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디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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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 스포츠 스타,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 + 카테고리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중견수.

1941년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야구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대기록을 세워 '양키 클리퍼'라는 별명을 얻었다.

3차례 리그 MVP, 9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끈 팀의 주역이자, 195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불멸의 스타가 되었다.

배우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과 이혼으로도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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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14

[전설의 시작, 조 디마지오 탄생]

이탈리아계 이주민 어부의 여덟 번째 아들로,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훗날 메이저 리그의 전설이 될 그의 생애가 시작된 날이다.

조지프 폴 '조' 디마지오(Joseph Paul 'Joe' DiMaggio)는 1914년 11월 25일 캘리포니아주 마티네즈에서 이탈리아계 이주민 어부의 9남매 중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3

[프로 경력의 화려한 서막, 61경기 연속 안타]

PCL 샌프란시스코의 한 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61경기 연속 안타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메이저 리그 구단들의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30년대부터 PCL의 샌프란시스코의 한 팀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조 디마지오는 1933년 그곳에서 61경기 연속 안타 기록으로 매스컴과 메이저 리그 구단의 관심을 끌었다. 이 기록은 당시 전례 없는 활약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34

[명문 뉴욕 양키스 입단]

61경기 연속 안타 기록으로 스카우트 경쟁이 불붙은 끝에, 그는 마침내 메이저 리그의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1933년의 활약으로 뉴욕 양키스를 포함한 명문 구단들의 스카웃 경쟁이 불이 붙었고, 조 디마지오는 1934년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바로 메이저 리그에 올라가지는 못했다.

1936

[양키스의 새 별, 메이저 리그 데뷔]

21세의 나이로 뉴욕 양키스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물려받으며 메이저 리그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는 그의 전설적인 커리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936년 5월 3일, 조 디마지오는 뉴욕 양키스의 주전 중견수 얼 콤스의 은퇴에 발맞춰 그 자리를 대신하며 메이저 리그 야구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데뷔 첫해부터 타율 .325, 29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공격 전 부문 상위권에 올랐고,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1939

[MVP와 월드시리즈 우승, 최고의 한 해]

타율 0.381로 리그 타격왕에 오르며 생애 첫 MVP를 수상했으며, 팀을 신시네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루 게릭이 은퇴한 후 팀 내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며 1939년 타율 0.381로 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이 해에 자신의 첫 MVP 수상과 함께 신시네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팀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1941

[전설적인 56경기 연속 안타 대기록]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기록 중 하나인 56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하며 야구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 기록은 88년 윌리 킬러의 44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크게 뛰어넘는 성과였다.

1941년 5월 15일부터 7월 17일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시합에서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메이저 리그 야구 기록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1887년 볼티모어의 윌리 킬러의 44경기 연속 안타와 현대 야구 이후 최장 기록인 조지 시슬러의 41경기 연속 안타를 훨씬 뛰어넘는 성적이었다. 9회초 마지막 경기에서 3루수 켄 켈트너의 호수비로 아웃되며 아쉽게 기록 행진이 멈췄지만, 이후 다시 27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그의 타격 능력을 입증했다.

1942

[조국을 위한 헌신,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메이저 리그 스타 선수들의 군입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 역시 조국을 위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야구장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행크 그린버그와 밥 펠러로부터 시작된 메이저 리그 스타 선수들의 군입대 행렬에 합류하여 그 역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야구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선수 경력에 큰 공백을 가져왔다.

1947

[전장 복귀 후 세 번째 MVP, 재기의 드라마]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복귀하여 팀 공격을 이끌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개인 성적에서 자신을 앞섰던 테드 윌리엄스를 제치고 생애 세 번째 MVP를 수상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긴 공백 기간 후 1946년 복귀하여 처음으로 2할대 타율로 추락했지만, 이듬해인 1947년 다시 3할대 타율로 복귀했다. 신인 포수 요기 베라와 함께 팀 공격을 이끌어 팀을 월드시리즈에서 정상에 올려놓았고, 개인 성적에서 자신을 모두 앞섰던 테드 윌리엄스를 제치고 세 번째 MVP를 차지하는 드라마를 썼다.

1951

[위대한 커리어의 마무리, 은퇴]

자신의 9번째 100타점 이상을 기록한 후, 후배 미키 맨틀에게 중견수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 야구 생활을 마감했다. 위대한 '양키 클리퍼'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1950년 자신의 9번째 +100타점을 기록한 조 디마지오는 1951년 팀 후배인 미키 맨틀에게 중견수 자리를 물려주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0.325 타율, 361 홈런, 1537 타점을 기록했으며, 선구안과 정확한 타격을 겸비한 장타자로 평가받았다.

1954

[세기의 결혼, 마릴린 먼로와의 만남]

당대 최고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스포츠 영웅과 할리우드 스타의 만남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54년 1월, 그는 세기의 섹스 심볼이자 당대 최고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은 스포츠와 할리우드의 만남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국 방문]

신혼여행의 일부로 마릴린 먼로와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로하고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마릴린 먼로와의 신혼여행 중이던 1954년 2월, 그는 먼로와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당시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세기의 이혼, 마릴린 먼로와의 결별]

결혼 후 불과 10개월 만에 배우 마릴린 먼로와 이혼했다. 이 이혼은 먼로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에게 가정폭력 혐의가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다.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지 10개월 만인 1954년 10월, 그는 먼로와 이혼했다. 이 이혼은 먼로가 추진하여 성사되었으며, 조 디마지오가 가정폭력범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55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영원한 전설로]

통산 0.325의 타율과 361홈런, 1537타점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그는 88.84%의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1955년, 조 디마지오는 은퇴 4년 만에 88.84%의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통산 기록은 0.325 타율, 361 홈런, 1537 타점이며, 뛰어난 선구안과 정확한 타격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9

[사망]

플로리다 주 한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5개월 뒤 향년 84세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디마지오 데이 행사]

1967년을 빛낸 영화 졸업의 삽입곡인 Mrs. Robinson에는 조 디마지오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젊은 층에 다시 유명해 졌었는데 1999년 4월 25일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는 폴 사이먼이 초청되어 Mrs. Robinson을 부르며 디마지오 데이 행사를 축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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