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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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어빙
농구 선수, 스포츠인 + 카테고리

농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닥터 J’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화려한 공중 플레이와 파워풀한 덩크슛으로 농구의 판도를 바꾸고 개인적인 표현을 경기의 필수 요소로 만든 선구자입니다. ABA와 NBA를 넘나들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품격과 실력을 겸비한 전설적인 스포츠 아이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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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50

[전설의 시작, 닥터J 탄생]

뉴욕주 루스벨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닥터'라는 별명이 생겼는데, 친구들이 그를 '교수(The Professor)'라고 부르자, 어빙을 '닥터'라고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줄리어스 윈필드 어빙 2세는 1950년 2월 22일 뉴욕주 루스벨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스벨트 고등학교 시절부터 '닥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별명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가장 흔한 이야기는 어빙이 친구에게 '교수(The Professor)'라고 부르자, 그 친구가 어빙에게 '닥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별명은 그가 농구 코트에서 보여줄 혁신적인 플레이 방식을 정의하게 됩니다.

1968

[대학 농구 입성]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입학하여 2시즌 동안 평균 26.4득점, 20.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68년 매사추세츠 대학교에 입학하여 2개의 대학 시즌 동안 26.4포인트와 20.2리바운드를 평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1971년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와 대학 재학생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을 맺기 위해 학교를 떠날 때까지는 아직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71

[프로 농구 데뷔 (ABA)]

대학을 떠나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 입단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인 시즌에 경기당 27.3점을 득점하며 올A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습니다.

어빙이 1971년~72년 시즌에 프로 농구에 데뷔했을 때, 농구계는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ABA와 NBA는 이미 합병을 논의 중이었고, 선수들과 구단들은 유동적이었습니다. 어빙은 처음부터 ABA로 향했습니다. 스콰이어스는 이미 ABA 득점왕 찰리 스콧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어빙은 즉시 팀에 기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인 선수로서 첫 경기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신인 선수로서 한 경기에 27.3 포인트를 득점하고, 올ABA 세컨드 팀으로 선발되어 ABA 올루키 팀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72

[NBA 지명과 복귀]

NBA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었으나, 법정 소송 끝에 버지니아 스콰이어스로 복귀하여 그해 ABA 득점왕(31.9점)을 차지했습니다.

1972년 어빙의 대학 졸업 시기에 그는 NBA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밀워키 벅스에 의해 선발되었습니다. 벅스 팬들에게는 오스카 로버트슨과 함께 어빙, 카림 압둘 자바가 한 팀에 모일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 선수들은 팀을 옮겨다녔고, 어빙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벅스에서 뛰는 대신 1972년~73년 시즌 전에 애틀랜타 호크스로 이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스콰이어스가 신청한 법정 금지 명령으로 인해 경기에 나설 수 없었고, 결국 법원은 그를 ABA 스콰이어스의 4경기에 복귀하도록 강제했습니다. 그는 그해 ABA 득점 선두를 달리며 경력 최고인 경기당 31.9점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흥미롭고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는 4회 연속 올ABA 퍼스트 팀에 처음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73

[뉴욕 네츠 이적 및 우승]

뉴욕 네츠로 이적하여 팀을 1974년 ABA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적 후 첫 MVP를 수상하며 3년 연속 MVP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어빙은 ABA에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스콰이어스가 작은 시장의 팀이라는 사실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1973년~74년 시즌을 앞두고 스콰이어스는 조지 카터와 커밋 워싱턴의 드래프트 권리 및 현금을 받고 어빙과 윌리 소저너를 뉴욕 네츠로 트레이드했습니다. 뉴욕에서 엄청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어빙은 네츠를 55승 29패의 정규 시즌 기록과 1974년 ABA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습니다. 네츠는 래리 캐넌과 빌리 폴리츠 같은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팀원들이 서로 익숙해지자 멈출 수 없는 팀이 되었습니다. 이스턴 디비전을 2경기 차이로 우승한 후, 네츠는 플레이오프 5경기에서 스콰이어스를 꺾고, 켄터키 커널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ABA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유타 스타스를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네츠는 5경기 만에 스타스를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어빙은 경기당 27.4점으로 리그 득점왕을 재차 차지했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한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하여 어시스트 6위, 스틸과 블록슛 모두 3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3년 연속 ABA MVP 상 중 첫 번째를 수상했습니다.

