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핀 드 보아르네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마르티니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태어난 조제핀은 프랑스 혁명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첫 남편을 잃고 투옥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견뎌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후이자 이탈리아의 왕비로 등극하며 유럽 최고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비록 후계자 문제로 인해 눈물의 이혼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으나, 뛰어난 사교술과 예술적 안목으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녀의 후손들은 오늘날 유럽 여러 왕실의 핏줄로 이어지며 지울 수 없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연표
1763
[마르티니크에서의 탄생]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 위치한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태어납니다. 부유한 식민지 귀족 가문의 맏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섬 특유의 여유롭고 관능적인 분위기는 훗날 그녀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입니다. 아버지는 프랑스 본토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동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귀족이었고, 어머니 역시 대규모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족들 사이에서 '예예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자랐습니다.
1779
[프랑스 본토로의 여정]
혼담이 오가던 동생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고향을 떠납니다. 아버지와 함께 배에 올라 평생의 무대가 될 프랑스 본토를 향해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훗날 황후가 될 소녀가 처음으로 고향의 섬을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원래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의 신부 후보는 그녀의 동생인 카트린데지레였으나, 동생이 결핵으로 12세에 사망하면서 조제핀이 대신 지목되었습니다. '일 드 프랑스' 호에 탑승하여 유럽으로 향했으며, 충실한 하녀인 에우페미가 이 여정에 동행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
프랑스 본토에서 보아르네 자작 가문의 아들과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화려한 귀족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편의 잦은 외도와 무관심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게 흘러갑니다.누아지르그랑에서 16세의 나이에 18세의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남편 알렉상드르는 아내의 교양과 예절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부대 주둔지나 옛 가정교사의 집에 머물며 가정을 크게 등한시했습니다.
1781
[장남 외젠의 출산]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도 첫 아이이자 장남을 무사히 출산합니다. 아이의 탄생은 잠시나마 멀어졌던 부부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남편이 다시 곁을 떠나면서 유대는 길게 이어지지 못합니다.아들의 이름은 외젠 드 보아르네로, 훗날 양아버지인 나폴레옹에 의해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되는 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됩니다. 당시 아이의 양육은 그녀를 평생 모신 하녀 에우페미에게 맡겨졌습니다.
1783
[딸 오르탕스의 출산과 파탄]
두 번째 아이인 딸을 출산하지만, 이는 오히려 가정 파탄의 도화선이 됩니다. 당시 옛 내연녀와 함께 고향 마르티니크에 머물고 있던 남편은 아내의 불륜을 극렬하게 의심하며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남편의 강압으로 인해 수녀원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태어난 딸의 이름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로, 훗날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하여 네덜란드 왕비가 되며 나폴레옹 3세를 낳게 됩니다.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들은 남편 알렉상드르는 분노하여 이혼을 요구하고 그녀를 팡테몽 수녀원에 강제로 감금시켰습니다.
1784
[이혼 소송에서의 법적 승리]
억울하게 수녀원에 갇힌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법적으로 남편에게 맞서 승소를 거머쥡니다. 무고한 불륜 혐의를 완전히 벗어내고 두 아이의 양육권과 경제적 지원을 쟁취합니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여 당당하게 일궈낸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파리 샤틀레 법원의 왕실 고문에게 고소장을 제출하였고, 모로 드 뷔시 변호사의 적극적인 변호를 받아 재판에서 승리했습니다. 파리 경찰청장은 알렉상드르에게 아이들의 교육비를 포함한 연금을 아내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1785
[공식적인 별거 합의]
남편이 아들을 강제로 납치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후, 공증인 앞에서 공식적인 타협안에 최종 서명합니다.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마침내 인정하고 매년 정기적인 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합니다. 이로써 자녀들의 양육권을 지켜내며 억압적인 결혼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1785년 2월에 발생한 외젠 납치 사건 이후, 고모의 중재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연간 6천 리브르의 연금을 받고, 오르탕스의 영구 양육권 및 외젠이 다섯 살이 될 때까지의 양육권을 보장받는 조건이었습니다.
