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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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가, 수필가, 교수 서양화가

천경자는 파격적인 삶과 독보적인 예술 세계로 한국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꽃과 영혼의 화가입니다. 유년 시절의 유복함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국적인 풍경과 우수에 찬 여인들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미인도 위작 논란과 사망 시기 논란 등 격랑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경매 시장 최고가를 기록하며 대중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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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4

[화가의 탄생, 천옥자]

전라남도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옥자’라는 이름으로 자랐고, 일찍이 그림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심청전', '춘향전' 등 고전 이야기를 들으며 풍부한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박운아 여사를 남장시켜 서당에 보낼 정도로 깨어있는 분이었고, 큰 손녀 옥자를 금지옥엽 예뻐했습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 선생이 그림 소질을 발견했습니다.

1940

[도쿄 유학, '천경자'로 개명]

17세, 시집가기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까지 했던 그녀는 여수항을 떠나 도쿄 유학길에 오릅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며 본명 '옥자' 대신 '경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고, 곱고 섬세한 일본화 고등과에서 사생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습니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시절,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하기도 했습니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를 택했습니다.

1943

[외조부모 그림, 재능 인정]

일본 유학 중,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老婦)'가 수석 입상하며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습니다.

앞서 1942년에는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됩니다.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입선했으며,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입니다.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수석 입상 작품 '노부'가 입선했습니다.

1944

[첫 결혼과 이별, 홀어머니]

도쿄 유학 중 만난 명문대 중퇴생 이철식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1945년 첫 딸 이혜선을, 1946년 아들 이남훈을 낳으며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 이철식이 젊은 나이에 장결핵증으로 요절하면서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났습니다.

2차 대전 여파로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던 길에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이철식과 1944년 결혼했습니다. 1946년 8월 이후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해 10월 중순 이철식이 요절했습니다. 두 살배기 딸과 첫돌도 안 된 아들을 홀로 키우게 됩니다.

1948

[두 번째 사랑, 고통과 번뇌]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부남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는 등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천경자는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와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여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는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전라남도 목포 모 신문 전직 사회부 기자 출신 김남중에게 빠졌습니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라고 당시 심경을 기록했습니다. 이 관계에서 1남 1녀를 더 낳아 총 2남 2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1953

['생태' 발표, 화단 주목]

전쟁과 개인적인 비극으로 인한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35마리의 뱀으로 화폭을 가득 채운 충격적인 그림 '생태'를 발표했습니다.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한국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천경자만의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여동생이 6.25 전쟁 직후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생태'를 그렸습니다.

1954

[홍익대 교수로 활동 시작]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1973년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1965년에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지냈고, 1960년부터 1981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955

[대통령상 수상, 문학 활동]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공식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여인소묘' 등 다수의 수필집과 단행본을 발표하며 대중과도 소통했습니다.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던 천경자는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1955년 '여인소묘'를 시작으로 단행본 15건,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 호흡했습니다. 2006년에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가 새로 편집되어 출간되었습니다.

1972

[한국 유일의 종군화가 활약]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의 파견 요청으로 김기창, 박영선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로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맹호부대에 종군하며 병사들과 이국적인 아가씨들을 스케치하고 담채 작품으로 남기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맹호부대에 1주일간 종군하며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이 경험은 그녀의 이국적인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73

['천경자 풍물화' 개척]

타히티 여행 이후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황금의 비' 등 천경자 특유의 화려하면서도 슬픈 감성이 담긴 대표작들을 선보이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합니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12번의 해외 스케치 기행을 즐겼습니다. 1973년작 '길례언니'는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78

[예술원 회원 및 훈장 수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에는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며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64년 문예상, 1971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5년 3·1문화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91

['미인도' 위작 논란, 절필]

인생 최대의 고비인 '미인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미인도'가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미술관 측은 진품 판정을 고수했습니다.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비난에 상처받은 그녀는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운영 중 복제품 판매 과정에서 작가가 원작을 직접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진위 시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했으나, 천경자 화백은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작품 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증언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 논란은 천경자 화백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습니다.

1995

[성공적인 대규모 회고전]

'미인도' 논란 이후, 72세의 나이로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이는 8만 명이 줄을 서서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며 그녀의 예술혼을 다시 한번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여생을 보낼 준비를 합니다.

절필 선언 후 미국에 머물다가 4개월 만에 돌아와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회고전은 생애 마지막 전시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되었습니다.

1998

[작품 기증 후 뉴욕 이주]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며 한국 미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이후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며 살아있는 전설이 됩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03

[뇌졸중 발병, 미스터리 시작]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이후 그녀의 행적과 근황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면서 생존 여부에 대한 미스터리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해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된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습니다. 2009년 1월부터 언론에서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자 생존여부에 관해 미스터리라고 표현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2014년 2월을 기하여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천경자 가족은 이에 반발하여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했습니다.

2015

[꽃의 화가, 뉴욕에서 영면]

향년 90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에서 영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망 소식은 두 달 뒤인 10월 22일, 가족 측에 의해 뒤늦게 공개되며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첫째 딸과 다른 가족들 간의 불화로 인해 사망 시기 공개가 지연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한국표준시로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 가족 측은 천경자가 2015년 8월 6일 새벽 5시에 타계했다고 전했습니다. 첫째 딸 이혜선은 나머지 가족이 천경자 화백 생전에 수년간 안부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반면 둘째 딸과 둘째 사위는 첫째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고 맞섰습니다.

2016

2016.11 사후 1년

['미인도' 위작 논란 재점화]

사망 후에도 '미인도' 위작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프랑스 감정단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미인도'가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보고서를 검찰 측에 제출하며 논란이 재점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의 결론에 강하게 반박하며 진품 주장을 굽히지 않아, 그녀의 그림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프랑스 감정단은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반박이 있었습니다. 이 논란은 천경자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2005년부터 10년간 경매시장 낙찰 총액 상위 화가 20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천경자 화백의 작품 평균 호당 가격은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가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고가 작품은 '초원Ⅱ'(1978)로 12억원에 팔려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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