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num_of_likes 57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조남철
바둑 기사 + 카테고리
대한민국 현대 바둑의 위대한 개척자이자 영원한 대국수(大國手)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프로 기사에 입단하였고,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하며 오늘날 한국 바둑의 튼튼한 뼈대를 세웠습니다. 순장바둑 대신 현대식 바둑 규칙을 도입하고 일본어 바둑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등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1950~60년대 국수전 9연패 등 국내 기전을 싹쓸이하며 '조국수'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1인자로 군림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바둑 학문의 체계화와 보급에 앞장섰으며, 이러한 눈부신 평생의 업적을 기려 사후 금관문화훈장 추서 및 바둑계 유일무이한 대국수 칭호를 헌정받았습니다. 혼란했던 한국 현대사 속에서도 오직 바둑 외길을 걸으며 한국을 세계 최강의 바둑 강국으로 이끈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23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출생]

아버지 조봉구와 어머니 김유현의 3남 중 막내로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 우포리에서 태어남.
그의 호는 송원(松垣)이며 본관은 풍양 조씨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우며 남다른 재능과 총명함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31

[교동보통학교로 전학]

전북 부안의 줄포보통학교를 수개월 다니다가 경성부로 가족이 이사하며 경성교동보통학교로 전입학함.
가족과 함께 상경하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학업과 바둑을 병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더욱 넓은 세상에서 바둑에 집중할 수 있는 훌륭한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1934

[일본 프로기사 기타니 미노루와의 만남]

중국 방문 후 경성에 들른 전설적인 프로기사 기타니 미노루가 조남철의 소문을 듣고 직접 지도 바둑을 둠.
기타니 미노루는 어린 조남철의 뛰어난 바둑 실력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문하로 입문할 것을 적극 권유했습니다. 이는 훗날 조남철이 바둑을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7

[경성교동보통학교 졸업]

소년 조남철이 학업을 마치고 경성교동보통학교(현재의 서울교동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함.
당시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초등 교육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후 바둑에 대한 열정을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위해 짐을 꾸려 일본 유학을 치밀하게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 및 기타니 문하 입문]

만 14세의 나이로 바둑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의 문하생으로 정식 입문함.
과거 기타니 미노루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프로 기사 수련을 혹독하게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의 선진 바둑 문화와 기술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1941

[한국인 최초 일본기원 프로 입단]

만 17세의 나이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본기원 초단에 오르며, 한국인 사상 최초로 일본기원 정식 프로 기사가 됨.
식민지 출신이라는 여러 차별과 어려움을 완벽히 극복하고 당당히 프로의 반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빛나고 기념비적인 첫걸음으로 널리 평가받습니다.

1943

[조선으로의 귀향]

일본에서의 훌륭했던 기사 생활을 잠시 접고 조국인 조선으로 귀국함.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짙어지던 험악한 시기에 귀국하여 자국 땅에서 홀로 바둑을 연구했습니다. 이 고독한 시기를 통해 훗날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 바둑의 부흥을 어떻게 이끌지 깊이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44

[최충순 여사와 혼인]

전주 최씨 가문의 최충순과 백년가약을 맺고 단란한 가정을 꾸림.
이후 아내와의 사이에서 장남 조송연, 차남 조성연 등을 포함해 화목한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가족들의 헌신적이고 든든한 내조는 그가 평생 바둑 외길을 걸어가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45

[한성기원 설립 주도]

8.15 광복 직후 한국 바둑의 든든한 뼈대가 될 한성기원(한국기원의 전신)을 뜻있는 이들과 주도적으로 설립함.
한국 독자적인 바둑 조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애호가들의 뜻을 모아 최초의 단체를 창설했습니다. 특히 기존의 구시대적 순장바둑 대신 일본식 현대 바둑 규칙을 과감히 도입하여 세계화의 중요한 초석을 다졌습니다.

1948

[조선기원으로 명칭 변경]

기존 한성기원의 이름을 조선기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조직의 규모와 영향력을 크게 확장함.
단체의 규모와 성격을 서울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습니다. 이를 통해 흩어져 있던 더 많은 기사들과 바둑 애호가들을 하나로 굳게 결집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제1회 전국위기선수권 우승]

광복 후 국내에서 처음 열린 공식 기전인 제1회 전국위기선수권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차지함.
한국 바둑계 초창기에 자신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만천하에 입증한 상징적인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를 화려한 시작으로 국내 기전에서 독보적이고 맹렬한 우승 행진을 이어가게 됩니다.