1976

[마지막 ABA 우승과 MVP]

마지막 ABA 시즌에 올스타전 슬램덩크 챔피언십에서 조지 거빈과 데이비드 톰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네츠를 2번째 ABA 타이틀로 이끌었고, 플레이오프 MVP와 3년 연속 MVP를 수상하며 ABA 시대를 완벽히 지배했습니다.

1975년~76년 시즌에 ABA 팀들은 재정난을 겪고 있었고, 리그는 마지막 시즌을 하나의 디비전으로 통합하여 혼란스러운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BA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시즌 중반에 레드, 화이트, 블루 공과 3점 슛을 도입했고, 올스타 경기 슬램덩크 챔피언십을 다시 개최했습니다. 어빙은 아티스 길모어, 래리 케넌, 조지 거빈, 데이비드 톰슨을 제치고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네츠는 마지막 ABA 결승전에서 덴버 너기츠를 만나 3시즌 만에 네츠를 2번째 타이틀로 이끌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서 어빙은 34.7점을 평균하며 플레이오프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4시즌 중 3번째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29.3점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3년 연속 MVP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5시즌 동안의 ABA 경력에서 그는 2회 챔피언십, 3회 MVP, 3회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NBA 입성과 올스타 MVP]

ABA와 NBA의 합병으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이적하며 NBA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적 직후 첫 NBA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습니다.

이는 스포츠 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건 운동화를 판매한 세계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ABA 시대는 막을 내렸고, NBA는 이제 어빙을 필요로 했습니다. ABA의 나머지 팀들이 해체되면서 네츠, 너기츠, 샌안토니오 스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다음 시즌 NBA로 병합되었습니다. 1976년~77년 캠페인 직전, 어빙은 네츠와 연봉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네츠는 시즌 시작 불과 24시간 전에 그를 3백만 달러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팔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빙은 공격 지향적인 가드 로이드 B. 프리와 더그 콜린스는 물론, 또 다른 최고 득점자이자 전 ABA 스타 선수인 조지 맥기니스와 합류했습니다. 어빙은 팀 성공을 위해 공격 본능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명성이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으나, 1977년 NBA 올스타전에서 그는 ABA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선수로 만들었던 예술적인 플레이를 선보일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30점을 득점하고, 12리바운드를 잡고, 4스틸을 기록하며 MVP를 수상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공적인 상품 판매상이 될 기회를 잡았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팔린 운동화를 가진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977

[NBA 결승 진출 (첫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NBA 결승전으로 이끌었으나, 빌 월튼이 이끄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게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NBA 첫해, 어빙은 코트에서 경기당 21.6점을 득점하며 세븐티식서스를 50승 32패의 기록과 애틀랜틱 디비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플레이오프는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보스턴 셀틱스를 꺾는 데 7경기, 휴스턴 로키츠를 물리치는 데 6경기가 필요했습니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한 NBA 결승전에서 세븐티식서스는 첫 2경기를 이겼으나, 빌 월튼이 이끄는 트레일블레이저스가 4연승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80

[NBA 35주년 팀 선정 & 전설의 덩크]

NBA 35주년 기념 팀에 현역 선수 중 카림 압둘 자바와 함께 선정되었습니다.

이후 NBA 결승전 4차전에서 전설적인 '베이스라인 동작' 덩크를 성공시키며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어빙은 모든 면에서 리그의 다른 선수들보다 높은 수준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1980년, 그는 NBA 35주년 기념 팀에 선정된 2명의 현역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카림 압둘 자바였습니다.) 1979년~80년 시즌에 어빙은 자신의 NBA 경력 최고 득점 평균인 26.9점을 기록하여 리그 4위에 올랐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또한 NBA 플레이오프에 4년 연속 진출했습니다. 59승 23패의 정규 시즌 후, 세븐티식서스는 불리츠, 호크스, 신인 래리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를 쉽게 물리치고 동부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뜨겁게 경쟁한 NBA 결승전은 드라마틱했습니다. 4번째 경기에서 어빙은 NBA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슛 중 하나로 손꼽힐 전설적인 '베이스라인 동작'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른쪽 베이스라인을 따라 디펜더 마크 랜즈버거를 제치고 백보드 뒤로 발을 옮겼습니다. 림으로 향하는 그의 길은 압둘 자바의 뻗은 팔에 의해 빠르게 막혔습니다. 어빙은 공을 다시 아래로 가져와 계속해서 떠오르며 공중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백보드 뒤를 통과했습니다. 그는 결국 후프의 반대쪽까지 도달하여 코트를 향해 뒤로 던져 득점했습니다. 레이커스는 시리즈에서 5번째 경기를 이겨 1경기 앞서갔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6번째 경기에서 매직 존슨은 부상당한 압둘 자바를 대신해 센터를 맡아 42점을 득점하며 레이커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1981

