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고려-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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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고려-거란 전쟁
전쟁, 역사, 고려 시대, 거란, 외교, 한중관계 + 카테고리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1010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고려는 통주 전투에서 주력군이 패배하고 개경이 함락되는 등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현종의 몽진과 양규, 김숙흥 등 무장들의 결사적인 게릴라전으로 거란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결정짓는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으며, 고려의 불굴의 항전 의지는 훗날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승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009

[강조의 정변 발생]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은 평소 고려를 주시하던 거란에 침공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됩니다. 고려 내부의 권력 구조가 급격히 재편되면서 전쟁의 서막이 오릅니다.

강조는 목종이 병석에 누운 틈을 타 김치양 일파가 왕위를 넘본다는 구실로 개경에 진입했습니다.
목종을 폐위하여 유배 보낸 뒤 살해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을 옹립하여 제8대 현종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이 소식은 즉각 거란에 전달되었고, 요 성종은 반역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친정(親征)을 결정합니다.

1010

[요 성종의 침공 선포]

거란의 요 성종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려 원정 계획을 공식 발표합니다. 거란은 대규모 군사 동원령을 내리고 압록강 인근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합니다. 고려 조정은 이에 대비해 서북면의 방어 태세를 점검합니다.

요 성종은 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는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며 주변국에 정당성을 홍보했습니다.
이는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가 동아시아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거란 40만 대군 침공]

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 고려 영토로 진입합니다. 고려는 이에 맞서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30만 대군을 북방으로 출전시킵니다. 양국 간의 전면적인 전쟁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거란군은 기병 위주의 강력한 기동력을 앞세워 압록강 동쪽 제1관문인 흥화진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강조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서북면의 요충지인 통주에 본진을 치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란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으며, 고려군은 성벽을 굳건히 지키며 거란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흥화진 전투와 양규]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가 이끄는 3천 명의 고려군이 거란의 40만 대군에 맞서 흥화진을 사수합니다. 거란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고하지만 양규는 끝까지 거부합니다. 거란군은 흥화진 함락이 어렵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남하합니다.

양규는 수성전의 달인답게 거란군의 파상공세를 창의적인 전술과 결사항전의 의지로 막아냈습니다.
요 성종은 항복을 권하는 친서를 여러 번 보냈으나 양규는 '군명을 받고 온 것이지 항복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며 일축했습니다.
흥화진의 항전은 거란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강조의 검차 전술 전개]

통주 부근에 진을 친 강조가 거란의 기병을 막기 위해 검차를 이용한 방어 전술을 펼칩니다. 검차는 수레에 칼을 꽂아 기병의 돌격에 대항하는 장비로 초기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철통같은 방어망에 당황하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검차는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거란의 강력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한 전략 자산이었습니다.
거란군이 접근하면 검차를 앞세워 돌격을 저지하고, 그 사이 궁수들이 화살을 퍼부어 적을 섬멸했습니다.
초반 승기를 잡은 강조는 자만심에 빠져 '적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와도 우리 검차를 당해낼 수 없다'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통주 전투와 강조의 패배]

거란군이 고려군의 방심을 틈타 통주 본영을 기습 공격하여 강조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강조는 미처 대처하지 못한 채 포로로 잡히고 고려의 주력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개경까지 이르는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됩니다.

강조는 막사 안에서 바둑을 두다가 적군이 본영까지 들이닥쳤다는 보고를 믿지 않을 정도로 방심했습니다.
거란의 정예 기병이 검차 방어선의 틈을 뚫고 지휘부를 직접 타격하자 고려군은 지휘 체계를 잃고 와해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 3만 명이 전사했으며, 강조는 요 성종 앞에 끌려가 신문을 받게 됩니다.

[강조의 장렬한 죽음]

사로잡힌 강조가 요 성종의 회유를 뿌리치고 고려의 신하임을 자처하며 처형됩니다. 요 성종은 강조의 용맹을 아껴 자기 신하가 될 것을 권했으나 강조는 끝내 거절합니다. 그의 죽음은 정변의 주모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충절의 모습으로 기록됩니다.

요 성종이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고 묻자 강조는 '나는 고려의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함께 잡힌 부하들이 회유에 흔들릴 때도 강조는 그들을 꾸짖으며 고려의 기개를 지켰습니다.
결국 그는 잔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곽주의 함락]

통주를 점령한 거란군이 남하하여 서북면의 또 다른 요충지인 곽주를 공격해 함락시킵니다. 곽주는 고려의 군량과 병기가 집중된 곳으로 거란군에게 중요한 보급 기지가 됩니다. 고려 조정은 곽주의 함락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대응책을 고심합니다.

