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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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루주 정권에 의해 자행된 캄보디아 집단학살은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참사 중 하나입니다. 극단적인 농업 사회주의와 마오이즘에 심취한 폴 포트는 이른바 '문명 초기화(Year Zero)'를 내세워 국가 전체를 거대한 강제 수용소로 탈바꿈시켰고, 지식인과 소수 민족을 철저히 말살하는 대학살을 주도했습니다. 이 참혹한 공포 통치는 당시 국가 인구의 최대 36%에 달하는 약 280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훗날 무력 개입으로 정권은 붕괴했으나, 이 상흔은 수십 년이 지나 국제 전범 재판을 통해 단죄가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캄보디아 민중과 전 세계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표
1965
1965
[중국에서의 비밀스런 수업]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가 중국을 방문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과 계급 투쟁에 대한 정치 및 군사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훗날 벌어질 거대한 비극의 이념적 토대가 바로 이 시기에 싹트기 시작했다.천보다, 장춘차오 등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이 직접 폴 포트를 지도했습니다. 특히 캉성으로부터 배운 잔혹한 정치적 숙청 방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이를 훗날 캄보디아에서의 극단적인 통치 방식으로 적극 활용하게 됩니다.
1968
1968
[전국적인 무장 반란 선언]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전역에서 정부를 향한 전면적인 무장 투쟁을 공식적으로 개시했다. 주변 공산 국가들의 은밀한 무기 지원과 은신처 제공이 반군의 세력을 걷잡을 수 없이 키우는 핵심 동력이 되었다.당시 국왕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초기 2년 동안 이들의 폭동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반군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며 스스로를 캄푸치아 공산당으로 공식 명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69
1969
[파괴적인 미국의 폭격 작전]
미군이 크메르루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캄보디아 영토에 대규모 폭격 작전인 '메뉴 작전'을 전격 개시했다. 그러나 빗발치는 폭탄은 캄보디아 농촌 사회를 처참하게 붕괴시키며 오히려 예상치 못한 극단적 반작용을 낳았다.수년간 이어진 이 무차별 폭격으로 수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참혹한 피해와 학살에 분노한 수많은 농민들이 미군에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크메르루주는 이를 완벽한 모병 선전 도구로 악용했습니다.
1970
1970
[론 놀의 쿠데타와 친미 정권]
론 놀 총리가 국회의 지원을 받아 시아누크 국왕을 권좌에서 전격적으로 몰아내고 친미 성향의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급진적인 정권 교체는 국가 전체를 돌이킬 수 없는 깊은 내전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축출된 시아누크 국왕은 곧장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론 놀 정권 군사력의 취약함을 파악하고 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이 새로운 공화국을 유지시키기 위해 공군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적 지원을 공식화했습니다.
1970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
크메르루주의 파병 요청을 받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캄보디아 정부군을 향해 파괴적인 진격을 시작했다.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캄보디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순식간에 반군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소련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이 침공은 누온 체아와의 사전 협상을 거친 뒤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북베트남군은 수도 프놈펜에서 불과 24km 떨어진 곳까지 맹렬하게 진격하며 정부군을 궤멸시킨 뒤, 점령한 영토를 현지 반군들에게 고스란히 넘겼습니다.
1970
[시아누크와 크메르루주 동맹]
권력을 잃은 시아누크가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의 조언에 따라 과거의 앙숙이었던 크메르루주와 손을 잡았다. 국왕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이 더해지자 반군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시아누크는 크메르루주가 주도하는 망명 정부(GRUNK)의 명목상 수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수많은 비정치적 농민들이 오직 국왕을 지지하고 돕는다는 일념 하나로 크메르루주 전선에 앞다투어 자원입대하게 되었습니다.
1973
1973
[끔찍한 학살의 초기 목격 보고]
베트남 국경 지대에 파견된 미국의 외교관이 크메르루주의 끔찍한 학살 만행을 국제 사회에 최초로 경고했다. 이 잔혹한 통치의 실체는 나치 독일이나 소련의 전체주의 독재를 연상시킬 만큼 참혹한 수준이었다.미 국무부 소속이었던 케네스 M. 퀸(Kenneth M. Quinn)은 학살의 마수를 피해 도망친 수많은 캄보디아 난민들과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극소수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농민들을 선동하여 문명을 파괴하고 철저한 공포 통치를 자행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40페이지 분량으로 작성하여 본국에 타전했습니다.
