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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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웨스트
농구 선수, 농구 감독, 농구 경영인 + 카테고리
가난과 가정폭력이라는 어두운 유년기를 농구에 대한 집념으로 승화시킨 소년은, 훗날 미국 프로 농구(NBA) 전체를 상징하는 공식 로고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선수 시절 수많은 준우승의 좌절 속에서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패배 팀 파이널 MVP에 오르는 등 코트 위의 투혼을 보여줬고, 마침내 1972년 꿈에 그리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경영인으로서 탁월한 안목을 발휘해 레이커스의 '쇼타임' 왕조와 여러 구단의 부흥을 이끌며 코트 안팎에서 가장 위대한 전설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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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8

[웨스트버지니아의 소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첼리안의 가난한 가정에서 여섯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며 깊은 내면의 상처를 안고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탄광의 전기 기사였으며, 가정 폭력이 심해 훗날 그가 침대 밑에 장전된 산탄총을 두고 잠을 잤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지냈습니다. 이 시기의 아픔은 역설적으로 그가 농구공에 미친 듯이 매달리게 되는 심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951

[형의 죽음과 농구로의 도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친형 다비드가 전사하는 큰 비극을 겪게 됩니다.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고, 이웃집 헛간에 매달린 농구 골대에 끊임없이 슛을 던지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외향적이었던 소년은 형의 죽음 이후 진흙탕과 눈밭을 가리지 않고 매일 홀로 슛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저녁 식사에 늦어 어머니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이 혹독한 훈련은 훗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완벽한 점프슛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56

[주 챔피언십 우승의 기적]

이스트 뱅크 고등학교 소속으로 출전한 주 챔피언십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농구 신동으로서의 재능을 만개했습니다. 작은 키 때문에 벤치를 달궜던 신입생 시절을 완벽히 극복하고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웨스트버지니아주 고등학생 최초로 단일 시즌 900득점을 돌파하며 경기당 32.2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스트 뱅크 고등학교는 1999년 폐교할 때까지 매년 우승 기념일마다 학교 이름을 '웨스트 뱅크 고등학교'로 바꾸는 특별한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고향 팀 진학을 선택하다]

수십 개 명문 대학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뒤로하고 고향인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WVU)에 입학했습니다. 1학년 시절부터 신입생 무패 행진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냈고 곧바로 1군 주전 자리를 꿰찼습니다.
60개가 넘는 대학의 러브콜을 받았으나 그는 고향 팀을 선택하는 굳건한 의리를 보여주었습니다. 프레드 샤우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첫 정규 시즌부터 맹활약하며 올아메리칸 서드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59

[파이널 포 최우수 선수]

대학 팀을 이끌고 전미 대학 스포츠 협회(NCAA) 결승전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한 점 차로 패배하여 우승컵은 놓쳤지만, 대회 최우수 선수(MOP)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결승전에서 28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매 경기 팀을 이끌며 5경기 160점 타이기록을 세웠습니다. 켄터키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후반에만 19점을 몰아넣어 역전승을 이끄는 엄청난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팬아메리칸 게임 금메달]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시카고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게임에 출전했습니다.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팀을 이끌었고 성공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대학 무대를 평정한 그의 기량은 성인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국제 대회에서의 값진 경험은 이듬해 올림픽에서 전설적인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게 되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60

[영광의 로마 올림픽 제패]

오스카 로버트슨과 함께 미국 남자 농구 올림픽 대표팀의 공동 주장을 맡아 로마 올림픽에 당당히 출전했습니다. 무패 행진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마추어 선수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당시 결성된 미국 대표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농구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이 전설적인 스쿼드는 훗날 2010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팀 전체가 헌액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레이커스의 첫 번째 선택]

프로 농구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픽을 받아 프로 무대에 입성했습니다. 팀이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하기 직전에 지명되며 새로운 프랜차이즈 역사의 출발선에 함께 섰습니다.
대학 시절 은사였던 프레드 샤우스 감독이 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포워드에서 가드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됩니다. 특유의 높은 목소리와 짙은 애팔래치아 억양 탓에 동료들로부터 '캐빈 크릭에서 온 지크'라는 정겨운 별명으로 불리며 빠르게 팀에 녹아들었습니다.

1968

[초호화 삼각 편대의 결성]

소속 팀이 당대 최고의 센터인 윌트 체임벌린을 영입하는 초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기존의 엘진 베일러와 함께 역사에 남을 강력한 삼각 편대가 구축되며 숙원인 우승을 향한 도전에 불을 지폈습니다.
강력한 센터를 얻었지만, 이 트레이드로 인해 그의 백코트 파트너였던 아치 클라크가 팀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체임벌린과 감독, 동료 베일러 사이의 불화가 라커룸을 지배하면서 팀의 조직력은 흔들렸고, 그는 팀의 화학 작용 붕괴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1969

[유일무이한 패배 팀 MVP]

보스턴 셀틱스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시리즈 내내 경이로운 득점력을 뽐냈으나, 마지막 7차전에서 석패하며 또다시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부신 활약상을 인정받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 팀 소속 파이널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습니다.
시리즈 평균 38점에 가까운 가공할 득점력을 기록했으며, 7차전에서는 42득점 13리바운드 12어시스트라는 경이로운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적장이었던 빌 러셀이 직접 찾아와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던 장면은 프로 농구 역사의 위대한 명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1970

[역사에 남은 기적의 버저비터]

뉴욕 닉스와 맞붙은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코트 반대편에서 던진 60피트 초장거리 슛을 거짓말처럼 성공시켰습니다. 승부를 연장으로 이끄는 이 슛을 통해 그가 왜 '미스터 클러치'로 불리는지를 전 세계 팬들에게 증명했습니다.
당시에는 3점 슛 제도가 존재하지 않아 이 엄청난 슛은 2점으로 인정되었고, 결국 연장전에서 그가 왼손을 다치는 불운까지 겹치며 팀은 경기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극적인 궤적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슛 중 하나로 농구사에 길이 새겨져 있습니다.