1949

[대한기원으로 명칭 변경]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흐름에 발맞추어 단체의 이름을 대한기원으로 새롭게 변경함.
신생 국가의 기틀이 잡히는 과정에서 바둑 협회 역시 그에 걸맞은 국가적 위상을 갖추기 위해 발 빠르게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현대 바둑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하고 명확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0

[최초 승단 결정전 통해 3단 인정]

대한민국 최초로 엄격하게 실시된 공식 승단 결정전을 통해 뛰어난 기력을 입증받고 3단으로 승단함.
체계적인 단급 제도가 턱없이 부족했던 국내 바둑계에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승단 시스템이 정착하는 역사적인 시발점이었습니다. 그의 흔들림 없는 실력이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제도를 통해 완벽히 재확인되었습니다.

1951

[한국전쟁 참전 및 부상]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을 위해 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으며, 치열한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음.
전란의 포화 속에서도 피난 보따리에 쌀 등 생필품 대신 바둑 기보를 소중히 챙겨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바둑을 지독히 사랑했습니다. 참전 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큰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부친 조봉구 별세]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바둑돌 쥐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음.
험난한 피난과 전쟁의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랑하는 부친상을 당하는 큰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가르침은 그가 평생 훌륭한 바둑 기사로 살아가는 가장 든든하고 위대한 밑거름이었습니다.

1953

[육군 상등병 상이 제대]

한국전쟁 중 끔찍하게 입은 총상으로 인해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 몇 달 전 명예롭게 상이 전역함.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험난한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친 후 열정이 기다리던 바둑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전쟁의 깊은 상흔 속에서도 폐허가 된 한국 바둑을 재건하겠다는 뜨거운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1954

[최초 바둑 입문서 '위기개론' 출간]

어려운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 용어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여 알기 쉽게 정리한 '위기개론(圍碁槪論)'을 펴냄.
단수, 빵때림, 끝내기 등 현재 널리 쓰이는 친숙한 바둑 용어들이 바로 이때 훌륭한 우리말로 정립되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바둑을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엄청난 문명적 공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개편]

기존의 불안정했던 단체들을 확실하게 정비하여 법적 지위를 갖춘 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새롭게 출범함.
국가의 공적인 법적 승인을 받은 사단법인으로 재탄생함으로써 단체의 사회적 공신력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전후 복구 시기에 바둑 보급 사업을 보다 체계적이고 힘있게 진행할 수 있는 틀이 완성되었습니다.

1955

[전국위기선수권 5연패 달성]

1948년부터 시작된 전국위기선수권에서 제5회 대회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내리 우승하며 5연패의 대위업을 달성함.
전쟁 전후의 지독한 혼란 속에서도 굳건히 기력을 잃지 않고 국내 최강자의 자리를 흔들림 없이 지켰습니다. 당대 한국 바둑계에서는 감히 그의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실력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통합 한국기원 설립]

한국 바둑계의 분산된 힘을 하나로 단단히 모아 마침내 오늘날의 확고한 뼈대가 되는 한국기원을 공식 설립함.
산재해 있던 여러 중소 기원과 파벌들을 훌륭한 리더십으로 통합하여 단일화된 바둑 중앙 기구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향후 현대 한국 바둑의 눈부신 양적, 질적 발전을 견인하는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었습니다.

1956

[제1기 국수 제1위전 우승]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며 새롭게 창설된 제1기 국수 제1위전에서 영광스러운 초대 우승자로 등극함.
이 뜻깊은 우승을 거치며 그는 국민들 사이에서 '조국수'라는 애칭을 얻었고 전 국민적인 명성을 떨쳤습니다. 한국 바둑계에서 최고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타이틀을 획득한 눈부신 순간이었습니다.

1958

[제1기 왕좌전 우승]

새로운 바둑 기전인 제1기 왕좌전에서 탁월한 수읽기와 기량으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함.
신설되는 메이저 기전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첫 번째 우승을 휩쓸며 당대 일인자의 무서운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타의 추종을 완벽하게 불허하는 독보적인 반면 운영 능력을 어김없이 뽐냈습니다.

