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앤 크로퍼드

num_of_likes 99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배우, 댄서, 영화인 영화/드라마 배우

초년 댄서로 시작해 1920년대 재즈 시대 왈가닥 소녀 역할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후기에는 심리적 멜로드라마 스타, 육체파 배우로 변신하며 다양한 면모를 선보였습니다.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베티 데이비스와의 평생 라이벌 관계, 네 번의 결혼, 입양 자녀 등 드라마틱한 사생활로도 대중의 이목을 끌었으며, 말년에는 알코올 및 니코틴 중독을 겪었습니다. 사후 게이 아이콘으로도 불리며 대중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4

[불우했던 어린 시절]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루실 페이 러슈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새아버지에게도 버림받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조앤 크로퍼드는 1904년 3월 23일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생후 10개월 만에 아버지가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가 재혼했지만 11살 때 새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캔자스시티의 기숙사제 학교에서 학비 대신 청소, 식사 준비 등 잡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이는 훗날 결벽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4

[댄서로서의 시작]

뉴욕으로 건너가 빌리 캐신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클럽 댄서로 활동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용수로 데뷔했습니다.

1924년 조앤 크로퍼드는 뉴욕으로 가서 빌리 캐신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으며, 이후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무용수로 출연하며 무대 경험을 쌓았습니다.

1925

[MGM 계약 및 배우 데뷔]

브로드웨이에서 춤추던 중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와 5년간 영화 계약을 맺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며 영화 배우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25년 조앤 크로퍼드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활동하던 중 MGM 영화사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여 마침내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27

[톱스타를 향한 이미지 변신]

화려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며 매주 머리 색깔을 바꾸고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등 톱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27년 말, 조앤 크로퍼드는 자신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변신시키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매주 머리 색깔을 바꾸고, 다리가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며, 세련된 남성과 거리를 활보하는 등 영원한 톱의 자리를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8

['춤추는 딸들' 출연]

영화 '춤추는 딸들'에 출연하며 재즈 시대의 쾌활한 왈가닥 소녀 역할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1928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춤추는 딸들'에 출연하여 당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왈가닥 소녀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연기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29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의 첫 결혼]

할리우드 명문가 출신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했지만, 시어머니 메리 픽퍼드의 반대와 유산(낙태 고백) 등으로 4년 만에 파국을 맞았습니다. 클라크 게이블과도 깊은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1929년 6월, 조앤 크로퍼드는 할리우드 명문인 페어뱅크스 집안의 아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왕자와 신데렐라'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으나, 시어머니 메리 픽퍼드의 강한 반대와 아이 문제(유산 후 낙태였다고 고백) 등으로 갈등을 겪으며 4년 만인 1933년에 이혼했습니다. 이 시기에 클라크 게이블과도 연애 관계를 이어갔다고 고백했습니다.

1931

['춤, 바보, 춤' 출연]

영화 '춤, 바보, 춤'에 출연하며 뛰어난 춤 솜씨를 선보였습니다.

1931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춤, 바보, 춤'에 출연하여 그녀의 상징적인 매력 중 하나인 화려한 춤 실력을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1933

['춤추는 숙녀' 출연]

영화 '춤추는 숙녀'에 출연하여 여전히 건재한 춤 실력과 스타성을 과시했습니다.

1933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춤추는 숙녀'에 출연하며 변함없는 댄스 실력과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그녀는 화려한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935

[프랜쇼 톤과의 결혼과 이혼]

교양 있는 배우 프랜쇼 톤과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두 차례의 유산과 남편의 외도로 4년 만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1935년 10월 11일, 조앤 크로퍼드는 유복하고 교양이 풍부한 배우 프랜쇼 톤과 결혼했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으나 두 차례의 유산으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면서 결혼 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39년에 이혼을 단행했습니다.

1939

[딸 입양 및 '여인들' 출연]

프랜쇼 톤과 이혼 후 첫 딸 크리스티나를 입양하고, 심리적 멜로드라마 영화 '여인들'에 출연하며 연기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1939년, 조앤 크로퍼드는 프랜쇼 톤과의 이혼 후 딸을 입양하고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조안 크로퍼드라고 지었다가 수개월 후에 크리스티나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같은 해 영화 '여인들'에 출연하며 기존의 왈가닥 소녀 이미지를 벗고 심리적 멜로드라마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40

[연기력 인정받은 작품 활동]

영화 '수잔과 하느님', '이상한 짐' 등 인상적인 초기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수잔과 하느님'과 '이상한 짐' 등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단순한 스타를 넘어선 배우로서의 역량을 증명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그녀가 심리적 멜로드라마 분야에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41

['여자의 얼굴' 출연]

영화 '여자의 얼굴'에 출연하며 계속해서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습니다.

1941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여자의 얼굴'에 출연하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호화로운 드레스와 모피를 두른 성공한 여인 역으로 자주 등장하며 육체파 배우의 이미지를 강화했습니다.

