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 (정치인)
연표
1935
[울산에서 출생]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서 8·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35년 10월 15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대한민국 제8, 9, 10, 13,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54
1954년 부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동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58년에 졸업했다.
1958
1954년 부산공고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58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
[제8대 국회의원 당선]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47,046표(47.80%)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그는 국회에 처음 입성하게 되었다.
1973
[제9대 국회의원 당선]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동래군 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동래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50,395표(37.27%)를 얻어 2위로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했다.
1978
[제10대 국회의원 당선]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경남 울산시·울주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62,237표(30.88%)를 얻어 2위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0
[신군부 탄압과 고문]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의원직을 상실하고 군 보안사령부에 여러 차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군 보안사령부에 여러 차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심각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정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1981
[민주산악회 가입]
신군부의 정치규제에 묶여 활동하지 못하던 중 김영삼이 설립한 민주산악회에 가입하여 민주화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1980년 신군부의 정치규제에 묶여 정치 활동에 제약을 받던 중, 1981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설립한 민주산악회에 가입하여 다시금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다.
1985
[민주화추진협의회 간사장 활동]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하여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간사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85년 김영삼과 김대중 두 거물 정치인이 연합하여 창설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간사장직을 맡아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는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88
[정치 복귀와 원내총무 역임]
6.10 민주항쟁 이후 정치규제에서 풀려나 제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동래구 을에 당선되었고,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맡아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전되고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래구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또한, 통일민주당의 원내총무를 맡아 당의 주요 정책과 의정 활동을 이끌었다.
1990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합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인에 의한 3당 합당 이후, 통일민주당에서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며 새로운 정치적 전환점을 맞았다.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이에 합류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1991
1991년 7월 18일, 제13대 정무제1장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국무위원으로서 주요 현안을 조율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역할을 맡았다.
1992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부산 동래구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65,708표(55.04%)를 얻어 1위로 당선되며 5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1년 7월 18일부터 수행했던 제13대 정무제1장관 직에서 1992년 5월 24일 물러났다.
1993
[김영삼 정부 요직 역임 (사무총장 및 내무부 장관)]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맡아 "변화와 개혁"을 주창하며 재산공개 등을 주도했고, 이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동시에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변화와 개혁"을 주창하며 당내 재산공개 등을 주도했다. 이후 차남 부정입학 의혹으로 잠시 물러났다가 같은 해 12월 21일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하여 도농통합시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하는 등 김영삼 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93년 4월 13일, 차남인 최제완씨의 경원대학교 부정입학 의혹이 불거지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한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
1994
[내무부 장관 자진 사퇴]
부천세무서 탈세사건 처리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1년여 만에 내무부 장관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1994년 10월 발생한 부천세무서 탈세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1994년 12월 23일 취임 1년여 만에 내무부 장관직에서 자진 사퇴하며 다시 공직에서 물러났다.
1996
[6선 국회의원 당선과 신한국당 상임고문]
제15대 총선에서 부산 연제구에 당선되며 6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후 신한국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96년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연제구 지역구로 출마하여 61,964표(60.76%)를 얻어 1위로 당선되며 6선 국회의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 신한국당의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어 당의 원로로서 활동했다.
1997
[뇌졸중으로 정계 사실상 은퇴]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중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1997년 3월 11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시점에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사실상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정계에서 물러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2000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건강 문제로 인해 활동이 어려워졌으며, 2000년 5월 29일을 기하여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오랜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