1959

[제1기 5강전 우승]

국내 최정상급 기사 단 5명만 선별해 모인 제1기 5강전에서 치열한 격전 끝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림.
국수전, 왕좌전에 이어 별들의 전쟁인 5강전까지 완벽히 석권하며 전관왕의 신화를 화려하게 써내려갔습니다. 1950년대 한국 바둑계는 사실상 조남철 한 사람을 위한 완벽한 독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1960

[제1기 최고위전 우승]

부산일보가 창설한 제1기 최고위전에 출전하여 도전자들을 꺾고 압도적인 전승을 거두며 우승함.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주요 기전의 초대 우승을 가차 없이 싹쓸이하는 실로 경이로운 대기록을 작성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통쾌한 우승 행진은 대중들의 바둑에 대한 관심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켰습니다.

1962

[5강전 4연패 대기록 작성]

1959년 첫 우승 이후 제4기 대회까지 5강전에서 후배들을 물리치고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함.
방어전 성격을 띤 도전기 형식의 기전에서 숱한 도전을 물리치고 연이어 방어에 성공하며 강철 같은 기력을 뽐냈습니다.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수성하며 후배 기사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으로 군림했습니다.

1964

[국수 제1위전 9연패 달성]

1956년 제1기부터 시작된 최고 권위의 국수 제1위전에서 무려 9회 연속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업을 달성함.
9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국수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은 바둑계의 전설적인 기록입니다. 이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서 '국수'라는 칭호 자체가 으레 조남철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1967

[최고위전 7연패 금자탑]

제1기 최고위전 우승 이후 제7기까지 무서운 기세로 타이틀을 방어하며 영광스러운 7연패를 이룩함.
60년대 중반부터 김인 등 새로운 젊은 강자들이 거세게 등장했음에도 끈질기게 타이틀을 방어해냈습니다. 최전성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나이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무서운 기량을 전 국민에게 과시했습니다.

[어머니 김유현 별세]

자신을 낳고 평생 지지해주신 어머니 광산 김씨 김유현 여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남.
바둑 가문으로서 가족의 따뜻한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를 잃는 커다란 개인적인 슬픔을 겪었습니다. 한국 바둑계의 최고 원로로 흔들림 없이 자리 잡아가던 시기에 맞이한 무거운 모친상이었습니다.

1968

[제1기 명인전 우승]

당대 최고의 스폰서와 규모를 자랑하며 신설된 제1기 명인전에서 쟁쟁한 후배들을 꺾고 초대 우승을 차지함.
후배 김인의 시대가 도래하며 1인자 자리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듯했으나, 이 새로운 대형 기전에서 관록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며 당당히 정상에 올랐습니다. 승부를 향한 그의 꺼지지 않는 불타는 투혼이 빛을 발한 뜻깊은 대회였습니다.

1969

[제3기 왕좌전 우승]

일정 기간의 공백기를 훌륭히 거치고 다시 제3기 왕좌전에 도전하여 우승컵을 거머쥐며 타이틀을 화려하게 탈환함.
혈기 왕성한 젊은 후배 기사들의 맹렬하고 거센 도전 속에서도 특유의 노련한 수읽기와 탁월한 반면 운영으로 우승을 탈환했습니다. 자신이 한국 바둑계의 흔들림 없는 살아있는 전설임을 거듭 세상에 증명해 보였습니다.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개편]

기존의 사단법인 형태 체제를 기반으로 더욱 탄탄하고 안정적인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조직의 체제를 완벽히 개편함.
단체의 재정과 복잡한 행정을 더욱 투명하고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필수적이고 중대한 절차였습니다. 이로써 한국기원은 명실상부한 국가 대표 바둑 중앙 기관으로서의 틀을 완벽하고 견고하게 갖추게 되었습니다.

1971

[제3기 명인전 우승]

피 말리는 치열한 승부 끝에 제3기 명인전에서 다시 한번 영광의 우승컵을 높이 들어올림.
50대에 접어든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 최정상급의 뛰어난 실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바둑 팬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그의 식지 않는 승부에 대한 엄청난 집념은 수많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1972

[명인전 결승전 서봉수에게 뼈아픈 패배]

명인전 결승 무대에서 당시 갓 입단한 패기 넘치는 신예 서봉수 2단에게 뜻밖의 일격을 당해 준우승에 머묾.
대국 후 패배의 쓴잔을 마시며 "서봉수가 3단만 되었어도..."라며 아쉬움을 짙게 삼켰다는 일화가 바둑계에 유명하게 남았습니다. 이 대국은 서봉수라는 새로운 야생마 천재의 무서운 등장을 알리는 동시에 한국 바둑계의 거대한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1973

[제1기 최강자전 우승]

