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조선)
연표
1831
[철종 탄생]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 사제에서 전계대원군 이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이원범이다.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음력 6월 17일(양력 7월 13일) 한성부 향교동 경행방 사제에서 셋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범이었으며, 변이라는 이름은 그가 왕위에 즉위한 후에 개명한 것이다.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의 서자인 전계대원군 이광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로 부친의 첩실이었다.
1836
[강화도 유배생활 시작]
남응중 역모사건으로 인해 철종(원범) 일족이 강화도로 유배당하며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게 된다.
1836년(헌종 2) 남응중 역모사건으로 인해 철종(원범) 일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이로 인해 철종의 가족들은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되었고, 농사를 짓고 살면서 '강화도령'이라 조롱받기도 했다.
1844
[이복형 이원경 옥사 및 유배]
철종의 이복형 이원경이 민진용 역모사건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사사되면서 철종 일가는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로 옮겨지게 된다.
1844년(헌종 10) 철종(원범)의 이복형 이원경이 '민진용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어 사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일로 인해 아버지 이광을 포함한 철종 일가는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이후에도 철종의 가족들은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1849
[조선 제25대 국왕으로 즉위]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한 헌종의 뒤를 이어,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창덕궁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1849년(헌종 15년) 음력 6월 9일(양력 7월 16일)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강화도를 방문한 신하들을 따라 입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창덕궁의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1851
[철인왕후 책봉 및 안동 김씨 세도정치 강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섭정 아래에서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이하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더욱 심화되었다.
철종은 5촌 당숙인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세 임금의 중전이 안동 김씨 가문에서 나오게 되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1852
[친정 시작과 세도정치 지속]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안동 김씨 세력에게 실권이 있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도 역시 실권은 안동 김씨세력들에게 있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사는 세도가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1853
[강화도 잠저 용흥궁 중건]
강화도에 있었던 철종의 잠저가 강화유수 정기세에 의해 기와집으로 중건되었으며 '용흥궁'이라 명명되었다.
강화도로 이주한 철종 가족이 살았던 잠저는 현재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에 있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1854
[제주도 과거시험 합격자 처우 개선]
제주도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육지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합격증서, 교지, 어사화를 받을 수 있도록 승정원 관리가 파견되는 조치를 취했다.
1854년 철종 5년에는 제주도의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육지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받을 수 있도록, 승정원의 관리가 제주도로 파견되어 합격증서, 교지, 어사화를 지급하게도 한다.
1857
[양아버지 순조의 묘호 개칭]
지돈녕 이학수, 영중추부사 정원용 등의 건의에 따라 양아버지 순조의 묘호를 '종'에서 '조'로 바꾸어 '순조'로 개칭되었다.
1857년(철종 8년) 8월 10일 지돈녕 이학수, 영중추부사 정원용 등의 건의에 따라 양아버지 순조를 순종(純宗)에서 '이단을 배척하여 서학(천주교)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서란(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순조(純祖)로 개칭되었다.
1858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 탄생]
철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으나 다음 해 사망했다. 후궁들의 아들들도 영아기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1858년 철인왕후와의 사이에서 그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만에 사망하였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하였다.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1859
[적극적인 국정 참여 시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정치가 강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도 역시 실권은 안동 김씨세력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0
[동학 창시 및 탄압]
경주 지방의 잔반 최제우가 신흥 종교인 동학을 창시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고,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를 처형했다.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1861
[궁궐 숙위 강화 시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했으나, 안동 김씨 세력의 견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세력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1862
[임술 농민 봉기 발생]
삼정의 문란과 민중 생활의 피폐로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 항쟁인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조선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삼정이정청 설치 및 삼정 개혁 시도]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후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공포했으며,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했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이때 발표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이나 방결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제주민란 발생]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강제검과 김흥채 등을 중심으로 제주도에서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여 제주관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1862년 9월 진주민란의 자극을 받아 제주도에서 서광리 사람 강제검과 제주 제주목 사람 김흥채 등을 중심으로 민란이 발생했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거병, 민란을 일으켜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에는 제주관아를 점령하여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다.
1863
제주관아를 점령했던 봉기는 1863년 1월에 진압되고 제주민란의 주동자인 강제검, 김흥채는 체포후 압송되어 처형된다.
1864
[철종 승하]
재위 14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후사가 없어 신정왕후와 대신들이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정했다.
1864년 1월 4일(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급히 신정왕후(익종비)와 대신들이 모여 후계자를 정했는데, 후사는 족보상 7촌 조카뻘이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 (훗날의 대한제국 고종)이 낙점, 계승하였다. 철종의 죽음으로 조선 효종의 실제 직계 남자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1908
[철종 장황제로 추존]
대한제국 수립 이후 순종 황제에 의해 철종이 사후 '장황제(章皇帝)'로 추존되며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의 정식 시호를 받았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1899년(광무 3년), 고종은 개국 시조인 태조와 자신의 4대 조상인 장종(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효명세자)을 소급하여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후 1908년(융희 2년), 순종은 정조의 양부인 진종과, 고종의 양형 헌종과 양숙부인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철종은 사후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