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납니다. 마릴린 먼로는 그의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날 때 직접 병원에 찾아와서 이를 지켜봤다고 합니다.

1977

[일대기 '거장 만세' 출판]

린 토너번이 쓴 그의 일대기 '거장 만세 Long Live the King'가 출판되며 그의 삶과 업적이 재조명되었습니다.

1977년에 린 토너번이 쓴 그의 일대기 "거장 만세 Long Live the King"가 출판되었습니다.

1983

[다섯 번째 아내 케이 윌리엄스 사망]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도 사망하여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묘지에 그의 옆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묘지에 있는 세번째 아내인 캐롤 롬바드의 묘 옆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다섯번째 아내인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 역시 1983년에 사망하여 그의 옆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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