새롭게 문을 연 제1기 최강자전에서 쟁쟁한 후배들을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초대 우승을 차지함.
공식 기전에서 그가 빛나는 투혼으로 이룩한 사실상 마지막 메이저 타이틀 우승 기록이었습니다. 은퇴를 서서히 향해 가는 인생의 황혼기에도 여전한 승부사의 맹렬하고 날카로운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1983

[9단 특별 승단]

한국 바둑의 기틀을 닦고 발전에 기여한 막대한 공로를 전폭적으로 인정받아 특별 승단 형식을 통해 영예로운 9단에 오름.
오랜 세월 바둑 보급에만 헌신하느라 승단 대회에 출전하지 못해 무려 20여 년간 8단에 머물러 있었으나, 마침내 프로 최고의 단위인 입신(入神)에 올랐습니다. 그를 9단으로 모셔야 한다는 한국기원 일각의 지속적인 건의가 대승적으로 수용된 훌륭한 결과였습니다.

1984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추대]

한국기원의 역사적인 창설자이자 최고의 일등 공신으로서 기원의 최고 예우인 명예이사장 직에 추대됨.
치열했던 프로 현역 승부사에서 한발 물러나 바둑계의 가장 존경받는 큰 어른으로서 행정과 대외 활동에 묵묵히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따뜻한 조언과 헌신 덕분에 한국 바둑은 더욱 탄탄한 내실을 다지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기원 대창상(大倉賞) 수상]

현대 바둑의 보급과 한일 양국 간의 바둑 교류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일본기원으로부터 권위 있는 오쿠라상(대창상)을 수상함.
어린 시절 꿈을 안고 유학했던 일본에서 그의 위대한 평생의 업적을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해 준 무척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한국 바둑의 실력 향상뿐 아니라 양국 바둑계의 우호적인 관계 발전에도 지대하게 기여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1989

[은관문화훈장 수훈]

평생을 묵묵히 바쳐 대한민국 바둑이라는 문화 예술 발전에 헌신한 눈부신 공로로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함.
오랜 시간 잡기로 치부받던 바둑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국가의 자랑스러운 문화 예술로 당당히 공식 인정받았음을 상징하는 값진 훈장이었습니다. 조남철 개인의 영광을 훌쩍 넘어 대한민국 바둑계 전체가 환호한 크나큰 경사였습니다.

1990

[큰형 조남식 별세]

자신을 아껴주던 혈육이자 가문의 큰 기둥이었던 조남철의 첫째 형인 조남식이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남.
수많은 기사를 배출한 바둑 명문가로서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형을 영원히 잃는 짙은 슬픔을 겪었습니다. 큰형의 핏줄인 외손자 최규병 등 가문의 훌륭한 바둑 핏줄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흔들림 없이 이어져 내려가게 됩니다.

1994

[제18기 국기전 최고령 본선 진출]

무려 71세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후배들을 꺾고 제18기 국기전 본선 무대에 당당히 진출하는 놀라운 노익장을 과시함.
자식뻘, 손자뻘 되는 까마득한 젊은 후배 기사들과의 치열한 반상 경쟁을 뚫고 이룩한 경이로운 성과로 바둑 팬들의 뜨거운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승부를 향한 그의 바둑에 대한 지독한 열정이 여전히 펄펄 끓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바둑문화상 감투상 수상]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현역에서 물러나지 않고 불꽃 튀는 승부를 훌륭히 펼친 공로로 바둑문화상 감투상을 받음.
고령의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기전 등 공식 기전에서 보여준 지치지 않는 숭고한 승부욕을 바둑계 전체가 머리 숙여 높이 기린 뜻깊은 상입니다. 젊은 후배 기사들에게 진정으로 승부에 임하는 구도자적 자세를 따끔하게 일깨워주었습니다.

1995

[동아일보 명예 국수 칭호 수여]

전통 깊은 국수전을 주최하는 언론사 동아일보로부터 바둑계에서 유일무이한 영광인 '명예 국수' 칭호를 헌정받음.
과거 전성기 시절에 이룩한 국수전 9연패라는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업적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제정된 고귀한 호칭입니다. 이 자랑스러운 명예 국수 칭호를 정식으로 부여받은 기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조남철이 유일합니다.

