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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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야구 선수, 투수, 스포츠인 + 카테고리

- KBO 리그 초창기를 압도한 무쇠팔 전설의 투수. - 1984년 한국시리즈 4승 팀 우승을 이끈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 - 선수협 결성을 주도하며 동료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한 진정한 리더. - 롯데 자이언츠 최초 영구 결번(11번)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야구인.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58

[전설의 시작, 최동원 출생]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산으로 이사하여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최동원은 1958년 5월 24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에서 태어났으나, 초등학교 입학 전 부산으로 이사하여 구덕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치며 야구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1976

[고교 야구 전설의 탄생, 청룡기 우승]

경남고 3학년 시절,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김성한의 군산상고를 상대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고교 시절 그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경남고 2학년 때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3학년 때는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 승자 결정전에서 김성한의 군산상업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두어 경남고의 첫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77

[국제 무대에서 빛난 활약, 인터콘티넨털컵 금메달]

연세대학교 재학 중, 제3회 니카라과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최동원이 세계적인 수준의 투수임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동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77학번)에 입학한 후, 1977년 제3회 니카라과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외에도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동메달,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은메달 등 아마추어 시절 다수의 국제대회에서 활약했습니다.

1979

[선배 박철순에게 구타당하며 허리 부상]

연세대 재학 시절 선배 박철순에게 구타당한 사실을 언론에 제보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구타로 인한 허리 부상은 최동원을 은퇴할 때까지 괴롭히게 되었으며, 그의 선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철순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연세대 재학 중 동국대와의 경기 직후 선배 박철순에게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해 허리를 크게 다쳤고, 이를 언론에 제보하며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바지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음에도 박철순은 후배가 건방져서 때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부상은 최동원에게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됩니다.

1981

[실업야구 MVP 석권하며 압도적 활약]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하여 전기리그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신인왕, 다승왕, MVP를 수상하며 실업야구 무대를 평정했습니다.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한 최동원은 팀을 전기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실업리그에서 신인왕, 다승왕, MVP를 휩쓸며 당대 최고의 아마추어 투수임을 증명했습니다. 전기·후기리그 30경기 205.2이닝 17승 4패, 코리언시리즈 6경기 42.1이닝 2승 1패를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

캐나다 인터콘티넨털컵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받은 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5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계약이었으나, 국내 프로야구 출범 등의 이유로 실제 메이저리그 진출은 무산되었습니다.

1981년 9월 15일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받은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팀과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서 시작하는 조항이 포함된 5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같은 달 28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계약 승인까지 받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와 새로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의 상황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 대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1983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 입단]

메이저리그 계약을 포기하고 새로 출범한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야구 시대의 서막을 함께 열었습니다. 그의 합류는 롯데 팬들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습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계약이 불발된 후, 최동원은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1983년 4월 3일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며 KBO 리그에 데뷔했습니다.

1984

[한국시리즈 4승 신화와 롯데의 첫 우승 주역]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두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며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 해 KBO MVP, 다승왕, 탈삼진왕, 골든글러브를 석권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상징적인 투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84년, 최동원은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들을 세웠습니다. 51경기에 출전해 14차례 완투하며 27승(9선발승, 6세이브, 13패)과 223탈삼진,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과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했습니다. 특히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1패 포함)을 따내 팀의 창단 첫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한 선수가 4승을 모두 거둔 유일한 기록이며, 최다 이닝, 최다 승리, 최다 완투 등 8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포스트시즌을 포함해 56경기 324.2이닝, 31승, 6세이브, 18완투, 258탈삼진을 기록하며 '무쇠팔'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1985

[KBO 최초 통산 400, 500 탈삼진 달성]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400탈삼진과 5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그의 꾸준한 활약과 압도적인 탈삼진 능력을 증명하는 기록입니다.

1985년에 최동원은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400탈삼진과 500탈삼진을 달성하며 새로운 기록들을 써내려갔습니다. 그는 또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규정이닝의 2배 이상 투구, 14회 이상 완투, 전 구단 상대 완투, 2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경이로운 연투 능력과 이닝 이터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86

[KBO 최초 통산 600, 700 탈삼진 달성]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600탈삼진과 700탈삼진을 달성하며 자신의 기록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1986년에 최동원은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600탈삼진과 700탈삼진을 기록하며 전설적인 투수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선동열과 더불어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1987

[KBO 최초 통산 800, 900 탈삼진 달성 및 탈삼진왕]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800탈삼진과 900탈삼진을 달성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이 해 탈삼진왕을 다시 차지하며 리그 최고의 탈삼진 투수임을 증명했습니다.

