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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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철학자, 정치경제학자, 사회 개혁가, 자유주의자 + 카테고리

존 스튜어트 밀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 사회 개혁가입니다. 경험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 윤리학 자유주의 정치경제사상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실제 정치에도 참여해 하원의원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자유론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위해원칙을 정립하여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졌고 의회에서 최초로 여성 투표권을 주장하는 등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법과 윤리 정치 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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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06

[존 스튜어트 밀 탄생]

영국 런던 펜톤빌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엄격한 철학자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명시적인 목표 아래 천재적인 후계자로 양육되었습니다.

1809

[3세 그리스어 학습]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리스어 학습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방침에 따라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했습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의 전파를 이어갈 후계자로서 존을 양육했고, 존은 알고 있던 영어 단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을 배웠습니다.

1814

[8세 고전 독파 시작]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솝 우화,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수많은 그리스어 원전을 읽었습니다.

영어 문학 및 산수도 터득했습니다.

루키아노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이소크라테스, 플라톤 대화편까지 그리스어 문장으로 접했으며, 라틴어와 유클리드, 대수학까지 배웠습니다. 열 살에는 플라톤 원전을 읽을 정도였습니다.

1818

[논리학 및 경제학 심화 학습]

열두 살 무렵 스콜라철학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원전을 치밀하게 공부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아버지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을 탐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산책 시간에 정치경제학을 강의하고, 밀은 배운 내용을 보고서로 제출하며 교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후일 아버지 밀의 '정치경제학 요론' 초고가 되었습니다.

1820

[프랑스 유학 경험]

열네 살 때 제러미 벤담의 동생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1년간 머물렀습니다.

몽펠리에 과학대학에서 고등수학과 다양한 과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산악지방의 풍경과 활발한 사람들의 생활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파리에서는 아버지의 친구인 경제학자 세이와 생시몽 같은 저명인사들을 만났습니다.

1823

[공리주의자 협회 창립 및 취업]

친구들과 '공리주의자 협회'를 창립했습니다.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 대신, 아버지처럼 영국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35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성공회를 '하얀 악마'로 간주했으며,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1827

[21세 정신적 위기 극복]

스물한 살에 신경쇠약을 겪었습니다.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며 억눌렸던 감정들이 원인이라 스스로 회고했으며, 워즈워스의 시에서 위안을 얻어 극복했습니다.

마르몽텔의 '어느 아버지의 회상'과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서 위안을 찾으며 정서능력을 회복했고, 이를 '구름이 점차로 걷혔다'고 표현했습니다.

1843

['논리학 체계' 발표]

그의 중요 저서 <논리학 체계>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베이컨이 이룩한 귀납법의 논리를 완성한 것으로, 자연 과학 연구 방법론으로서 획기적인 저술로 평가받습니다.

이 저술은 진보가 빠르고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연 과학 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하여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851

[해리어트 테일러와 결혼]

21년간의 깊은 교제 끝에 해리어트 테일러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밀의 사상, 특히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 입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리어트는 밀을 만났을 당시 유부녀였으며, 첫 남편이 죽기 전까지 두 사람은 정신적인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밀의 학자적 동반자로서 서로의 지성을 존중했습니다.

1858

[동인도회사 사직 및 아내 사망]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사직하며 35년간의 근무를 마쳤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가 아비뇽에서 폐충혈로 사망했습니다.

밀은 아비뇽에 아내를 묻고, 그곳에 작은 집을 사서 여생의 안식처로 삼으며 그녀를 추모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밀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1859

['자유론' 출간]

자유주의 정치이론의 고전이자 가장 대중적인 문서 중 하나인 『자유론』을 출간했습니다.

이는 그의 아내 해리어트의 영향 아래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유론』은 표현의 자유와 '위해원칙'(harm principle)을 제시하며, 의견 표명의 자유가 사회 진보에 필수적임을 강조했습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1865

[하원의원 및 학무위원장 선임]

런던 웨스터민스터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학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1868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하원에서 그는 자유당과 연계하여 아일랜드 부담 경감, 여성의 권리 옹호, 비례대표제, 노동조합, 농지 협동조합 등 다양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대의정부론』을 통해 의회 제도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1869

[여성 투표권 최초 주장]

의회 안에서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종속' 등 그의 여성주의 사상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의 여성주의 사상은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 밀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873

[『자서전』 사후 출간]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자서전』이 사후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교육 방식과 정신적 고뇌 등을 상세히 다룹니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사망]

프랑스 아비뇽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안식처였던 그곳에 아내 해리어트 곁에 묻혔습니다.

그는 현대 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버트런드 러셀의 대부를 맡기도 했습니다.

1874

[『종교에 대하여』 사후 출간]

그의 종교관을 담은 『종교에 대하여』가 사후 출간되었습니다.

밀은 종교 그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종교를 도덕의 최대 적으로 보았습니다.

밀은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고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종교가 자유의 최대 적이라 보았습니다. '편협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종교의 부활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독한 편견의 부활과 다름없다'고 언급했습니다.

1879

[『사회주의론』 사후 출간]

그의 사회주의 사상을 정리한 『사회주의론』이 사후 출간되었습니다.

밀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칭했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부인하는 극단적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선을 그었습니다.

그는 상속은 기회균등 원리를 침해하고 불로소득이라 보아 고율의 세금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적 자유보다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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