1974
1974
[베이징에서의 치밀한 모의]
시아누크 국왕과 크메르루주의 핵심 인사들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은밀한 고위급 회동을 가졌다. 장차 캄보디아 전체를 지배할 새로운 체제의 핏빛 청사진이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키우 삼판과 이엥 사리는 마오쩌둥에게 자신들이 구상한 극단적인 정책들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요청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제안을 대부분 승인하고 밀어주면서도,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시아누크 국왕을 정부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는 말 것을 당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1975
1975
[프놈펜 함락과 핏빛 장막]
미국의 원조가 끊겨 탄약을 모두 소진한 정부군이 끝내 무너지며 크메르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완전히 장악했다. 길고 길었던 내전이 종식된 환희도 잠시, 역사상 전례 없는 참혹한 집단 학살의 비극이 막을 올렸다.프놈펜 함락과 함께 캄보디아 내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는 곧 '이어 제로(Year Zero)'라 불리는 문화적, 사회적 초기화와 대학살의 치명적인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최소 24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나, 곧이어 벌어질 끔찍한 참상에 비하면 이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975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한 회동]
폴 포트를 비롯한 정권의 수뇌부가 다시 한번 베이징을 찾아 마오쩌둥의 전폭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승인을 얻어냈다. 초극단적인 마오이즘에 심취한 이들은 조국을 피로 물들일 학살의 막강한 정당성을 부여받고 귀국길에 올랐다.이 회동에서 마오쩌둥은 "당신들의 경험이 우리보다 훨씬 낫다"며 폴 포트의 급진적인 노선을 극찬하고 레닌, 스탈린 등의 핵심 저서 30여 권을 직접 선물했습니다. 이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인 장춘차오가 캄보디아를 방문해 이들의 실질적인 통치 방식을 직접 지도하며 돕기까지 했습니다.
1975
[지옥으로 변한 농촌 강제 이주]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주는 극단적인 농업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 노동 수용소로 무자비하게 내몰았다. 문명의 이기가 철저히 파괴된 그곳에서 수백만 명이 가혹한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캄보디아 인구 전체를 사실상 거대한 모바일 작업반으로 강제 분할하는 전무후무한 사회 동원 실험이 자행되었습니다. 이전 정권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 중산층 전문가, 사업가 등은 자본주의의 잔재로 낙인찍혀 최우선 처형 대상이 되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1975
[10억 달러의 막대한 배후 지원]
새롭게 들어선 캄보디아의 학살 정권은 동맹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막대한 원조를 받으며 폭정의 강력한 동력을 확보했다. 외부의 든든하고 체계적인 물질적 지원이 고립된 국가 내부의 끝없는 살육을 가속화하는 비극을 낳았다.1975년 한 해 동안 중국은 크메르루주 정권에 최소 1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무이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은밀히 제공했습니다. 관련 학계에서는 크메르루주가 통치 기간 동안 받은 전체 해외 원조의 무려 90% 이상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강력히 추산하고 있습니다.
1975
[악명 높은 S-21 수용소 가동]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하기 위한 196개의 잔혹한 안보 수용소가 캄보디아 전역에 속속 들어섰다. 짐승만도 못한 참혹한 대우 속에 수만 명의 지식인들이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당시 운영된 시설 중 가장 끔찍하고 악명 높았던 뚜올슬렝(Tuol Sleng)의 제21호 안보수용소(S-21)에는 확인된 것만 약 2만 명의 불행한 사람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문과 강압적인 심문, 끔찍한 생체 실험 끝에 오직 7명의 성인만이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75
[화교들을 향한 무자비한 박해]
자본주의와 악랄하게 결탁하여 캄보디아의 선량한 민중을 착취했다는 억지스러운 명목 아래 수많은 화교들이 집단 학살의 주요 표적으로 전락했다. 주로 도시에 거주하며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농촌 강제 이주 정책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1975년 정권 초기 42만 5천 명에 달했던 활기찬 화교 인구는 학살의 칼바람을 맞고 1979년 무렵 불과 20만 명으로 처참히 급감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중국 정부는 캄보디아 내 동포 화교들이 겪는 이 끔찍한 대학살의 참상을 뻔히 알면서도 지정학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외교적 항의나 보호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1976
1976
[민주 캄푸치아의 기만적 탄생]
크메르루주 권력층이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로 공식 변경하며 새로운 독재 국가의 수립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단어 뒤에 숨은 국가는 철저한 폐쇄성과 폭력으로 자국민들의 숨통을 무자비하게 옥죄었다.이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아 서구 문명, 지식인 세력,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말살 정책을 국정의 최우선 핵심 과제로 삼았습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최소한의 거주 이전과 언론의 자유마저 완벽히 박탈당한 채 거대한 국가적 감옥에 갇혀 절망해야만 했습니다.