[NBA 정규시즌 MVP 수상]

개인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즌을 보내며 NBA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래리 버드의 셀틱스에게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다음 시즌인 1980년~81년은 어빙의 가장 위대한 개인적인 해였습니다. 경력 최고인 354 어시스트(4.4)와 173 스틸을 기록하며 경기당 24.6점을 득점한 후, 그는 NBA의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세븐티식서스와 셀틱스는 정규 시즌 동안 동일한 62승 20패의 기록을 세웠고,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어빙이 세븐티식서스를 3대1 선두로 이끌었으나, 버드의 셀틱스는 3연속 승리로 역전하며 NBA 타이틀로 향했습니다.

1983

[드디어! NBA 우승 챔피언]

팀에 모지스 멀론이 합류하며 세븐티식서스는 정규시즌 65승을 기록했습니다.

압도적인 플레이오프를 거쳐 레이커스를 4연승으로 꺾고 마침내 염원하던 첫 NBA 챔피언십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어빙을 중심으로 일관성 있는 우승팀을 구축했으나, 챔피언십 퍼즐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조각이 부족했습니다. 팀은 압둘 자바를 상대할 지배적인 센터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총지배인 팻 윌리엄스는 1981년~82년 시즌에 NBA MVP를 수상한 모지스 멀론을 영입하기 위해 콜드웰 존스를 로키츠로 트레이드했습니다. 이제 팀은 '닥터 J'의 막을 수 없는 능력을 보완할 '움직일 수 없는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정규 시즌 65승 17패를 기록했으며, 멀론의 24.5점과 어빙의 21.4점 활약이 뒤를 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시즌 말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멀론은 NBA MVP를 재차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세븐티식서스는 앤드루 토니, 모리스 칙스, 보비 존스 등 두 명의 슈퍼스타를 둘러싼 뎁스(선수층)로 승리했습니다. 세븐티식서스는 1983년 NBA 플레이오프를 압도적으로 통과하여 결승까지 예선 9경기 중 8승을 거두며 친숙한 적수를 만났습니다. 4년 만에 3번째로 세븐티식서스와 레이커스는 NBA 타이틀을 놓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는 이전 두 경기의 드라마틱함을 결여했는데, 세븐티식서스가 레이커스를 4연승으로 꺾고 어빙에게 그의 첫 NBA 챔피언십 반지를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1987

[전설의 은퇴]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며 긴 프로 경력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ABA와 NBA를 합쳐 30,000점 이상을 득점하며 역대 득점 5위에 올랐습니다.

어빙의 경력이 축소되면서 세븐티식서스도 약 10년간 리그 엘리트 중의 하나였다는 명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찰스 바클리 같은 어린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세븐티식서스는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어빙이 1986년~87년 시즌 이후 은퇴를 선언하자, 이 캠페인은 어빙의 작별 투어로 변모했습니다. 팬들은 모든 NBA 경기장에서 그가 경기를 위해 보여준 사랑과 감탄을 표하며 그를 기렸습니다. 37세의 나이로 은퇴한 어빙은 그의 합산 ABA와 NBA 경력에서 30,000점 이상을 득점했습니다. 프로 농구 역사상 카림 압둘 자바, 윌트 체임벌린, 칼 말론, 마이클 조던만이 그보다 더 많은 포인트를 득점했습니다. 어빙은 세븐티식서스와 함께한 11개의 NBA 시즌에서 경기당 22.0점을, 스콰이어스와 네츠와 함께한 5개의 ABA 시즌에서 경기당 28.7점을 득점했습니다.

1993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농구 역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1993년 그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으로 헌액되었습니다.

1997

[올랜도 매직 구단 합류]

은퇴 후에도 성공적인 비즈니스와 농구 행정 경력을 이어갔으며, 올랜도 매직 구단의 부회장으로 합류했습니다.

은퇴 이후, 어빙은 성공적인 비즈니스와 농구 행정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의 투자에는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은 물론, 필라델피아에 있는 코카콜라 공장 소유권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1993년 이래 NBC에서 NBA 보도 분석가로 일한 후, 어빙은 1997년 6월 4일 RDV 스포츠의 부회장 겸 올랜도 매직의 행정 부회장으로서 매직의 본부에 합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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