1987년에도 최동원은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800탈삼진과 900탈삼진을 달성하며 자신의 위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또한 이 해 탈삼진왕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며 리그 최고의 탈삼진 투수로서의 명성을 재확인했습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1988

[선수 복지 개선을 위해 선수협 결성 주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동료 김대현 선수를 보며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전 유성호텔에서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전격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이는 선수들의 권익을 위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88년 9월 13일, 최동원은 대전 유성호텔에서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나 욕심이 아닌,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그의 선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선수협 파동의 여파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선수협 파동의 여파로 롯데 자이언츠에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는 롯데 유니폼 외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나, 구단의 결정에 따라 팀을 떠나게 됩니다.

1988년 9월 선수협 결성 주도의 여파로 같은 해 11월, 최동원은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등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되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큰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트레이드에 반발하여 1989년 후반에야 팀에 합류했습니다. 또한 이 해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15완봉을 달성했습니다.

1990

[KBO 최초 통산 100승-1000탈삼진 달성 및 현역 은퇴]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1000탈삼진과 100승-1000탈삼진을 달성한 후, 32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이어진 혹사가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1990년, 최동원은 KBO 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1000탈삼진과 통산 100승-10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1990년 10월 24일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 구원 등판을 마지막으로 그 해 시즌을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무리한 등판으로 인한 혹사가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은퇴 후에도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또한 통산 70완투, 80완투도 역대 최초로 달성했습니다.

1991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시 광역의원 출마]

민자당의 공천을 거부하고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시 서구 광역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야구 외적인 분야에서도 사회에 기여하려는 그의 열정이 돋보인 순간이었습니다.

1991년 최동원은 민자당의 공천을 뿌리치고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시 서구의 광역의원에 출마했습니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아쉽게 낙선했습니다. 이는 야구선수 은퇴 후 정치인으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시기에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2001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첫 발]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성적 부진과 팀 개편 등으로 인해 그 해 말 팀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에도 야구 해설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99년부터 다시 야구 현장 복귀를 모색하던 최동원은 2001년 이광환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자 한화 이글스의 1군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7월에 2군 투수 코치로 보직을 맞바꿨고, 그 해 준플레이오프 패퇴에 따른 문책성 해고에 맞춰 같은 해 말 팀을 떠났습니다. 이후 2003년 KBS N SPORTS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 2005년 다시 한화 이글스 코치로 복귀했고,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맡으며 류현진 등 유망주들을 가르쳤습니다.

2003

[아버지 최윤식 씨 별세]

야구선수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지원해준 아버지 최윤식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동원은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늘 바랐다고 회고했습니다.

최동원은 한국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 최윤식 씨의 아낌없는 지원 속에 야구선수의 길을 걸었습니다. 구단과의 갈등 과정에서 일부 언론의 비난을 받았던 아버지를 보며 최동원은 항상 섭섭한 마음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바랐습니다. 최윤식 씨는 200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

[대장암 초기 진단]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중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후 투병 생활을 시작하게 되며 공식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최동원은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유망주들을 가르치던 2007년,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2008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2009년 KBO 경기감독위원으로 활동했지만 2010년부터는 병세가 더욱 나빠져 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에 들어갔습니다.

2011

[건강 악화로 레전드 매치 불참]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참석했으나, 대장암 투병으로 인해 건강상의 이유로 경기에 뛰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지켜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석했으나, 이미 병세가 깊어진 상태여서 경기에 직접 뛰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의 야윈 모습은 많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허구연 해설위원은 그의 복수를 알고 걱정했지만 최동원은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야구 영웅 최동원, 영원한 이별]

지병인 대장암이 악화되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은 대한민국 야구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등번호 11번은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2011년 9월 14일, 최동원은 지병인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의 나이로 경기도 고양시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수 은퇴 후 모습과 달리 죽기 직전엔 얼굴에 살이 없고 복수(배에 물이 차는 현상)로 인해 배가 나와 있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의 사망 16일 후인 9월 30일, 롯데 자이언츠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고 사직야구장에서 엄숙하게 영구 결번식을 거행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또한, 같은 해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기의 맞대결을 다룬 영화 '퍼펙트 게임'이 개봉하며 그의 삶을 다시 조명했습니다.

2012

2012.2.4 사후 1년

[문재인 변호사, 최동원 선수협 법률 자문 사실 공개]

과거 최동원 선수가 주도했던 선수협 결성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법률 자문을 맡았던 사실이 트위터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는 최동원의 선수협 활동이 단순한 개인적 욕심이 아니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2012년 2월 4일, 문재인 변호사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과거 최동원 선수의 선수협 결성 시 법률 자문을 맡았던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최동원의 선수협 활동이 단순히 개인의 명예나 금전적 욕심이 아닌, 선수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을 위한 선각자적 움직임이었음을 다시금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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