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연표
1777
[천재 수학자의 탄생]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가난한 벽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어머니와 삼촌의 지지 아래 학업을 이어갔다.
1792
[공작의 후원으로 학업 시작]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카롤링 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는 그의 비범한 재능이 꽃피울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795년까지 카롤링 학교(현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가 1798년까지 머물렀다.
1795
[빛을 보지 못한 천재의 발견]
측정값을 처리하는 중요한 통계 기법인 '최소제곱법'을 이 시기에 이미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즉시 출판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르장드르와의 선후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소제곱법은 1806년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에 의해 최초로 발표되었지만, 가우스의 편지와 사후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 가우스가 1795년에 이미 이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796
[고대 수학 난제 해결!]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작도 문제에 혁명적인 발견을 했다.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 가능함을 보였고, 특히 정17각형 작도 가능성을 증명하여 스스로도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가우스는 이 결과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묘비에 십칠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원과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17개의 점으로 된 별이 대신 새겨졌다.
[수의 신비 밝힌 황금률]
정수론 분야에서 '합동 산술'을 발견하고, 수학자들이 이차 방정식의 해결 가능성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돕는 놀라운 일반 법칙인 '이차 상호 법칙'을 세계 최초로 증명해냈다.
이 이차 상호 법칙의 증명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 발표되었으나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난제를 해결한 것으로, 현대 정수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소수의 분포 예측]
정수들 사이에서 소수들이 어떻게 분포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소수 정리'를 추측했다.
이는 훗날 수많은 수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되었으며, 수학의 심오함을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놀라운 '삼각수 정리' 증명]
모든 자연수는 3개의 삼각수로 나타날 수 있음을 증명하며 일기에 'Heureka! num=Δ+Δ+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를 연상시키는 이 기록은 그의 발견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항식 연구 결과 발표]
다항식의 유한한 영역에서 계수에 따른 해의 개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판하며, 복잡한 대수학 문제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1798
[현대 정수론의 바이블 탄생]
21세의 나이에 대표작 《산술 연구》를 완성했다.
이 책은 1801년에 출판되어 정수론 분야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현대 정수론의 기초 교재로 여겨진다.
1799
[대수학의 기본 정리 증명]
박사 학위 논문으로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하며 복소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이전 수학자들의 잘못된 증명을 바로잡았다.
1변수의 모든 유리정함수는 1차 또는 2차의 소인수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였다. 장 르 롱 달랑베르를 비롯한 수학자들이 앞서 잘못된 증명을 내놓았는데, 가우스는 이를 비판하며 네 가지 다른 증명들을 내놓았다. 특히 1849년의 마지막 증명은 오늘날에도 엄밀하게 여겨진다.
1801
[사라진 소행성 세레스]
이탈리아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에 의해 소행성 세레스가 발견되었지만, 며칠 후 태양 빛 뒤로 사라져 궤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때 23세의 가우스가 이 문제에 도전하게 된다.
[《산술 연구》 정식 출판]
1798년에 완성했던 그의 대표작 《산술 연구》가 드디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합동 산술과 이차 상호 법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수론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가우스, 사라진 별을 찾다!]
석 달간의 집중적인 계산 끝에 가우스는 사라졌던 소행성 세레스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했고, 그의 예측대로 세레스가 재발견되면서 가우스는 과학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두 달 동안 3도만큼만 따라갈 수 있었고, 이후 태양 빛 뒤로 사라진 세레스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며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07
[천문학과 교수 취임]
괴팅겐 천문학 관측소 박사 겸 괴팅겐 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어 재정적으로 안정된 삶을 시작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연구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809
[천체 운동의 비밀 밝히다]
소행성 세레스 궤도 계산으로 발전시킨 방법을 담은 《천체 운동론》을 출판했다.
이 저서는 천문학적 계산의 초석을 마련하고 최소제곱법을 포함하며,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다.
원뿔 곡선을 따라서 태양을 공전하는 천체 운동론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가우스 인력상수를 제시하고, 측정 오차를 최소화하는 최소제곱법을 포함하여 천문학 계산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개인적인 삶에서는 불행을 겪었다.
첫 번째 부인 요하나 오스토프가 사망했고, 곧이어 어린 아들 루트비히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1810
[두 번째 결혼]
첫 부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미나 발데크와 재혼하여 두 번째 가정을 꾸렸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들과는 학업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1818
[지구를 재다, 회광기 발명]
하노버 주의 측지선을 측량하는 실용적인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거울로 태양광을 반사시켜 먼 거리의 위치를 측정하는 혁신적인 장치인 '회광기'를 발명하며 측지학 발전에 기여했다.
