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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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측천무후
중국 여제, 황후, 통치자 + 카테고리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이자 당 고종의 황후. 공포 정치와 민생 안정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음. 뛰어난 정치 역량으로 과거제 개편 인재 등용 불교 중흥 등 혁신적인 통치 펼침. 장안을 100만 인구의 국제도시로 발전시켜 당 현종 시기 전성기의 기반 마련. 논란과 업적 속에서 약 반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한 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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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624

[측천무후의 탄생]

미랑이라는 아명으로 태어난 측천무후는 수나라 말기 목재상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 무사확과 명문가 출신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나라 건국에 기여하여 높은 작위를 받았지만, 당시 그녀의 출생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태어난 연도는 624년 2월 17일(음력 1월 23일)로 알려져 있으나, 일부에서는 630년생 설도 제기된다. 그녀의 본명은 무조, 아명은 무미랑이었다.

635

[아버지 무사확 사망]

측천무후의 아버지 무사확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측천무후와 어머니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으며, 이는 훗날 그녀가 궁에 입성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637

[궁녀 무미랑, 당 태종의 후궁이 되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무미'라는 칭호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이라 불렀다.

비록 낮은 지위의 재인으로 시작하여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그녀의 빼어난 용모와 담대한 기개는 태종의 주목을 받았다.

태종이 성질 사나운 말을 다루는 법을 묻자, 그녀는 철편, 철추, 비수로 제압하겠다는 기발한 답변으로 태종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649

[태종의 죽음과 감업사 출가]

당 태종 이세민이 사망하자,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先帝)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천조'라는 법명으로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그녀의 궁중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된다.

650

[고종과의 재회와 재입궁]

감업사에 분향하러 온 당 고종 이치와 재회했다.

태자 시절부터 무조에게 반했던 고종은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후 왕씨는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무조의 재입궁을 도왔으며, 무조는 왕황후에게 순종하며 신임을 얻었다.

무조는 고종에게 몰래 ‘여의낭’이라는 시를 지어 보낼 정도로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 왕황후는 무조를 이치와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이용하려 했으나, 이는 후에 그녀의 몰락을 초래한다.

652

[첫 아들 이홍의 탄생]

고종과의 사이에서 첫 아들 이홍을 출산했다.

이로써 그녀는 궁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녀는 왕황후와 결탁하여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654

[안정공주 사망 사건]

첫 딸 안정공주를 낳았으나, 공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측천무후는 왕황후의 소행이라 주장하여, 이 사건은 왕황후 폐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각에서는 측천무후가 직접 딸을 교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그녀의 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공주 사망에 대해 측천무후가 왕황후를 모함했다는 설과, 실제로 왕황후의 소행이었다는 설이 상반되게 존재한다. 이 사건은 측천무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655

[황후 즉위와 정적 숙청]

안정공주 사망 사건을 계기로 황후 왕씨가 폐서인되고, 무조가 당 고종의 황후로 즉위했다.

황후가 된 그녀는 왕씨와 소숙비를 곤장으로 때리고 팔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이는 잔혹한 방식으로 복수했다.

이는 그녀의 권력에 대한 강한 욕망과 냉혹한 성품을 여실히 보여준다.

656

[황태자 이충 폐위, 이홍 즉위]

황후 무씨는 황태자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워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황실 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664

[폐황태자 이충의 죽음]

앞서 폐위되어 귀양 보내졌던 황태자 이충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는 측천무후의 전횡을 보다 못한 대신들이 처형당한 사건과 맞물려, 그녀의 반대파 숙청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665

[태평공주의 탄생]

측천무후의 막내딸이자 후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태평공주가 태어났다.

측천무후는 태평공주를 매우 사랑했으나, 동시에 엄격한 교육을 통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쳤다.

675

[황태자 이홍의 의문사]

총명하고 겸손하여 고종과 대신들의 신임이 두터웠던 황태자 이홍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종이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할 때 발생한 이 죽음은 측천무후가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하여 독살했다는 설과, 과로사했다는 설이 엇갈려 논란이 되었다.

680

[황태자 이현의 폐위와 유배]

명숭엄의 예언과 이현의 비행을 빌미로, 측천무후는 차남 이현을 황태자 자리에서 폐출시키고 파주로 유배 보냈다.

이는 그녀의 자식에 대한 비정한 태도와 황권을 향한 집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었다.

683

[고종 사망과 권력 장악]

당 고종 이치가 사망하고 삼남 이현(중종)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무씨는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한다는 이유로 중종을 폐위시키고 막내아들 이단(예종)을 황제에 올렸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직접 정사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684

[폐황태자 이현의 비극적 죽음과 반란 진압]

파주로 유배되었던 폐황태자 이현이 자살(혹은 살해)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 해 9월, 양주에서 서경업이 무씨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측천무후는 이를 40일 만에 진압하며 강력한 통치력을 과시했다.

조카 무승사의 '성모임인 영창제업' 글귀를 통해 연호를 '영창'으로 개칭하며 여제 즉위의 명분을 강화했다.

690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 무측천의 탄생]

마침내 무씨는 국호를 '주'로 고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스스로 '측천무후'라 칭했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혹리를 동원해 당 황조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하며 잔혹하게 권력을 공고히 했으나, 동시에 유능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왕조를 '무주(武周)'라 부르며, 그녀의 15년간 통치를 '무주의 치'라 칭하기도 한다.

699

[폐위된 중종의 태자 복권]

만년에 이르러 황위 계승 문제로 고심하던 측천무후는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의 반감을 의식하여, 과거 폐위시켰던 삼남 이현(중종)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는 그녀가 무씨 황조 계승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705

[당 황조 복원과 태상황 등극]

병환으로 약해진 측천무후는 재상 장간지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 황조의 복원을 승낙했다.

이로써 15년간 지속된 무주 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측천무후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중국 유일의 여제, 측천무후의 서거]

82세의 나이로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 중종과 예종, 태평공주를 불러 무씨 일가를 부탁하고,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억울하게 죽었던 폐황후 왕씨 일가의 사면 복권을 간청하며, 자신의 묘비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했다.

그녀의 치세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훗날 당 현종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사후 당나라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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