거란군은 통주 전투의 승기를 몰아 곽주 성벽을 맹렬히 공격하여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곽주를 지키던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후퇴하면서 서북면의 방어 체계는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요 성종은 이곳에 6천 명의 수비대를 남겨 후방을 안정시키고 본격적인 개경 진격 준비를 합니다.

[서경 방어전 시작]

거란군이 고려의 제2수도인 서경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자 중랑장 지채문 등이 결사 항전합니다. 서경의 수뇌부는 한때 항복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애국심 강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성문을 닫고 버팁니다. 서경은 개경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최후의 보루가 됩니다.

거란군은 통주에서 노획한 강조의 서신을 위조하여 서경에 보내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서경 부유수 원종석 등은 항복하려 했으나, 지채문과 강민첨 등이 군사들을 선동하여 항전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지채문은 성 밖으로 나가 거란군과 직접 부딪치며 시간을 벌었고, 이는 개경의 현종이 피란을 준비할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현종의 몽진 결정]

거란군이 서경을 우회하여 개경 근처까지 다가오자 현종은 강동 6주 반환 대신 피란(몽진)을 선택합니다. 강감찬 등 소장파 관료들이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남행을 건의합니다. 고려 국왕이 궁궐을 비우고 남쪽으로 떠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신하가 항복을 권할 때 강감찬은 '지금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지쳐 있으니 피했다가 나중에 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종은 왕비들과 일부 측근만을 데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국왕의 부재로 개경의 인심은 흉흉해졌으며 도성은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현종의 수난과 지채문]

몽진 길에 오른 현종이 적성현에서 지방 아전과 군사들의 습격을 받는 위기에 처하지만 지채문의 활약으로 구조됩니다. 왕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호종하던 신하들도 상당수 도망칩니다. 지채문은 끝까지 현종의 곁을 지키며 충성을 다합니다.

피란길은 험난했고 왕을 알아본 지방 세력들은 오히려 왕을 체포하여 거란에 넘기려 하거나 재물을 탈취하려 했습니다.
지채문은 활을 쏘아 습격자들을 물리치고 왕을 말에 태워 산속으로 피신시키는 등 사투를 벌였습니다.
이 수난은 현종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훗날 성군으로 거듭나는 고통스러운 밑거름이 됩니다.

1011

[양규의 곽주 탈환 작전]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가 별동대를 이끌고 거란군이 점령했던 곽주를 기습하여 탈환합니다. 수비대 6천 명을 전멸시키고 곽주 안에 잡혀 있던 고려인 포로 7천여 명을 구출해냅니다. 이 승리는 거란군의 보급로와 후방 연락망을 끊어버리는 전략적 대승이었습니다.

양규는 통주 전투 이후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밤을 틈타 곽주 성벽을 넘었습니다.
거란군은 후방인 곽주가 공격받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해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궤멸되었습니다.
양규는 탈환한 곽주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고 다시 흥화진으로 복귀하며 게릴라전의 정석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종의 나주 도착]

온갖 고초를 겪은 현종이 피란처인 전라도 나주에 도착하여 안정을 찾습니다. 나주 백성들과 호남 지역 호족들은 왕을 정중히 영접하며 항전 의지를 북돋웁니다. 고려 조정은 나주를 임시 수도 삼아 전쟁 지휘를 이어갑니다.

몽진 길의 삼엄한 추위를 뚫고 남쪽 끝까지 내려온 현종은 이곳에서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
왕의 안위가 확인되자 전국 각지의 군사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반격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나주는 전쟁 기간 동안 고려 왕실을 지켜준 든든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공진의 평화 협상 시도]

현종의 명을 받은 하공진이 거란 진영을 찾아가 왕이 친조(왕이 직접 방문)하겠다는 조건으로 철군을 제안합니다. 이는 거란군의 철군을 유도하기 위한 고려의 고도의 외교적 기만전술이었습니다. 요 성종은 전쟁 장기화에 따른 부담으로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합니다.

하공진은 거란 황제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고려 왕의 뜻을 전하며 거란군의 퇴로를 열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거란군은 겨울 추위와 보급 부족, 양규 일파의 후방 공격으로 인해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요 성종은 '고려 왕이 직접 온다면 물러가겠다'는 약속을 믿고 마침내 철군 명령을 내립니다.

[거란군의 개경 점령]

거란 대군이 텅 빈 고려의 수도 개경에 무혈 입성하여 궁궐과 도성을 불태웁니다. 요 성종은 현종의 행방을 쫓으며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지만 왕을 찾지 못해 분노합니다. 개경의 수많은 문화유산과 기록물들이 화마 속에 사라집니다.