1821
[현대 측지학의 기틀 마련]
하노버 및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 사업 학술 고문으로 위촉되어 곡면론, 등각 사상 이론 등을 연구했다.
그의 이론적 연구들은 오늘날 현대 측지학의 기초가 되었다.
야외에서 측량을 수행하고 감독하며 회광기와 자신의 각 측정 방법을 이용해 관측의 정확성을 높였다. 또한 중력의 방향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곡면인 준위 곡면을 정의하며 퍼텐셜 이론과 관련된 연구를 수행했다.
1828
[곡면의 본질, 가우스 정리]
미분기하학 연구 중 곡률의 중요한 성질을 제시하며 '가우스의 빼어난 정리'를 증명했다.
이 정리는 곡면의 곡률이 면이 3차원 공간에 어떻게 놓여있는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이 정리는 '빼어난 정리'라는 이름처럼 면의 곡률이 측정 각들과 면의 거리에 따라서 완전히 결정지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미분기하학 발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1829
[평행선 공리, 그 너머의 세계]
오랜 기간 평행선 공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모순 없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가능함을 보였으나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졌고, 다른 수학자의 발견을 축하하며 자신의 선행 연구를 언급했다.
가우스는 임의의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에서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을 여러 개 그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도 모순이 없는 기하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학생 보여이 야노시가 쌍곡기하학을 발표하자 가우스는 이 발견이 자신도 수년 전에 생각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1831
[물리학으로 영역 확장]
괴팅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취임하며 물리학 교수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함께 전기 법칙 연구, 지구 자기장 측정 등 다양한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두 번째 부인의 사망]
오랜 질병으로 인해 두 번째 부인 미나 발데크가 사망하며 또 한 번의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이후에는 딸 테레제가 집안일을 돌보며 그의 곁을 지켰다.
1832
[물리학 측정의 혁명]
논문 〈지자기력의 절대적 측정〉을 통해 절대 단위계를 도입하며 물리학에서 정량적인 측정의 새로운 원리를 제시했다.
이는 지구 자기장을 훨씬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가우스의 새로운 관찰 방법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을 이전에 비해서 월등하게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1833
[세계 최초 전자기식 전신기]
물리학 교수 베버와 함께 세계 최초로 실질적으로 사용된 전자기식 전신기를 만들었다.
약 1km에 달하는 선으로 괴팅겐 물리협회와 관측소를 연결하며 통신 기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류가 나침반에 미치는 영향과 유도 전류 발견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전신기는 짧은 메모를 교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과학적 발명을 넘어 실생활에 응용된 최초의 전기적 전신기였다. 이들은 또한 자기 학회를 설립하여 전 세계의 지구 자기장 측정 연구를 지원했다.
1838
[코플리 메달 수상]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인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지구 자기장의 비밀 탐구]
논문 〈지자기의 일반 이론〉을 통해 지구 자기장의 원인이 지구 내부에 있다고 주장하며 지구 자기장 연구에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 이론은 나중에 북극의 오로라에 의한 자기 혼란과 같은 다른 요인들도 고려될 만큼 심도 있는 연구였다.
1839
1855
[수학의 왕자, 영면하다]
독일 괴팅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수학의 왕자'라는 별명에 걸맞은 위대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뇌는 보존되어 연구되었고, 회백질이 많이 발달된 사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괴팅겐의 알바니프리드호프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사위와 가까운 친구가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았다. 뇌 연구 결과는 20세기 초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1881
[가우스의 이름, 단위가 되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 파리 국제 회의에서 센티미터, 그램, 초를 기본 단위로 하는 CGS 단위계가 승인되었다.
자기력 선속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가 사용되며 그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가우스와 베버의 단위 체계는 이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1898
[천재의 숨겨진 기록, 일기 발견]
가우스 사망 후 40여 년이 지난 1898년에 그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이 일기에는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수많은 수학적 발견들이 담겨 있어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796년 3월 30일부터 1814년 7월 9일까지 쓰여진 일기에는 총 146가지 발견에 대한 간단한 증명과 계산 결과, 수학적 정리 등이 포함되어 대수학, 해석학, 정수론 등 그의 위대한 발견들을 추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기 속 "새로운 행복이 솟아나도다!", "게간을 정복하였다!" 등의 표현은 그의 발견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