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num_of_likes 108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정주영
기업인, 정치인, 현대그룹 창업주 + 카테고리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 자동차 정비로 시작해 건설 조선 자동차 산업까지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었다. 하면 된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수많은 세계 최초를 달성했으며 만년에는 소떼를 몰고 방북하여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어록처럼 도전과 혁신의 상징으로 남은 대한민국의 거목.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15

[아산 정주영 탄생]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아산'은 고향 지명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근성과 모험심을 보이며 훗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 위대한 기업가의 면모를 예고했다.

1930

[소학교 졸업]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며 유일한 정규 교육 과정을 마쳤다.

이후 농사를 싫어해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했고, 다양한 현장에서 부딪히며 실물 경제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3

[쌀가게 배달원 되다]

19살 나이에 네 번째 가출에 성공, 인천항 막노동을 거쳐 경성 복흥상회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성실함과 부기 실력을 인정받아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

1935

[변중석 여사 첫 만남]

고향에서 배우자 변중석 여사를 처음 만났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1938

[경일상회 주인 되다]

복흥상회 주인의 신임을 얻어 가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수성가의 첫 발을 내디뎠으나, 2년 만에 일제의 식량배급제 실시에 따라 폐업해야 했다.

1940

[아도 서비스 인수]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으로부터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 소식을 듣고 인수에 나섰다.

사업가로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1941

[아도 서비스 화재]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를 맡았으나 한 달도 채 안 되어 공장이 불타버리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에 새로운 수리 공장을 시작하는 뚝심을 보였다.

1942

[공장 강제 폐업]

일제의 기업정리령으로 어렵게 재건한 자동차 수리 공장을 빼앗겼다.

이후 홀동광산 광석 운반 사업을 3년간 맡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1945

[광복, 위기에서 벗어나다]

광복 직전 홀동광산 사업을 타인에게 넘겨 소련군 포로가 될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했다.

이는 훗날 현대그룹 창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46

[현대차공업사 설립]

해방 후 미군정청으로부터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가 될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한국 자동차 산업의 주역이 된다.

1947

[현대토건사 설립]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이듬해인 5월, 건설업 진출을 위해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한국 경제의 기둥이 될 현대건설의 시초가 된다.

1950

[현대건설 창립]

자신이 운영하던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자본금 삼천만원으로 시작된 이 회사는 한국 건설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6.25 전쟁과 재기]

한국 전쟁 발발로 모든 것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미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았다.

1960

[건설업계 1위 등극]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등 전쟁 후 복구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했다.

현대건설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1964

[현대 시멘트 공장 준공]

늘어나는 건설 수요를 감안, 시멘트도 자체 조달하기 위해 단양에 현대 시멘트 공장을 준공했다.

이는 수직 계열화의 시작이자 종합 건설 기업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1965

[해외 건설 시장 개척]

국내 최초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수주하며 해외 건설 시장에 당당히 첫발을 내디뎠다.

이는 한국 건설 산업의 세계 진출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자, 현대의 글로벌 도약을 상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7

[현대자동차 설립]

자동차 산업에 다시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다.

1969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

기업 활동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 회장으로 피선되어 사회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을 보였다.

[현대시멘트 독립]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이는 현대그룹의 사업 다각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1971

[현대그룹 창립]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 등을 총괄하는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명실상부한 재계 거목으로 우뚝 섰다.

[거북선으로 차관 유치]

맨손에 가까운 상황에서 조선소 건설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을 찾았다.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선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하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1973

[현대중공업 창립]

중공업 분야에 진출하여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불모지였던 한국 중공업의 새 역사를 쓰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4

[한·영 경제협력 위원장]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로 선출되어 국제 경제 교류 활성화에 기여했다.

1976

[한·아랍 친선협회장]

1970년대 중근동 건설, 개발 사업을 성공시킨 후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20년 넘게 역임하며 중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977

[전경련 회장 취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제13대 회장에 취임하여 10년간 재계 대표 리더로서 한국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아파트 특혜 재판]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 특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만 건축법 위반으로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장남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여 의료 및 사회 복지 사업에 힘썼다.

이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나눔 경영을 실천하는 선례가 되었다.

1978

[현대고등학교 설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교육 사업을 통해 인재 양성에도 기여하고자 했다.

1981

[서울 올림픽 유치위원장]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88 올림픽 서울 유치]

서울이 88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유치 성공의 주역으로서 올림픽 준비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82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어 88서울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의 사전 준비 활동을 추진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도 힘썼다.

1983

[현대전자 설립]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현대그룹의 사업 영역을 첨단 전자 산업으로 확장하는 중요한 시도였다.

1987

[현대그룹 회장 사임]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그의 아들들이 그룹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

[금강산 개발 첫 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는 훗날 '금강산 관광 사업'으로 이어지는 남북 경협의 첫 물꼬를 튼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1992

[정계 입문 선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며 정계 입문을 선언했다.

새로운 정치 구도를 형성하며 1990년대 초 한국 정치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4대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하여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보여주는 결과였다.

[14대 대선 출마 및 낙선]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했다.

선거 직후 정치 보복성 세무조사를 받았다는 논란이 있었다.

1993

[정계 은퇴 선언]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국회의원직도 사직, 탈당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1998

[통일소 이끌고 1차 방북]

고향이 북한인 정주영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에 발맞춰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역사적인 방북을 감행했다.

이는 닫혔던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

1차 방북 4개월 만에 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2차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남북 경협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의 물꼬를 텄다.

[금강산 관광 시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후 금강산 관광 사업에 합의,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항했다.

이는 남북 민간 교류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99

[현대아산 설립]

대북 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개발 등 남북 경제 협력의 핵심 주체로 활동했다.

2000

[명예회장직 사퇴]

건강 악화로 현대그룹 명예회장직에서 사퇴하며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로써 현대그룹은 각기 다른 독립 그룹으로 분리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2001

[아산 정주영 별세]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향년 87세에 별세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거인의 마지막이었다.

[만해상 평화상 추서]

그의 업적을 기리며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남북 교류에 대한 그의 노력이 재조명되었다.

2006

2006.11 사후 5년

[타임지 '아시아 영웅']

사후 5년 뒤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도전 정신과 성취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정주영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