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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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가수, 트로트 가수 대중음악 가수/아이돌

채규엽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성악가 겸 대중가요 가수입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직업 가수로 평가받으며 대중가요의 시발점 역할을 했습니다.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일본 활동 및 친일 논란, 사생활 문제 등 어두운 면도 존재했습니다. 해방 후 행적이 묘연했으나, 1949년 월북 후 고향 함흥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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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6

[출생]

채규엽은 1906년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년도는 불확실하다.

1925

[일본 유학 및 음악 활동 시작]

1920년대 중반 일본으로 유학, 동경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며 경향파 예술 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의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경향파 예술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8

[서울 바리톤 독창회 개최]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개최하며 음악적 실력을 선보였다.

1928년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다.

1930

[근화여학교 음악 교사 재직]

근화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 활동을 했다.

1930년에 근화여학교에 음악 교사로 재직한 일이 있다.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

일본 콜럼비아레코드 경성지사 축하연에서 일본어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했다. ‘성악가 채규엽’이라는 이름으로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를 부르자 앨범을 발표했으며, 유랑인의 노래는 직접 작사·작곡했다.

채규엽이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한 것은 1930년이다.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 경성지사 설립 축하연에서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취입한 레코드에는 ‘성악가 채규엽’으로 인쇄되어 있었고,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를 부르자로 데뷔하였다. 유랑인의 노래는 그가 직접 작사·작곡하였다.

1932

['유행가의 패왕'으로 큰 인기]

오케레코드, 태평레코드, 포리돌레코드 등 여러 음반사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오케레코드 및 태평레코드, 포리돌레코드에서 노래를 발표하고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35

[삼천리 인기 투표 1위]

잡지 삼천리에서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남자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1935년에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남자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1936

[일본 활동 및 이름 개명]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활동하며, 일본식 이름인 하세가와 이치노로 개명했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일본어 유행가 가수 활동을 상징한다.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의 설득에 넘어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3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 무렵 하세가와 이치노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세가와’라는 성씨는 서울 콜럼비아 지사가 하세가와 총독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치로’라는 이름은 그가 한국인 남성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어 유행가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전해 온다.

1937

[인기 하락세 시작]

명사십리를 부른 이후 그의 인기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그의 인기는 1937년 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점차 수그러든다.

1943

[은퇴 선언 및 일본 육군 지원]

태평양 전쟁 말기,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는 행동으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는 돌출 행동도 보였다.

1946

[해방 후 활동 및 친일 논란]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에서 공연을 이어갔으나, 엔카풍 음악과 일본식 이름 사용 등으로 친일파 논란에 휩싸여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사기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종전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그러나 엔카풍의 노래를 부르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찍부터 일본식 이름을 지어 활동했었던 등 친일파로 보일 수 있는 소지가 커서 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49

[월북 및 사망]

1949년 12월 이후 행적이 불분명했으나, 훗날 월북하여 고향 함흥에서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다.

1949년 12월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었으며, 친구 이면상을 믿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7년에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을 통해 1949년에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과 사망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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