1788
[마르티니크로의 귀향]
파리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음에도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딸과 충실한 하녀만을 데리고 배에 올라 팍팍한 현실의 도피처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고향의 사교계에서 점차 자신의 독자적인 영향력을 넓혀가게 됩니다.퐁텐블로와 파리에서 지내며 루이 16세의 사냥 모임 등에 참석했으나, 남편이 연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극심한 빚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약 3년 동안 서인도 제도의 고향에 머물며 현지 유력자들과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1790
[혁명의 불길과 긴급 탈출]
프랑스 혁명의 거센 여파가 식민지 섬까지 들이닥치며 폭동과 반란이 심각하게 일어납니다. 반군들에게 가족이 인질로 잡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기적적으로 군함에 올라타 섬을 빠져나옵니다. 목숨을 건 긴박한 도주 끝에 또다시 혁명의 소용돌이가 치는 프랑스 본토로 귀환하게 됩니다.그녀의 삼촌이 포르부르봉을 점령한 반군들과 협상하러 갔다가 인질로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포르루아얄이 포위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조제핀 일행은 프랑스 해군 호위함 '상시블' 호를 타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1794
[공포정치 하의 투옥과 남편의 처형]
공포정치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반혁명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는 큰 시련을 겪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전 남편은 끝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며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사형 집행이 임박했던 그녀는 주동자들의 갑작스러운 몰락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집니다.카르름 감옥에 수감되어 극도의 공포와 혹독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1794년 여름, 전 남편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가 처형당했고 그녀 역시 처형 명단에 올랐으나,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 정권이 붕괴하면서 기적적으로 석방되었습니다.
1795
[나폴레옹과의 역사적 첫 만남]
파리의 화려한 사교계로 무사히 복귀한 후, 유력자의 살롱에서 처음으로 한 젊은 장교와 마주칩니다. 당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연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훗날 프랑스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게 될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조우였습니다.테레자 탈리앵의 살롱에서 한직에 머물고 있던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10월 15일에 총재 폴 바라스가 주최한 만찬에서 정식으로 소개받으며 인연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796
[나폴레옹과의 두 번째 결혼]
열정적인 구애를 퍼붓던 젊은 장군과 파리에서 서둘러 민사 결혼식을 올립니다. 신랑은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기 직전이었기에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소수의 증인만 참석한 채 식을 치렀습니다. 이때 남편으로부터 새로운 애칭을 부여받으며 삶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파리 2구 시청인 몽드라공 저택에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나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조제핀은 나이를 4살 줄이고, 나폴레옹은 1살을 늘려 혼인 신고서를 위조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이라는 애칭으로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798
[승전 장군의 아내로 얻은 명성]
남편이 원정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자, 그녀 역시 대중의 엄청난 환호와 인기를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국가 최고위직 인사가 그녀를 위한 성대한 축하 무도회를 열어주며 확고한 사회적 입지를 다집니다. 사교계의 여왕을 넘어 국가적인 유명 인사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외무부 장관 탈레랑이 그녀를 위해 외무부 본부에서 성대한 무도회를 개최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체류 기간 동안 조제핀은 젊은 장교 이폴리트 샤를과 내연 관계를 맺고 군수품 사업에 관여하며 나폴레옹의 극심한 질투와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1799
[제1통령의 부인, '영사 부인']
남편이 군사 정변을 통해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그녀 역시 국가의 안주인으로 격상됩니다. 화려한 궁전에 입성하여 사실상의 군주 배우자 역할을 수행하며 공식적인 외교 및 의전 활동을 도맡게 됩니다. 망명 귀족들의 귀환을 돕는 등 막강한 비공식 정치 권력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이 제1통령(Consul)이 되면서 뤽상부르 궁전에 입주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 그녀의 막강한 위치를 일컬어 '영사 부인(Consulesse)'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외교 사절들은 나폴레옹을 접견한 후 의무적으로 그녀를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1800
[튈르리 궁전 입성]
최고 권력자의 거처가 과거 프랑스 국왕들이 머물던 역사적인 궁전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거처를 이동합니다. 혁명의 상흔이 짙게 남아있는 칙칙한 궁전의 분위기를 몹시 답답해하며 개인적인 휴식처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권력의 최중심지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어 짙은 고독함을 느낍니다.나폴레옹이 뤽상부르 궁전이 너무 좁다고 판단하여 옛 왕궁인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국정 운영으로 바쁜 남편을 대신해 그녀는 주로 자신만의 안식처인 말메종 성에서 주말을 보내며 정원 가꾸기와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1804