1942

[필립 테리와의 결혼 및 아들 입양]

배우 필립 테리와 세 번째로 충동적인 결혼을 했고, 아들 필립 테리 주니어(후에 크리스토퍼 크로퍼드로 개명)를 입양했습니다.

1942년, 서른여덟 살의 조앤 크로퍼드는 다섯 살 연하의 배우 필립 테리와 불과 6주일 만에 충동적으로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 생활 동안 두 번째 자녀인 아들을 입양했으며, 이름을 필립 테리 주니어라고 지었지만, 이혼 후 크리스토퍼 크로퍼드로 개명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애정이 없는 기계적인 관계로 4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1945

['밀드레드 피어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에 출연해 감정적이고 야심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그려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 연기 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여급에서 레스토랑 체인점의 주인으로 성장하는 감정적이며 야심 있는 여인을 열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연기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그녀는 더욱 수준 높은 영화들에 출연하게 됩니다.

1946

[필립 테리와 이혼]

필립 테리와 이혼하며 세 번째 결혼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1946년, 조앤 크로퍼드는 배우 필립 테리와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세 번째 결혼 생활을 종결하게 되었습니다.

1947

[두 딸 입양 및 '유모레스크' 출연]

두 딸 캐시와 신시아를 입양하고, 영화 '유모레스크'에 출연했습니다.

1947년, 조앤 크로퍼드는 캐시와 신시아라는 두 딸을 입양했습니다. 딸들은 서로 생판 남남이고 생년월일도 얼굴도 닮지 않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딸들을 쌍둥이 취급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영화 '유모레스크'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52

['서든 피어' 출연]

영화 '서든 피어'에 출연하며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1952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서든 피어'에 출연하여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밀드레드 피어스' 이후 수준 높은 영화들에 연달아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955

[펩시 사장 앨프리드 스틸과의 마지막 결혼]

펩시 사장이자 정력적인 사업가 앨프리드 스틸과 네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스틸이 사망하기 전까지 부부가 함께 펩시 판매 촉진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았습니다.

1955년 5월, 쉰두 살의 조앤 크로퍼드는 펩시 사장이었던 앨프리드 스틸과 네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부부는 스틸이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펩시 판매 촉진을 위해 전 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결혼 생활은 그녀의 생애 마지막 결혼이었습니다.

1957

['에스더 코스텔로의 이야기' 출연]

영화 '에스더 코스텔로의 이야기'에 출연하여 계속해서 연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57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에스더 코스텔로의 이야기'에 출연하며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이 시기에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1959

[남편의 사망과 중독]

남편 앨프리드 스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흡연량과 알코올 섭취가 급격히 늘어 알코올 및 니코틴 중독에 시달렸습니다.

1959년, 남편 앨프리드 스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조앤 크로퍼드의 흡연량과 알코올 섭취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니코틴 중독에 시달리며 말년에는 고농도 보드카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1962

[베티 데이비스와의 라이벌전 '제인의 말로' 출연]

평생의 라이벌 베티 데이비스와 영화 '제인의 말로'에 함께 출연했습니다. 촬영 내내 두 배우의 불화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영화 홍보에도 이용되었습니다.

1962년, 조앤 크로퍼드는 평생의 라이벌 관계였던 베티 데이비스와 영화 '제인의 말로'에 함께 출연했습니다. 영화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실제 라이벌 관계로 알려져 있으며, 촬영장에서도 서로에게 날 선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베티 데이비스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자 조앤은 시상식에 불참한 베티 대신 직접 수상자에게 트로피를 전달하며 오욕감을 안겼습니다.

1963

['관리인' 출연]

영화 '관리인'에 출연하며 후기에도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1963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관리인'에 출연하여 자신의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말년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964

['공포의 환상' 출연]

영화 '공포의 환상'에 출연하며 호러 영화 장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1964년 조앤 크로퍼드는 공포 영화 '공포의 환상'에 출연하여 이색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1967

['서커스 살인' 출연]

영화 '서커스 살인'에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7년 조앤 크로퍼드는 영화 '서커스 살인'에 출연하며 중년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계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오랜 경력의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72

[배우 활동 은퇴]

배우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1972년은 조앤 크로퍼드가 배우로서 활발한 활동을 마무리한 해로 기록됩니다. 약 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크린과 브로드웨이를 오가며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그녀의 현역 생활이 막을 내렸습니다.

1977

[췌장암으로 사망]

뉴욕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장에는 1,500명의 팬들이 모여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1977년 3월 10일, 조앤 크로퍼드는 뉴욕에서 췌장암으로 향년 68-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년에 알코올 중독과 니코틴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병원 치료를 거부한 채 집에서 간호사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1,500명의 팬들이 참석하여 그녀를 추모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조앤 크로퍼드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