1997

[명지대학교 바둑지도학과 객원교수 임용]

세계 최초로 명지대학교 예체능대학에 바둑 관련 정규 학과가 개설되자,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해당 학부의 객원교수로 특별 임용됨.
자신의 일생일대에 걸친 심오한 바둑 철학과 무수한 실전 노하우를 대학 강단에 서서 젊은 후학들에게 직접 전수하게 되었습니다. 바둑이 단순한 게임을 넘어 정식 학문의 고등 영역으로 당당히 편입되는 데 엄청난 상징성을 부여했습니다.

1998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 수상]

대한민국 대중 문화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한 빛나는 업적을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아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수상함.
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평생을 바쳐 바둑 보급에 앞장서고, 낯선 일본어 바둑 용어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순화한 개척자적 업적 등이 폭넓게 인정받았습니다. 바둑을 넘어 일반 대중 문화계에 끼친 그의 위대한 영향력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수상이었습니다.

[둘째 형 조남석 별세]

전설적인 바둑 천재 조치훈 9단의 친아버지이자 조남철 자신의 우애 깊은 둘째 형인 조남석이 영면에 듦.
세계적인 스타 조치훈, 조상연 등을 훌륭한 바둑 기사로 훌륭히 키워낸 둘째 형의 안타까운 별세로 남은 가족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조남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가족이자 바둑계의 큰 조력자를 가슴 아프게 떠나보내는 순간이었습니다.

1999

[공식 은퇴 및 생애 마지막 대국]

1941년 어린 나이에 입단한 이후 무려 58년간 흔들림 없이 이어온 기나긴 프로 바둑 기사 생활을 공식 대국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마감하며 은퇴함.
고령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의 치열한 피 말리는 승부를 멈추고 정들었던 반상에서 조용하고 담담하게 내려왔습니다. 한평생을 바쳐 한국 바둑의 위대한 개척자로 살아온 거장의 몹시도 아름답고 숭고한 마무리가 뭉클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000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지정]

과거 참혹했던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참전하여 입은 끔찍한 부상과 그 헌신적인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정식 지정됨.
평생토록 고요한 바둑판 위에서 무혈의 승부를 펼친 기사이자, 조국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서 기꺼이 총을 들었던 참전 용사로서의 명예를 동시에 안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바친 그의 고귀한 희생이 영광스럽게 빛을 보았습니다.

2006

[노환으로 조용히 영면]

향년 82세를 일기로 서울 신당동의 자택에서 깊은 노환으로 인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남.
한국 현대 바둑의 살아 숨 쉬는 역사이자 모든 바둑인의 위대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각계각층의 뜨거운 애도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깊은 애도의 뜻을 담아 빈소에 조화를 보내 고인의 빛나는 업적을 엄숙히 추모했습니다.

[최고 존칭 대국수(大國手) 헌정]

그가 남긴 눈부시고 숭고한 업적을 한국 바둑사에 영원히 기리기 위해 한국기원과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대국수'라는 존칭을 영결식장에서 눈물 속에 헌정함.
뛰어난 기사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국수를 훌쩍 뛰어넘는 위대하고 거대한 국수라는 찬사의 뜻으로, 대한민국 바둑계 역사상 이 대국수 칭호를 받은 이는 오직 조남철 한 명뿐입니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모인 영결식을 짙은 눈물바다로 만든 대단히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헌정식이었습니다.

[금관문화훈장 영광스러운 추서]

타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문화예술 발전과 전 세계적인 국위 선양의 최고 공로를 국가로부터 확실히 인정받아 문화 훈장 중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됨.
과거 생전에 받았던 은관문화훈장에 이어 문화계 인사가 감히 오를 수 있는 가장 영예롭고 높은 훈장을 사후에 영광스럽게 받게 되었습니다. 신상옥 영화감독에 이어 고인에게 직접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국가적으로 대단히 이례적이고 뜻깊은 사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2019

2019.11.30 사후 13년

[일본기원 바둑 명예의 전당 헌액]

과거의 맞수 사카타 에이오 9단과 함께 일본기원이 엄격하게 심사하여 선정하는 제16회 바둑 명예의 전당(囲碁殿堂)에 자랑스럽게 헌액됨.
어린 시절 일본에서 고단하게 수학한 후 돌아와 한국 바둑을 세계적인 최강 수준으로 무섭게 끌어올린 그의 위대한 공로가 깐깐한 일본 바둑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완벽히 인정받은 영광스러운 결과입니다. 사후 13년이 훌쩍 지나서도 결코 잊히지 않는 그의 글로벌하고 거대한 영향력을 명백히 보여주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조남철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