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던
연표
1572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존 던은 영국 런던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생일은 1월 24일과 6월 19일 사이로 추정된다.
1576
존 던의 부친은 런던에서 철물점 관리인을 했으며, 그가 1576년에 죽자 모친 엘리자베스 헤이우드가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1584
존 던은 1584년 11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하트 홀(현 하트포드 대학)에 입학해 3년간 공부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졸업에 필요한 '충성의 맹세'를 거부했기 때문에 학위를 얻지 못했다.
1590
가톨릭 교도였던 던은 1590년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순교자 토마스 모어의 친척이기도 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 박해를 경험했으며, 동생 헨리가 가톨릭 성직자를 숨긴 죄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자 가톨릭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593
[동생 헨리의 사망]
동생 헨리가 가톨릭 성직자를 숨긴 죄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은 던이 가톨릭 신앙에 의문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593년, 동생 헨리가 로마 가톨릭 성직자를 숨긴 죄로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존 던이 가톨릭 신앙에 깊은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597
[국새 담당관 비서 임명]
외교관 경력을 쌓은 후, 국새 담당관 토마스 에저톤의 제1비서로 임명되어 잉글랜드 사교계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존 던은 25세가 될 때까지 카디스, 아조레스 제도 등에서 스페인군과 싸우는 등 외교관 예비 경력을 쌓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와 국새 담당관 토마스 에저톤의 제1비서로 임명되어 화이트홀 궁전에 가까운 요크 하우스에서 4년간 일했다.
1601
[앤 모어와의 비밀 결혼]
던은 토마스 에저톤의 질녀 앤 모어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의 경력을 망치고 관련자들이 투옥되는 결과를 낳았다.
1601년, 존 던은 국새 담당관 토마스 에저톤의 17세 질녀 앤 모어와 사랑에 빠져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결혼했다. 이 사건으로 던의 경력은 엉망이 되었고, 결혼식을 집전한 성공회 사제와 입회인 친구가 플리트 감옥에 투옥되는 등 큰 파장을 겪었다. 월튼에 의하면 던은 아내에게 'John Donne, Anne Donne, Un-done'이라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1609
[장인과의 화해]
비밀 결혼으로 인해 틀어졌던 장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참금을 받으며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작은 안정을 찾았다.
비밀 결혼 후 8년이 지난 1609년, 존 던은 비로소 장인 조지 모어와 화해하고 지참금을 받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빈곤 속에 파포드 시골에서 생활하며 변호사 일과 소논문 집필 조수를 겸해야 했던 그는 이로 인해 잠시나마 숨통을 트였다.
1610
[반가톨릭 논설 집필]
가톨릭에 반대하는 두 논설 《사이비 순교자》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 회의》를 집필하여 제임스 1세의 인정을 받았다.
1610년과 1611년에 존 던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두 편의 논설, 《사이비 순교자》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 회의》를 썼다. 이 작품들로 제임스 1세의 기쁨을 사 입조를 권유받았으나, 당시에는 거절하고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1615
[성공회 신부 서품]
제임스 1세의 요청을 받아 영국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이는 그의 오랜 종교적 고민 끝에 내린 중요한 결정이었다.
존 던은 처음에는 성직자가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제임스 1세의 요청을 받아 1615년 영국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린컨인 법률 학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고, 왕실 예배당 사제도 겸하게 되었다.
1617
[아내 앤 모어의 사망]
12번째 아이를 출산한 지 닷새 만에 사랑하는 아내 앤이 사망했다. 던은 깊이 슬퍼했으며,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1617년 8월 15일, 존 던의 아내 앤은 12번째 아이를 출산한 지 닷새 만에 사망했다. 던은 이 비극에 깊이 슬퍼하며 열일곱 번째 소네트를 썼고, 이후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재혼하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은 그의 후기 시에 음산하고 경건한 어조로 나타나게 된다.
1621
[세인트폴 대성당 수석 사제 임명]
세인트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이는 그의 성직자 경력에서 정점에 달한 사건이었다.
1621년, 존 던은 영국 성공회 교회인 세인트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가 되었다. 그는 1631년 사망할 때까지 이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깊은 감동을 주는 웅변적 설교자로 명성을 얻어 160편의 설교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1623
[중병과 묵상록 집필]
치명적인 중병을 앓았고, 이를 계기로 건강, 고통, 질병에 대한 명상록인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묵상》을 집필했다.
1623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존 던은 장티푸스나 감기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중병에 걸려 7일 동안 지속되는 고열로 죽을 뻔했다. 회복 과정에서 그는 건강, 고통, 질병에 대한 명상록과 기도문을 썼으며, 이는 1624년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구절이 이 책에서 나왔다.
1624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묵상》 출판]
자신의 중병 경험을 바탕으로 한 명상록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묵상》을 출판했다. 이 책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23년 겪었던 중병의 경험과 회복 과정에서 쓴 명상록과 기도문을 모아 1624년 《갑자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묵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실린 '아무도 섬이 아니다'라는 글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왔으며, 이는 이후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1631
[존 던의 사망]
위암으로 사망하며 생전 출판되지 않은 수많은 시들을 남겼다. 그의 기념상은 세인트폴 대성당에 세워졌다.
1631년 3월 31일, 존 던은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직전 2월에 화이트홀 궁전에서 찰스 1세 앞에서 《죽음의 결투》를 설교하며 깊은 감동을 주었다. 세인트폴 대성당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기념상은 1666년 런던 대화재 때에도 무사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