1971

[전설의 33연승과 코트 지배]

잦은 부상으로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빌 샤먼 신임 감독 체제에서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견고한 수비와 속공을 바탕으로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다인 33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팀 대기록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 시즌 동안 자신이 출전하여 선발로 뛴 경기에서 무려 41연승을 기록하는 놀라운 개인 연승 기록을 세웠습니다. 평균 25.8득점은 물론 개인 통산 최고인 경기당 9.7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를 완벽히 지배했고 올스타전 MVP까지 휩쓸었습니다.

1972

[길었던 무관의 한을 풀다]

지독하게 이어지던 챔피언 결정전 징크스를 마침내 끊어내고 뉴욕 닉스를 물리치며 감격적인 생애 첫 우승 반지를 꼈습니다. 여덟 번의 뼈아픈 파이널 패배 끝에 거머쥔, 선수 시절의 유일하고도 찬란한 우승이었습니다.
결승전 초반 지독한 슛 난조에 시달리며 고전했지만 3차전부터 맹활약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습니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 통산 플레이오프 4,000득점을 돌파하며 당시 역대 최고 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위업을 함께 달성했습니다.

1974

[코트와의 아쉬운 작별]

부상 여파와 소속 팀과의 재계약 이견이 맞물리며 결국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4년간의 위대했던 커리어를 마감하며 리그 전체의 상징과도 같았던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팀과 원만하게 계약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현역 시절 통산 25,192점을 기록했으며, 그의 역동적인 드리블 실루엣은 훗날 미국 프로 농구(NBA)의 공식 로고로 영구히 채택되었습니다.

1976

[감독으로의 새로운 출발]

자신이 몸담았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감독으로 전격 부임하며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커리어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봉을 잡은 3년 동안 매 시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탁월한 전술적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선수로서 이룬 거대한 업적을 뒤로하고 양복을 입은 그는 서부 컨퍼런스 결승 무대까지 팀을 올려놓으며 지도자로서도 연착륙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감독직에서 오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인해 결국 3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 스카우트로 보직을 변경하게 됩니다.

1982

[경영인 변신과 쇼타임 설계]

본격적인 시즌 개막을 앞두고 팀의 단장(General Manager)으로 취임하며 구단 프런트 경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남다른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1980년대 리그를 호령한 화려한 '쇼타임' 시대의 설계자로 맹활약했습니다.
단장 재임 기간 동안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무려 6번이나 챔피언에 오르며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를 조화롭게 이끈 것에 이어 훗날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을 영입하는 전설적인 팀 구성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1995

[첫 올해의 경영인상 수상]

팀의 성공적인 리빌딩과 훌륭한 프런트 운영 능력을 인정받아 생애 최초로 프로 농구 '올해의 경영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코트 위에서뿐만 아니라 수트 차림의 경영인으로서도 리그 최고임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았습니다.
과거 쇼타임 시대의 영광이 저물고 난 뒤, 완전히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고 팀의 체질을 유연하게 개선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은 결과였습니다. 이 수상은 이후 팀이 다시 한번 쓰리피트(3연패) 왕조를 구축하는 단단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2002

[새로운 도전과 기적의 증명]

오랜 세월 정들었던 친정 팀을 떠나 만년 최하위권이던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단장직을 수락하는 파격적인 도전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의구심을 품었지만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팀을 완전히 탈바꿈시켰습니다.
그의 부임 이후 체질 개선에 성공한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창단 이후 최초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이 놀라운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2004년에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올해의 경영인상'을 수상하며 이견 없는 최고의 단장임을 증명했습니다.

2011

[워리어스 왕조의 숨은 조력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이사회 집행 위원이자 컨설턴트로 새롭게 둥지를 틀며 다시금 리그 판도를 뒤흔들었습니다. 팀의 핵심 자원을 보호하고 주요 영입에 날카로운 조언을 건네며 새로운 왕조의 탄생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주축 선수인 클레이 탐슨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하려던 구단의 결정을 강력하게 만류한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의 예리한 안목 덕분에 팀의 핵심 코어들이 유지되며 워리어스는 2015년과 2017년에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2017

[클리퍼스의 새로운 비전 제시]

과거 친정 팀의 연고지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자문 위원으로 합류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장기적인 리빌딩과 굵직한 대형 자유계약선수 영입 과정에서 구단의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의 영입 이후 구단은 카와이 레너드와 폴 조지 등 특급 스타들을 차례로 데려오며 리그 우승 후보로 단숨에 도약했습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구계 전반을 꿰뚫어 보는 그의 열정과 분석력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2024

[농구계의 영원한 전설로 남다]

로스앤젤레스에서 86세의 일기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며 전 세계 수많은 농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선수로서, 그리고 경영인으로서 미국 프로 농구의 역사 그 자체였던 위대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2024년, 그는 농구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여자 자격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선수, 올림픽 국가대표, 경영인이라는 세 가지 각기 다른 자격으로 전당에 오른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며 영원한 전설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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