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가와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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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츠가와 마사히코는 일본 영화계의 뼈대 있는 명문 '마키노가(家)'에서 태어나 1945년 아역으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56년 영화 '미친 과실'로 본격 데뷔하며 단숨에 화려한 청춘스타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때 흥행 부진과 스캔들로 인해 위기를 겪었으나, 특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필살 시리즈'의 악역으로 재기에 성공하며 연기파 배우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이후 중년의 농염한 매력을 발산하며 이타미 주조, 와타나베 준이치 등의 굵직한 작품에서 맹활약,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남우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며 일본의 국민 명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배우뿐만 아니라 장난감 가게 경영, 연예 기획사 설립 등 다방면에서 사업가적 수완을 보였으며, 66세의 늦은 나이에 '마키노 마사히코'라는 이름으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2018년,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아사오카 유키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 일 만에 타계하며 일본 대중문화계에 큰 슬픔과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연표
1945
[영화 아역 데뷔]
부모님의 큰 기대 속에서 다이에이(大映) 영화 '여우가 준 아기(狐の呉れた赤ん坊)'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습니다.당시 본명인 가토 마사히코(아역 예명 사와무라 마사히코)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연예계를 대표하는 명문가 마키노 일가의 일원으로서 일찍부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이후 친형인 나가토 히로유키와 마찬가지로 여러 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여 탄탄한 연기 감각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6
[본격적인 은막 데뷔 및 예명 명명]
이시하라 신타로의 강력한 추천으로 닛카쓰 영화 '미친 과실(狂った果実)'에 캐스팅되며 16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배우 데뷔를 완수했습니다.당시 신문기자를 꿈꾸며 와세다대학 고등학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에 출연했으나, 영화의 대히트와 함께 단숨에 최고의 청춘스타로 급부상했습니다. 원작자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자신의 소설 등장인물 이름에서 따와 직접 '츠가와 마사히코'라는 예명을 지어주었습니다.
1958
[단기 유학과 쇼치쿠 이적]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넓은 견문을 쌓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단기 유학을 다녀왔으며, 소속사를 닛카쓰에서 쇼치쿠로 이적했습니다.젊은 시절 한층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자 과감하게 미국행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쇼치쿠로 이적한 뒤에는 기대만큼의 큰 흥행작을 만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데뷔 초기의 폭발적이었던 인기가 점차 하락하는 뼈아픈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64
[쇼치쿠 퇴사 및 프리랜서 전향]
쇼치쿠 이적 후 지속된 인기 부진으로 인해 결국 회사 측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통보받고 굴욕적인 퇴사를 겪게 되었습니다.소속사 없이 프리랜서로 전향한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영화 중심 활동에서 벗어나 TV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로 활동 영역을 넓히려 시도했습니다. 톱스타에서 계약 해지를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했으나, 이를 통해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넓은 시야를 갖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66
[연예 기획사 설립 참여]
와타나베 미사와 와타나베 프로덕션이 함께 설립한 배우 전문 연예 기획사인 '프로덕션 미치(길)'의 설립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배우로서의 연기 활동에만 만족하지 않고, 매니지먼트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구조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훗날 그가 스스로 연예 기획사를 창립하고 경영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는 밑거름이 된 매우 의미 있는 비즈니스 경험이었습니다.
1969
[불륜 소동 및 슬럼프]
데비 수카르노 부인과의 불륜 소동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대중과 세간의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이 치명적인 스캔들로 인해 대중의 차가운 외면을 받으며 방송 출연 섭외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배우로서 심각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데뷔 시절부터 유지해 오던 화려하고 반듯한 미남 스타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타격을 입고 한동안 어두운 침체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1972
['필살 시리즈' 악역으로 연기 재기]
인기 TV 시대극 '필살 시리즈'에 악역으로 전격 기용되어 강렬하고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배우로서 완벽하게 부활했습니다.당시 연출가였던 마츠모토 아키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니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악역을 해라"라는 독설 섞인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습니다. 과거의 미남 스타라는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비열한 악역 연기에 맹렬히 매진한 결과, 새로운 개성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며 제2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열었습니다.
1973
[여배우 아사오카 유키지와 결혼]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의 명배우이자 대중의 큰 사랑을 받던 여배우 아사오카 유키지에게 열렬한 구애를 펼친 끝에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당대 최고 스타들의 결합은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며, 츠가와 마사히코의 인생에서 가장 든든하고 중요한 동반자를 맞이한 순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훗날 수많은 방송과 매체에서 서로를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며 연예계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평생을 아름답게 동행하게 됩니다.