거란군은 개경의 종묘와 사직, 화려한 궁궐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도성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고려의 건국 정신이 담긴 초기 역사 기록물들이 이때 대거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요 성종은 개경에 머물며 고려의 완전한 굴복을 기다렸으나, 북방에서 들려오는 아군의 패전 소식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거란군의 철군 시작]

요 성종이 고려의 친조 약속을 받고 약탈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챙겨 북쪽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장수들은 거란군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으며, 퇴각 경로를 따라 매복 작전을 펼칩니다. 거란군에게는 철수 길이 오히려 죽음의 행군이 됩니다.

거란군은 승전국인 양 거들먹거리며 개경을 떠났으나 보급이 끊겨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왕이 직접 오겠다는 말은 시간을 벌기 위한 고려의 계략이었음을 거란군은 곧 깨닫게 됩니다.
고려의 산악 지형은 기병 위주의 거란군에게는 최악의 퇴각로가 되었습니다.

[귀주 전투와 양규의 매복]

양규가 귀주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퇴각하던 거란군 선봉대를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사살합니다. 거란군은 보급로 점령에 이어 퇴각로까지 차단당하자 극심한 공포에 빠집니다. 고려군은 적의 기를 꺾으며 포로가 된 백성들을 구출하는 데 집중합니다.

양규는 거란군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예측하여 좁은 길목에서 일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의 중견 장수들이 다수 전사했으며, 거란의 지휘 체계는 심각하게 흔들렸습니다.
양규는 승세를 몰아 다음 거점인 무로대로 이동하며 연속적인 타격 작전을 계획합니다.

[무로대 전투의 승리]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가 무로대에서 거란군과 충돌하여 적 2천여 명의 머리를 베는 전과를 올립니다. 고려군은 적은 병력으로도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거란의 대군을 농락합니다. 거란군은 보급품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집니다.

양규는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 2천여 명을 구출하여 후방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습니다.
김숙흥은 저돌적인 공격으로 거란군의 진형을 파괴하며 양규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습니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신출귀몰한 공격에 밤낮으로 불안에 떨며 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이수 전투의 전과]

고려군이 이수 지역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다시 한번 기습하여 2천 5백여 명을 사살합니다. 양규 일파의 끈질긴 추격전에 거란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고려군은 구출된 백성들을 통해 거란군의 전력을 실시간으로 파악합니다.

연이은 승보에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거란군은 이제 생존을 위한 탈출에 급급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수천 점의 갑옷과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 수준을 높였습니다.
양규는 적의 본대가 오기 전에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술로 거란군의 진을 뺐습니다.

[석령 전투와 적장 사살]

석령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려군이 거란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백성 1천여 명을 구해냅니다. 거란군은 이제 조직적인 저항보다는 개별적인 탈출 시도가 늘어날 정도로 와해됩니다. 고려군은 적의 지휘관급 인물을 집중 타격하여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석령의 험준한 산세는 고려군의 매복에 최적의 장소였으며 거란 기병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은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거란군의 뒤를 밟으며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요 성종은 본인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여리참 전투의 혈전]

압록강을 향해 도망치던 거란군을 여리참에서 포착한 고려군이 1천여 명을 베며 압박합니다. 거란군은 이제 눈앞의 압록강만 건너면 산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전진합니다. 고려군은 마지막까지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잡기 위해 박차를 가합니다.

양규 부대는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애국심 하나로 추격전을 이어갔습니다.
이 전투에서 구출된 고려 백성들은 양규를 향해 통곡하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거란군은 이제 전열을 정비할 여유조차 없이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애전 전투와 양규의 순국]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소수의 고려군이 애전에서 요 성종의 본대와 마주쳐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들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던 두 장수는 온몸에 화살을 맞고 장렬히 순국합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수만 명의 고려 백성들이 구출될 수 있었습니다.

애전에서 양규는 거란 황제를 직접 타격할 기회를 잡았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었습니다.
적군이 쏜 수천 발의 화살 속에서도 두 장수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칼을 휘두르며 기개를 잃지 않았습니다.
요 성종은 그들의 용맹에 경탄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껴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서둘러 강을 건넜습니다.

