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가리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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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혁명가, 정치인, 이탈리아 통일 영웅 + 카테고리

주세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리는 군인이자 애국자입니다. 그는 공화주의 신념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헌신했으며 남아메리카와 유럽을 넘나드는 군사적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특히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천인 원정대를 성공시켜 이탈리아 왕국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활약은 국제적인 독립과 공화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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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07

[니스에서 태어나다]

미래의 '두 세계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프랑스 제1제국 니스에서 태어났습니다.그의 가족은 연안 무역에 종사하며,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친숙하게 지냈습니다.

가리발디의 출생지인 니스는 당시 프랑스 통치 아래 있었으며, 그는 평생 바다에 길들여져 1832년에는 상선 선장으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1833

['젊은 이탈리아' 가입]

러시아 타간로그 방문 중 이탈리아 독립 운동가 조반니 바티스타 쿠네오를 만났습니다.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꾼 날로 기록되며, 비밀 혁명 단체 '젊은 이탈리아'에 가입해 조국 이탈리아의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쿠네오와의 만남 이후 그는 그해 11월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통일의 열렬한 지지자인 주세페 마치니를 만나 '젊은 이탈리아' 운동과 '카르보나리 혁명 협회'에 가입하며 공화제 이탈리아를 위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834

[피에몬테 봉기 실패와 망명]

마치니의 피에몬테 봉기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이로 인해 제노바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마르세유로 도피, 이후 튀니지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망명 기간 동안 브라질과 우루과이에서 여러 전쟁에 참여하며 게릴라 전술을 익혔고, 이는 훗날 '두 세계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835

[브라질 라가머핀 반군 합류]

브라질로 망명하여 히우그란지두술 공화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라가머핀(가우초 반군)에 합류했습니다.그는 산타 카타리나에서 공화국 선포를 돕는 등 브라질의 새로운 독립 국가에 맞서 싸우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전쟁 중에 그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포르투갈과 인디오 혼혈인 아니타 히베이루 다 시우바를 만나게 되며, 1839년 아니타는 가리발디의 배에 합류하여 함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842

[붉은 셔츠단 창설]

1842년 '이탈리아 군단'을 창설하며 아르헨티나로 수출 예정이던 붉은 셔츠를 유니폼으로 채택하였습니다. 1846년 세로 및 산탄토니오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같은 해 몬테비데오에서 아니타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1848

[이탈리아 귀국]

1848년 1월 팔레르모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혁명적 움직임이 확산되자, 가리발디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남아메리카에서 이탈리아로 귀국했습니다.그는 약 60명의 이탈리아 군단 일원들과 함께 돌아와 독립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사르데냐의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자신의 복무를 제안했으나 냉대받았습니다. 이후 밀라노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습니다.

1849

[로마 공화국 방어전]

로마 공화국이 선포되자, 프랑스군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방어하는 데 주세페 마치니의 자극으로 방어전을 지휘했습니다.그의 아내 아니타도 함께 싸웠으나, 결국 6월 30일 로마는 함락되었고, 퇴각 중 아니타는 라벤나 근처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로마 함락 후 가리발디는 오스트리아군, 프랑스군, 스페인군, 나폴리군에게 시달리며 북부 이탈리아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아내 아니타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나 사망했습니다.

1850

[뉴욕 망명 생활]

로마 공화국 방어전 실패 후 다시 해외로 망명하여 뉴욕으로 향했습니다.그곳에서 그는 안토니오 메우치와 만나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양초 제조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이후 태평양을 항해하며 페루에서 혁명 영웅 마누엘라 사엔스를 만나는 등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습니다.

1854년 3월 21일에는 범선 코먼웰스의 선장으로서 잉글랜드 타인강에 입항하여 지방 근로자 계급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1854

[이탈리아로 재귀국]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1854년 이탈리아로 귀국했습니다.이는 1859년 오스트리아-피에몬테 전쟁 발발을 앞두고 사르데냐 정부에서 다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귀국 후 5년 뒤인 1859년에 오스트리아-피에몬테 전쟁이 발발하자 소장으로 임명되어 '알프스의 사냥꾼들'을 지휘하며 바레세와 코모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고향 니스 지방이 프랑스에게 양도되자 크게 분노했습니다.

1860

[천인 원정대 시칠리아 상륙]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회 삼아, 약 천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2척의 배에 몸을 싣고 시칠리아 최서단 마르살라에 상륙했습니다.이 '천인 원정대'는 이탈리아 통일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원정대는 5월 13일 칼라타피미에서 3천 명의 강력한 부르봉 프랑스 주둔군을 격파하고, 이튿날 가리발디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으로 자신을 시칠리아의 독재자로 선언했습니다.