1976
[죽음의 대약진 운동 선포]
과거 이웃 공산 국가의 철저히 실패한 정책을 모방한 거대한 국가 경제 개조 프로젝트가 폭력적으로 강제 시행되었다. 무리하고 강압적인 농지 집단화와 비현실적인 쌀 생산 목표는 결국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이는 거대한 대기근의 참사로 직결되었다.'마하 루아 플로(Maha Lout Ploh)'라 명명된 이 야심 찬 경제 계획은 과거 수천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이름부터 그 방식까지 그대로 본뜬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무자비한 식량 통제와 비인간적인 노동 할당량을 강요했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지쳐 쓰러진 농민들은 가차 없이 즉결 처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77
1977
[킬링필드와 피의 숙청]
정권의 광기가 절정에 달하며 수많은 지식인과 억울한 죄수들이 일명 '킬링필드'라 불리는 거대한 처형장으로 질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했다. 귀중한 총알을 아끼기 위해 날카로운 곡괭이와 둔기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야만적인 만행이 매일같이 자행되었다.안경을 쓰거나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황당한 이유만으로도 잠재적인 반동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가족 단위로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문서화된 발굴 기록에 따르면 끔찍하게 처형당한 희생자들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집단 무덤에 암매장되었으며, 이 끔찍한 직접적 처형이 전체 캄보디아 학살 사망자의 약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강력히 추정됩니다.
1978
1978
[국경 넘은 바축 민간인 학살]
내부의 통제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정권이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이웃 국가의 국경을 넘어 잔혹한 타국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 끔찍하고 무모한 국경 침략은 결국 강력한 군사적 응징을 불러오는 가장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다.크메르루주 무장 군대는 국경 지대인 베트남의 바축(Ba Chúc) 마을을 야만적으로 급습하여 남녀노소를 전혀 가리지 않고 무려 3,157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잔혹하게 도륙했습니다. 무자비한 도발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베트남 정부는 이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크메르루주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면적인 전쟁 준비에 즉각 돌입하게 됩니다.
1978
[기만적인 이주 명목의 참극]
참족 무슬림과 연약한 소수 민족을 향한 노골적이고 끔찍한 인종 청소가 캄보디아 전역에서 파상적으로 벌어졌다. 더 나은 새로운 거주지로 안전하게 이주시킨다는 당국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은 수백 가구의 핏줄들이 집단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이슬람교를 새 국가에 속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불순한 외래 문화로 단정 지은 크메르루주는 참족 마을의 원로들을 은밀히 암살하고 극단적인 종교적 탄압을 가했습니다. 1978년 한 해에만 수백 가구의 참족, 화교, 그리고 크메르인 가족들이 강제 이주를 빌미로 차가운 트럭에 수집되어 아무도 모르는 학살터에서 철저히 몰살당했습니다.
1978
[인종 청소를 향한 극단적 선동]
관영 매체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특정 민족을 완전히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라는 끔찍한 국가 단위의 세뇌와 대국민 선동이 울려 퍼졌다. 맹목적인 인종차별과 배외주의가 결합된 광기 어린 혐오 발언이 학살의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프놈펜의 공식 국영 라디오 방송은 확성기를 통해 "5천만 베트남인을 모두 하나 남김없이 몰살하라"는 충격적이고 선동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의 살육을 노골적으로 부추겼습니다. 고유의 언어 사용마저 강력히 금지당한 소수 민족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이 거대하고 조직적인 제노사이드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어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1978
[베트남군의 전면적인 침공 개시]
끝없는 국경 도발과 자국민 학살에 극도로 격분한 베트남 정규군이 캄보디아 영토로 거침없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왔다.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이던 살육의 독재 제국은 실전을 겪은 외세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한때는 막강한 미군에 맞서 함께 피를 흘리며 군사적 동맹을 맺었던 캄보디아와 베트남이었지만, 크메르루주의 멈추지 않는 민간인 학살 행위를 베트남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앞세운 베트남군의 맹렬한 공세는 잔혹한 폭정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캄보디아 민중들에게 뜻밖의 해방의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1979
1979
[공포 통치의 허망한 몰락]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3년 8개월간 피바람을 일으켰던 민주 캄푸치아의 참혹한 독재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만악의 근원이었던 폴 포트를 비롯한 핵심 수뇌부는 국경 지대의 정글 깊은 곳으로 초라하게 도망치며 기나긴 학살의 시대가 종식되었다.1975년 4월부터 이어진 짧고도 무자비했던 이 정권의 극단적인 정책들로 인해,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최소 15%에서 무려 36%에 달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권이 무너진 후 남겨진 국가의 모든 기초 인프라와 수천 년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1979