[거란군의 압록강 도하]

양규 부대를 격파한 거란군이 서둘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퇴각을 완료합니다. 강을 건너는 도중 얼음이 깨져 수많은 병사와 말들이 수장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40만 대군으로 시작한 거란군은 만신창이가 된 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패퇴하는 거란군의 뒤를 쫓던 고려군의 화살이 강물 위로 쏟아졌습니다.
무거운 장비를 실은 수레들이 얼음 밑으로 가라앉으며 거란의 전리품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요 성종은 간신히 강을 건넜으나 고려를 정벌하려던 그의 야망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현종의 개경 환궁]

전쟁이 끝나자 나주를 떠난 현종이 폐허가 된 개경으로 돌아와 복구를 지시합니다. 왕은 불탄 궁궐과 도성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립니다. 고려는 이제 전후 복구와 더불어 더욱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다짐합니다.

현종은 환궁 길에 양규와 김숙흥의 유가족을 찾아 위로하고 파격적인 보상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시련은 현종을 단련시켰고, 고려 조정은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 성곽을 보수하고 군제를 개편하기 시작합니다.

[하공진의 순국]

인질로 잡혀갔던 하공진이 거란의 회유를 거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다 살해됩니다. 요 성종은 하공진의 재능을 아껴 자신의 신하로 삼으려 했으나 하공진은 탈출을 시도하며 고려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외교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사건이 됩니다.

하공진은 거란 땅에서 고려로 몰래 서신을 보내 군사 정보를 제공하려다 발각되었습니다.
요 성종이 '고려를 잊고 내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자 '내 마음은 고려에 있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그는 잔인하게 살해되었으나 고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리며 적국에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배웠습니다.

1012

[거란의 강동 6주 반환 요구]

전열을 정비한 거란이 현종의 친조 미이행을 구실로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 요구합니다. 고려는 현종의 건강을 핑계로 친조를 거부하며 거란의 요구를 일축합니다. 양국 사이에는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며 외교적 마찰이 심화됩니다.

거란은 전쟁의 명분이었던 강조 처단 이후 실리인 영토 획득을 위해 압박을 가했습니다.
현종은 '병이 깊어 먼 길을 갈 수 없다'는 외교 문서를 보내 거란의 요구를 교묘히 피해갔습니다.
이는 고려가 단순히 거란의 속국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며, 다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만들었습니다.

1013

[국방 강화와 나성 축조]

현종은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 개경 주변에 거대한 외성인 나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방어를 강화하고 군사 훈련을 정례화합니다. 고려는 이제 전쟁의 상처를 딛고 강력한 군사 강국으로 거듭나려 합니다.

나성 축조는 전쟁 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였습니다.
현종은 몸소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인부들을 격려하고 방어 전략을 꼼꼼히 챙겼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훗날 소배압의 거란 대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개경을 수호하는 결정적 기반이 됩니다.

1014

[송나라와의 외교 재개]

고려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합니다. 거란은 이에 분노하여 고려 사신을 가로막는 등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고려는 다각적인 외교를 통해 거란을 압박하려는 지략을 보여줍니다.

송나라와의 교류는 거란에게 큰 심리적 압박을 주었으며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현종은 거란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세력 균형을 이용한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사신들은 거란의 눈을 피해 바닷길을 이용하는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015

[거란의 국경 침범]

외교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거란군이 소규모 부대를 보내 고려의 북방 국경을 수시로 침범합니다. 고려의 서북면 장수들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며 거란의 간을 보는 전술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국경 지역에서는 일상적인 전투가 벌어지며 긴장이 지속됩니다.

거란은 고려의 방어 태세를 시험하기 위해 기병 부대를 보내 마을을 약탈하고 사라지는 전술을 썼습니다.
고려군은 양규의 정신을 이어받아 적의 침입 즉시 출동하여 격퇴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소모전은 양국 모두에게 피로감을 주었으나, 고려는 영토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1017

[거란의 흥화진 재공격 실패]

거란이 소배압을 보내 다시 한번 흥화진을 대규모로 공격하지만 고려군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실패합니다. 2차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려던 거란은 고려의 성곽 수비가 더욱 단단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려군은 적의 공성 장비를 파괴하며 대승을 거둡니다.

소배압은 수많은 군사를 동원했으나 고려의 끈질긴 저항과 철저한 준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흥화진 백성들은 장수들과 하나가 되어 돌을 나르고 뜨거운 물을 부으며 성을 지켰습니다.
거란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빈손으로 돌아갔고, 이는 3차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전초전이 되었습니다.

1018

[3차 전쟁의 전조]

요 성종이 고려 정벌을 위해 소배압에게 10만 정예군을 주어 다시 한번 대규모 침공을 준비합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20만 대군을 편성하여 국가의 운명을 건 결전을 준비합니다. 2차 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위대한 승리가 다가옵니다.

거란은 더 이상 몽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도 개경으로의 직공을 계획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청야 전술과 대규모 매복 작전을 수립하여 적의 숨통을 조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인 귀주대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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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고려-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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