[팔레르모 점령]

마르살라 상륙 후 시칠리아 수도 팔레르모로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거주자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도시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영국 해군 제독의 중재로 나폴리 왕립군이 철수하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가리발디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나폴리 법원조차 그의 용맹에 경외감을 표했습니다. 6주 후에는 메시나마저 장악하며 시칠리아 정복을 완료했습니다.

[나폴리 영웅적 입성]

시칠리아 정복 후 메시아 해협을 건너 북부로 진격했습니다.그의 진군은 저항 대신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9월 7일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으로서 나폴리 수도에 입성하여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폴리의 왕 프랑수아 2세를 직접 격파한 것은 아니었으며, 시칠리아 육군의 대부분은 충성을 유지하고 볼투르노강 북쪽에 집결했습니다. 가리발디의 지원군은 10월 1일에 일부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프랑수아 2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명령 아래 시칠리아 육군이 도착한 다음 날 퇴각했습니다.

[국제 군단 창설]

이탈리아 해방을 완수하고 다른 국가들의 독립을 돕기 위해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독일 등 다양한 국적의 지원병들로 구성된 국제 군단 창설을 추진했습니다.'알프스에서 아드리아해로 자유'라는 표어 아래 로마와 베네치아 해방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마치니는 군주 정부의 영구 보존에 불만을 품고 지속적으로 공화국을 선동했으며, 가리발디 또한 국왕의 무활동에 좌절하여 교황령을 대결하려는 새로운 모험적 사업을 결성했습니다. 이 시기 미국 남북 전쟁 발발 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복무를 제안받았으나, 노예제 폐지와 육군 전임 사령관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무산되었습니다.

[국왕과의 역사적 악수]

테아노에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가리발디는 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인사하며 악수했고, 이튿날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며 왕권에게 권력을 이양했습니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수상 카밀로 디 카보우르를 매우 싫어했지만,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왕정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11월 7일 국왕과 함께 나폴리로 말을 타고 들어갔고, 카프레라의 바위섬으로 은퇴하며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거부했습니다.

1862

['로마 아니면 죽음' 원정]

'로마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로마 탈환을 위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제노바를 떠나 팔레르모에 상륙, 지원군을 모았고, 정부의 비밀 지원을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교황의 지배에 대한 도전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불신을 샀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로마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령 공격의 국제적 파장을 우려하여 국민들의 참가를 막으려 했습니다.

[아스프로몬테 전투]

로마로 진격하던 중 칼라브리아 아스프로몬테산에서 이탈리아 정규군과 충돌했습니다.가리발디는 동포 간의 발포를 금지했으나 전투가 벌어졌고, 발에 총상을 입은 채 많은 지원군과 함께 포로로 잡혔습니다.

정부의 기선에 실려 바리가노로 이송된 그는 명예로운 투옥 상태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모험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유럽 전역의 동정을 얻으며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건강 회복 후 석방되어 카프레라로 돌아왔습니다.

1866

[제3차 독립 전쟁 참여]

이탈리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다시 무기를 들었습니다.보오전쟁이 발발하자 프로이센과 제휴하여 오스트리아에 맞서 베네치아를 차지하려 했고, '알프스의 사냥꾼들'을 이끌고 트렌티노로 진격했습니다.

베체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트렌토를 공격했으나, 이탈리아 정규군이 리사 해전과 쿠스토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양도되었지만, 이는 북부 전선의 프로이센 성공 덕분이었습니다. 트렌토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Obbedisco"(난 순종한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1867

[로마 재진격 시도]

통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마 포획을 위한 운동을 주도하며 다시 로마로 진격했습니다.그러나 프랑스 원군과 교황령 육군에 의해 무장 상태가 열악한 지원군들이 격퇴되었고, 포로로 잡히지는 않았지만 결국 카프레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멘타나 전투에서 패배한 이 사건은 로마 통일의 난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리발디는 다시 무기를 차지하며 끊임없이 이탈리아 통일의 완전한 완성을 꿈꾸었습니다.

1870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참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국민들의 친프로이센 정서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이 몰락한 후 새롭게 선포된 프랑스 제3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독일군에게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보주 산맥 군대의 사령관을 맡아 활약했습니다. 프랑스 주둔군이 로마에서 소환된 후, 이탈리아 육군은 가리발디의 도움 없이 교황령을 점령하여 로마를 이탈리아에 통합시켰습니다.

1872

[상원의원 활동 시작]

이탈리아 왕국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1882년 사망할 때까지 10년간 상원의원으로서 이탈리아의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는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적 이상과 교권 반대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1882

[카프레라 섬에서 사망]

'두 세계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카프레라 섬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그는 생전에 소박한 장례식과 화장을 원했지만, 그의 소원과는 달리 영웅의 위상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는 "남자는 반신반인이 아닌 신을 창조하였다"고 저술할 만큼 무신론에 가까운 개인적 신념을 가졌으며, 적극적인 프리메이슨 회원으로서 자유주의적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이탈리아 해군은 5척의 함선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전 세계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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