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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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탐험가, 항해가, 신대륙 개척 + 카테고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로 스페인 왕실의 후원 아래 1492년 서회항로를 개척하려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며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인물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아시아라고 믿었지만 그의 항해는 신구대륙 간의 광범위한 교류인 콜럼버스의 교환을 촉발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 학살과 노예화 등 잔혹한 행위로 인해 오늘날 그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부귀와 명예 그리고 종교적 소명을 복합적으로 쫓았던 그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지만 그 이면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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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450

[세계 역사에 기록될 탐험가, 제노바에서 태어나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직조공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직조공으로 일하다 지중해에서 선원으로 활동하며 항해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1485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담대한 계획을 제안하다]

포르투갈 주앙 2세에게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항로 탐험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항해 거리를 실제보다 훨씬 짧게 계산하는 오류를 범했고, 당시 아프리카 남단 경유 항로 개척에 집중하던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1488

[포르투갈의 디아스, 아프리카 희망봉을 최초로 발견하다]

콜럼버스의 제안이 답보 상태에 빠진 사이,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하고 귀국했습니다.

이 소식은 스페인 왕실에 큰 자극을 주며 콜럼버스의 계획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92

[오랜 기다림 끝에 스페인 왕실과 탐험 계약 체결]

6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스페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왕 부부로부터 탐험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스페인 왕실은 경쟁국 포르투갈에 뒤처지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콜럼버스가 제시한 제독 작위와 총독 지위, 수익의 10% 지급 등의 파격적인 조건을 수락하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정, 1차 항해를 시작하다]

산타마리아호, 니냐호, 핀타호 3척으로 구성된 탐험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하여 한 달간 보급과 선박 수리를 마친 후, 미지의 대서양을 향해 서쪽으로 대담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미지의 땅,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하다]

카나리아 제도를 떠난 지 33일 만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했습니다.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부르던 이 섬을 '산살바도르(구세주)'라고 명명하고 스페인 왕의 영토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곳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굳게 믿었으며, 이후 쿠바와 에스파뇰라섬을 탐험하며 금과 향신료를 찾아 나섰습니다.

1493

[험난한 귀환, 포르투갈에 뜻밖의 발걸음을 하다]

에스파뇰라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겨둔 채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순탄치 못한 귀환 항해 중 두 차례의 큰 폭풍을 만났고, 특히 두 번째 폭풍에 떠밀려 스페인이 아닌 포르투갈 리스본에 급히 입항해야 했습니다.

이때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와 탐험 결과에 대해 대화하며 알카소바스 조약 위반 문제로 양국 간 영토 분쟁을 야기했습니다.

[금을 찾아 떠나는 1,200명의 대선단, 2차 항해 출발]

1차 항해 후 두 달 만에 왕명으로 17척의 대선단을 꾸려 2차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금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농부, 장인, 가축, 각종 종자까지 1,20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습니다.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지만, 1차 항해 때 남겨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들이 모두 사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1494

[최초의 세계 분할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 체결]

콜럼버스의 1차 항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새로운 영토에 대한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양국은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를 둘로 나누고 각자의 탐험 및 식민지 개척 지역을 확정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지구를 양분한 역사적인 조약입니다.

1496

[성과 부진과 원주민 학대 논란 속 2차 항해 귀국]

2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국했지만, 기대했던 금과 향신료는 미미했고 식민지 통치에 대한 무능력함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원주민을 살육하고 노예로 삼는 등 잔혹 행위가 밝혀지면서 왕실로부터 큰 문책을 당하고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1498

[에덴동산을 꿈꾼 무모한 도전, 3차 항해 출발]

적도 부근에 금이 많다는 당시의 믿음에 따라 위험한 무풍지대를 통과하는 항로를 선택하며 3차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에덴동산을 찾고자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까지 동행시켰고, 남미 대륙의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강 하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오리노코강 하구를 에덴동산의 관문으로 착각했습니다.

1500

[식민지 반란으로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송환되다]

3차 항해 중 히스파니올라섬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들은 왕이 파견한 조사관에 의해 콜럼버스는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스페인으로 송환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그의 식민지 통치 실패와 잔혹한 행위가 불러온 결과였습니다.

1502

[명예 회복을 위한 마지막 여정, 4차 항해 출발]

3차 항해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탐험의 기회를 얻어 네 척의 카라벨선에 135명의 선원과 함께 4차 항해를 떠났습니다.

이 항해에는 그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14살이 된 둘째 아들 페르난도도 동행하여 중앙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했습니다.

1503

[자메이카섬에 좌초되어 1년 넘게 고립되다]

쿠바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자메이카섬에 좌초되었습니다.

선원들과 함께 여러 차례 구조를 요청했지만, 신임 총독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1년 동안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듬해 6월에야 비로소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1504

[성과 없이 마지막 4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

마지막 4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금광이나 향신료를 발견하지 못했고, 특별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1세 여왕이 사망하면서 그의 지위와 처우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탐험의 강력한 후원자, 이사벨 1세 여왕 사망]

콜럼버스의 오랜 후원자이자 그의 탐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이 사망했습니다.

여왕의 사망은 콜럼버스의 명예와 처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말년까지 자신의 지위 향상과 처우 개선을 왕실에 요청했으나 끝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1506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라고 믿은 채 눈을 감다]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탐험한 땅을 인도나 아시아의 일부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은 장남 디에고에게 상속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후손들의 희망에 따라 대서양을 오고 간 끝에 현재 세비야 대성당에 거대한 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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