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
연표
1883
오늘날 레바논 북부에 위치한 마론파 신자들이 모여 사는 브샤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마론파 가톨릭 성직자였고, 어머니 카밀라는 서른 살에 지브란을 낳았다. 아버지는 칼릴이었으며 어머니의 세 번째 남편이었다.
1891
지브란의 아버지는 약국에서 일하다 도박 빚을 지고 오토만 정부 관리로 일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의 불만이 확산되어 1891년 경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갔고, 가족 재산이 몰수되었다.
1895
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지브란의 어머니는 칼릴과 그의 여동생 마리아나, 술타나, 그리고 이복 형제 피터를 데리고 뉴욕으로 향했다. 이후 가족은 보스턴의 시리아/레바논계 공동체에 정착했다.
보스턴에 정착한 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이민자를 위한 영어 학습 과정에 배정되었다. 동시에 정착촌 주변 예술 학교에 등록하여 아방가르드 예술가 프레드 홀랜드 데이를 소개받고 그의 후원 아래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898
프레드 홀랜드 데이의 후원 아래 예술 활동을 이어가던 중, 한 출판업자가 지브란의 그림 중 일부를 책표지로 사용했다.
지브란의 어머니와 형제 피터는 그가 서구 문화보다 고국의 전통 문화에 동화되길 원했다. 이에 15세에 그는 베이루트에 있는 고등교육 기관과 마론교회 입시 준비 학교에서 공부했다. 동급생과 학생 문학 잡지를 만들고 '학교 시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1902
레바논 유학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오기 2주 전, 그의 여동생 술타나가 14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몇 년간 레바논에 머물던 그는 1902년 5월 10일에 엘리스 섬을 통해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1903
1902년 여동생 술타나의 죽음에 이어, 다음 해에는 형제 브후트로스가 결핵으로 숨졌고,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여동생 마리아나가 양장점에서 일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1904
보스턴에 있는 데이의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10년 연상으로 훌륭한 여학교 교장이었던 메리 엘리자베스 해스켈을 만났고, 해스켈은 지브란의 남은 생애 동안 개인적인 삶과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우정 관계를 유지했다.
1908
1908년에 파리로 가서 오귀스트 로댕과 함께 2년 동안 예술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생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였던 유세프 호와예크를 만났으며, 이후 보스턴에서도 예술을 계속 공부했다.
1911
지브란과 알고 지내던 줄리엣 톰슨의 기록에 따르면, 지브란은 1911년경에서 1912년경 미국을 방문한 바하이 신앙의 리더 압둘-바하를 만났다.
1918
지브란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었으나, 1918년 이후 출간된 작품은 대부분 영어로 기록되었다. 알프레드 노프 회사에서 '미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첫 번째 영어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성서적 운율을 따른 경구와 비유를 담고 있으며, 시와 산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문체를 지녔다.
1923
지브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예언자'는 스물여섯 편의 시적인 산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 책은 냉담한 비평을 받았으나 잘 팔렸고, 1960년대 반문화 창작물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다. 영감이 넘치는 창작의 초기 사례로 손꼽힌다.
1931
뉴욕에서 1931년 4월 10일 간경변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는 소원을 남겼다.
1932
지브란의 유언에 따라 1932년 메리 해스켈과 그의 여동생 마리아나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을 구입하고 그곳에 지브란을 묻었으며, 지브란 박물관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