1974
[장녀 유괴 사건 발생]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부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 딸이 유괴당하는 끔찍한 범죄 피해를 겪으며 큰 충격과 고통에 빠졌습니다.일본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큰 공분을 샀던 이른바 '츠가와 마사히코 장녀 유괴 사건'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범인은 곧바로 체포되고 딸도 안전하게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은 부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아찔한 기억이자 당시 언론의 과도하고 무분별한 취재 경쟁의 폐해를 되돌아보게 만든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1978
[장난감 판매 회사 '그랑파파' 창업]
왕성한 배우 활동과 병행하여 고급 목재 장난감 등을 수입 및 판매하는 회사 '그랑파파(Granpapa)'를 직접 설립하고 도쿄 아오야마 트윈 타워에 화려하게 1호점을 개업했습니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향한 깊은 부성애와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훌륭한 장난감을 주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한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그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닌 섬세한 미적 감각을 지닌 경영자이자 성공적인 사업가로서의 남다른 수완을 대중에게 증명하게 됩니다.
1981
[연예 기획사 '그랑파파 프로덕션' 설립]
자신의 성공적인 장난감 사업체 이름을 그대로 딴 연예 기획사 '그랑파파 프로덕션'을 공식 설립하고 초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본인의 체계적인 매니지먼트는 물론, 재능 있는 다른 동료 배우들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연예계 내에서 한 명의 배우를 넘어서는 영향력 있는 프로모터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큰 기여를 시작했습니다.
1982
[블루리본상 조연남우상 수상]
히가시 요이치 감독의 영화 '마논(マノン)'에서 보여준 묵직하고 인상적인 연기로 제24회 블루리본상 조연남우상을 거머쥐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나이가 들며 체형이 넉넉하게 변해가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소화해내 중년 남성 연기가 만개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이 값진 수상을 계기로 호색한 중년이나 코미디 연기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완벽히 구축하며 일본 영화계의 씬스틸러로 우뚝 섰습니다.
1985
['한 조각의 눈' 출연 및 단골 배우 활약]
1985년 개봉한 관능적인 멜로 영화 '한 조각의 눈(ひとひらの雪)'을 필두로, 베스트셀러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여러 영화화 작품에 핵심 멤버로 다수 출연하게 되었습니다.농익은 중년의 짙은 매력과 깊은 내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원작자와 관객 모두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훗날 그는 각본가 제임스 미키, 원작자 와타나베 준이치, 그리고 이타미 주조 감독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지금의 자신을 완성해준 '삼종신기'와 같은 은인이라고 칭하며 무한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1987
['마루사의 여자' 출연]
일본 영화계를 뒤흔든 이타미 주조 감독의 대히트 영화 '마루사의 여자(マルサの女)'에 출연하여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호치 영화상 조연남우상 등을 휩쓸었습니다.이후 이타미 주조 감독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단골 페르소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마스터피스였습니다. 치밀하고 지능적인 탈세자 역할을 맡아 조사관과의 팽팽한 대결 속에서 코미컬하면서도 진지한 이면의 연기를 완벽히 소화하여 자신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했습니다.
1988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남우상 수상]
전년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루사의 여자' 및 '야기샤(夜汽車)' 등의 작품에서 보여준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아 제11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남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연기상을 거머쥠으로써 그의 파란만장한 연기 경력에 가장 화려한 금자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과거 밑바닥 악역으로 재기해야 했던 그가 이제는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존경받는 최정상급 명배우로 완벽히 인정받았음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93
['묵동기담' 주연 및 마키노 명의 사용 허락 획득]
영화 '묵동기담(濹東綺譚)'의 단독 주연을 맡아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주연남우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병상에 있던 큰아버지 마키노 마사히로에게 영화 감독으로서 '마키노' 성을 쓰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았습니다.실존했던 탐미주의 명작가 나가이 카후 역을 혼신을 다해 훌륭히 연기하며 배우로서의 또 다른 예술적 정점을 찍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오랜 숙원이던 영화 감독 데뷔 제안이 조심스럽게 들어오자, 가문의 자랑스러운 성씨인 '마키노'를 이어받아 예명 '마키노 마사히코'를 쓰기로 결정하고 핏줄의 정통성을 엄숙히 물려받았습니다.