[참혹한 결과와 난민들의 탈출]
미치광이 독재의 붕괴 이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드러난 학살의 거대한 규모는 전 세계의 국제 사회를 크나큰 충격과 비통에 빠뜨렸다. 오랜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질린 수많은 생존자들이 살기 위해 이웃 국가인 태국을 향해 목숨을 건 두 번째 엑소더스를 감행했다.추후 이루어진 학계의 최종 통계 추산에 따르면 최소 120만 명에서 최대 280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캄보디아 시민이 크메르루주에 의해 끔찍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희생자들 중에는 20만~30만 명의 화교, 최대 5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참족, 그리고 2만여 명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 등 철저히 탄압받던 소수 민족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03
2003
[지연된 정의 위한 국제 협약]
수십 년간 온전한 처벌을 받지 않고 도망쳐있던 끔찍한 학살의 주동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캄보디아 정부와 국제연합(UN)이 마침내 역사적인 법적 합의를 이뤄냈다. 억울한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울 특별한 국제 재판소가 기나긴 산고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이 중대한 국제 협정을 통해 캄보디아 법원 내 특별 재판부 형식인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ECCC)가 공식적으로 그 권한을 인정받고 설립되었습니다. 자국민을 상대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끔찍한 집단 학살을 기획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던 크메르루주 핵심 지도부의 책임을 국제법에 따라 묻기 위한 험난한 법적 투쟁의 확고한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2009
2009
[2만여 개의 암울한 집단 무덤]
캄보디아 자료 센터의 끈질긴 현장 추적과 방대한 조사 끝에 전국 각지에 몰래 숨겨져 있던 수만 개의 집단 학살 암매장 터가 지명 지도 위에 낱낱이 표기되었다. 독재 권력이 끝까지 은폐하려 했던 잔혹한 학살의 실체적이고 끔찍한 증거가 마침내 온전하게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놀랍게도 캄보디아 영토 전역에서 무려 23,745개에 달하는 거대한 집단 무덤들이 공식적으로 발견되고 매핑되었습니다. 이 셀 수 없이 많은 구덩이들 속에는 곡괭이와 몽둥이에 의해 약 130만 구에 달하는 억울한 처형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학살의 지휘자들을 강력하게 옭아매는 가장 결정적인 물증이 되었습니다.
2009
[역사적인 전범 재판의 개막]
길고 고통스러웠던 법적 준비 과정을 딛고 크메르루주 특별 재판소의 공식적인 공판이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마침내 개정되었다. 지옥 같은 강제 수용소의 세월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눈물 어린 분노의 증언이 법정에 묵직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재판은 피의자들의 반인도적 범죄,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 그리고 특정 민족을 말살하려 한 집단 학살(제노사이드) 혐의를 입증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후 너무나 긴 세월이 지나 열린 재판 탓에 안타깝게도 일부 주요 가해자들은 이미 편안하게 자연사했지만, 생존해 있는 핵심 수뇌부를 향한 단죄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2010
2010
[학살 실무자를 향한 첫 단죄]
수만 명을 고문했던 악명 높은 S-21 수용소의 총책임자였던 자에게 반인도적 범죄와 끔찍한 전쟁 범죄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다. 학살의 방아쇠를 가장 앞장서서 당겼던 피도 눈물도 없는 실무 책임자를 향한 가장 준엄하고 역사적인 법의 심판이었다.제1심 재판부는 '두크(Duch)'라는 악명 높은 가명으로 잘 알려진 강 켁 이우(Kang Kek Iew)에게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후 열린 대법원 격인 특별 재판소 최고심에서는 뉘우침 없는 그의 죄질이 극히 불량함을 인정하여 원심의 형량을 가장 무거운 종신형으로 대폭 가중시켰습니다.
2014
2014
[핵심 수뇌부를 향한 심판]
폴 포트의 수족이자 캄보디아 정권의 2인자들이었던 최고위 핵심 지도부에게 반인도적 범죄의 혐의로 마침내 법적 유죄가 확정되었다. 안전한 권력의 책상에 앉아 수백만 명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권력자들의 추악한 말로가 세상에 명백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크메르루주의 실질적인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와 국가주석을 지내며 대외적 얼굴 마담 역할을 했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이 드디어 법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이들은 1949년 제네바 협약을 중대하게 위반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를 주도한 사실이 재판부로부터 완전히 인정되어 중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2019
2019
[제노사이드 혐의의 최종 확정]
전범 재판소는 수감 중인 수뇌부들에게 단순 전쟁 범죄를 넘어 특정 소수 민족을 철저히 말살하려 한 '집단 학살'의 극단적 죄목을 최종적으로 추가 적용했다. 인류 최악의 끔찍한 범죄자라는 영원한 낙인과 함께 이들에게 사회와 영원히 격리되는 종신형 판결이 쐐기를 박았다.재판부는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이 베트남계 민족을 상대로 벌인 끔찍한 학살 행위를 명백한 제노사이드로 판결했습니다. 특히 실권자였던 누온 체아에게는 상급자 책임 원칙에 따라 무슬림 참족을 철저히 멸절시키려 했던 종교적, 인종적 제노사이드 혐의까지 추가로 강력히 인정되며 두 사람 모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종신형이 최종 선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