[프랑스 제국의 황후 등극]
제정이 선포되며 남편이 황제의 자리에 오름에 따라, 마침내 프랑스의 제1대 황후로 공식 추대됩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소녀가 유럽 최고 권력의 정점에 서는 영화로운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을 이을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댁 식구들의 끈질긴 이혼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제1제국이 선포되면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황후(Impératrice des Français)가 되었습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형제자매들은 그녀가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에게 이혼을 강력하게 종용했으나, 나폴레옹은 초창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대관식]
파리의 웅장한 대성당에서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됩니다. 황제관을 스스로 쓴 남편으로부터 직접 황후의 관을 수여받으며 영원한 제국의 안주인으로 만천하에 인정받습니다. 이 아름답고 극적인 장면은 거장 화가의 거대한 화폭에 담겨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관을 쓴 후 무릎을 꿇은 조제핀에게 황후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이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명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05
[이탈리아의 왕비 즉위]
프랑스 제국의 팽창과 영토 확장에 따라 새롭게 창설된 왕국의 왕비라는 거창한 직함을 추가로 얻게 됩니다. 남편의 권력이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가면서 그녀의 명예 역시 유례없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비록 실질적인 통치권은 없었으나 제국의 엄청난 위엄을 상징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나폴레옹이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1805년 3월 17일부터 1809년 12월 16일까지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의 왕비(Reine d'Italie)' 칭호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장남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통치를 대행했습니다.
1806
[사생아 '레옹'의 탄생과 위기]
황제의 여동생 밑에서 일하던 시녀가 남편의 첫 번째 사생아를 출산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동안 후사가 없는 것이 황제 측의 불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마저 산산조각 나게 됩니다. 자신만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비극적 사실이 입증되면서 폐위의 위협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의 시녀였던 엘레오노르 드뉘엘 드 라 플레뉴가 나폴레옹의 사생아 '레옹'을 낳았습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자신이 생식 능력이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고, 제국의 대를 이을 적자를 얻기 위해 조제핀과 이혼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1809
[제국을 위한 이혼 동의]
황실의 굳건한 안위와 핏줄을 이어갈 적자가 필요하다는 국가적 요구 앞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이혼을 받아들입니다.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매정한 권력의 논리에 굴복하고 맙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혼 동의서를 낭독하며 스스로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조제핀은 가족과 측근들이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쏟으며 결혼 생활을 끝내는 문서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다음 날인 12월 16일, 프랑스 황후 및 이탈리아 왕비의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해임되었으며, 나폴레옹은 이후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루이즈와 정략재혼을 하게 됩니다.
1810
[나바르 여공작 작위 수여]
이혼 후에도 전 남편은 그녀를 각별히 예우하며 거대한 영지와 함께 새로운 귀족 작위를 하사합니다. 비록 황궁의 안주인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막대한 부와 명예를 유지하며 우아한 은퇴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국의 통치자 곁에서 한 영지의 지배자로 신분이 변화하는 위로의 순간이었습니다.이혼 이후에도 전례 없이 '황후'의 칭호를 평생 유지하도록 허락받았으며, 1810년 4월 8일 나폴레옹으로부터 나바르 여공작(Duchesse de Navarre) 작위와 성을 수여받았습니다. 이후 자신이 사랑하던 말메종 성과 나바르 성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1814
[말메종에서의 영면]
전 남편이 폐위되어 섬으로 귀양을 간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안식처였던 성에서 급작스럽게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납니다. 적국의 군주들이 앞다투어 다녀갈 정도로 국제적인 존경을 받았던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장 매혹적이고 우아했던 여인의 조용한 최후였습니다.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된 직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등 승전 연합군 군주들을 말메종 성에서 예우하며 접대하던 중 심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결국 폐렴(혹은 디프테리아)으로 악화되어 50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뤼에유말메종의 생피에르생폴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