1999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 도조 히데키 역 열연]
역사 영화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에서 태평양 전쟁의 핵심 전범인 도조 히데키 역을 맡아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력을 보여주며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주연남우상을 또다시 거머쥐었습니다.역사적으로 매우 민감하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실존 인물을 섬세하고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외모부터 특유의 말투까지 완벽한 고증과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이 묵직한 작품을 통해 그는 단순히 개성 강한 조연을 넘어 웅장한 시대극 전체를 흔들림 없이 이끌어갈 수 있는 대체 불가한 무게감을 대중에게 각인시켰습니다.
2000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
NHK의 초대형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葵 徳川三代)'에서 극을 이끄는 중심인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을 훌륭히 소화하며 안방극장의 압도적인 호평을 이끌어냈습니다.일본 시대극 역사상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삼영걸을 모두 연기해 본 진기한 기록을 가진 그는, 유독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 역할을 완벽하게 체화해 자주 맡았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노련함과 폭발적인 카리스마로 그만의 독창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캐릭터를 완성하며 국민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2006
[영화 감독 데뷔 및 자수포장 수훈]
'마키노 마사히코'라는 영광스러운 가문의 이름으로 첫 영화 감독 데뷔작 '자지 않는 밤(寝ずの番)'을 성공적으로 개봉했으며, 같은 해 예술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탁월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紫綬褒章)을 받았습니다.6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끝내 가문의 위대한 전통인 영화 감독의 길을 열어젖히며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나카지마 라모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데뷔 영화는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아 신도 카네토상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배우와 감독 양쪽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루고 국가로부터 그 거대한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일생일대의 뜻깊은 해입니다.
2009
[폐기흉 발병 및 기적적인 복귀]
갑작스러운 폐기흉으로 쓰러져 건강에 매우 심각한 적신호가 켜졌으나, 연기를 향한 강인한 의지로 혹독한 치료에 전념하여 2월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춰 기적적으로 현장에 복귀했습니다.고령의 나이에 접어들며 체력적인 한계와 예기치 못한 질병이라는 가혹한 시련이 찾아왔으나, 관객과 작품을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산소호흡기를 떼고서라도 무대 인사와 빡빡한 홍보 일정에 참여하며 팬들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베테랑다운 프로의식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2014
[욱일소수장 수훈]
반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영화와 방송계에 헌신하고 대중문화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한 거대한 공적을 높이 평가받아 봄 서훈에서 영예로운 욱일소수장(旭日小綬章)을 수훈했습니다.2006년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자수포장 수훈에 이은 또 한 번의 엄청난 국가적 영예로, 그가 일본 연예계 역사에서 차지하는 거장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한번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스크린에 바친 원로 배우로서의 묵직한 품격을 만천하에 빛냈습니다.
2018
[부인 아사오카 유키지와 사별]
무려 45년간 잉꼬부부이자 인생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로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사랑하는 아내 아사오카 유키지가 세상을 먼저 떠나며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수년간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이던 아내를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지극정성 돌보았으나, 결국 가슴 아픈 사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연예계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수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만큼,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깊은 상실감은 대중들에게 큰 눈물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
아내의 별세와 관련하여 슬픔을 누르고 기자회견을 열어 대중 앞에 섰으며,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가 언론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되었습니다.전년도 가을에 심하게 앓았던 폐렴의 여파로 코에 투명한 산소 흡입기 튜브를 낀 매우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비통한 심경을 취재진 앞에서 담담하고 진솔하게 밝혔습니다. 아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정과 대중을 향한 책임감을 끝까지 잃지 않은 숙연하고 뭉클한 자리였습니다.
[부부 합동 이별의 회 개최]
도쿄 아오야마 장의소에서 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아사오카 유키지와 함께 두 사람을 기리는 합동 '이별의 회'가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수많은 영화계, 방송계의 동료 선후배 배우들과 팬들이 구름처럼 참석하여 일본 대중문화를 화려하게 이끌었던 두 거성 부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배웅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의 화려하고 깊이 있었던 필모그래피와 생전의 따뜻하고 호탕했던 인품이 다시 한번 널리 회자되며 짙은 그리움을 남겼습니다.
[타계]
오후 5시 45분, 심부전으로 인해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눈부시게 파란만장했던 배우로서의 생을 마감했습니다.가장 사랑했던 아내 아사오카 유키지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백여 일 만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의 곁으로 홀연히 떠났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마지막 방송 인터뷰에서 "언제 죽어도 좋다. 살아있는 동안 힘껏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담담히 말했던 그의 별세 소식에 일본 전역의 영화 팬들과 동료들이 깊은 애도의 물결을 이뤘으며, 사후 국가로부터 종오위(従五位)에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