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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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대한민국의 제17·19·20·21·22대 5선 국회의원이자 제71대 법무부 장관입니다. 독재 정권 시절 학생운동과 언더 서클인 '노동법학회'를 결성하며 실천적 지식인의 길을 걸었고, 이후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소외된 이들을 대변했습니다.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후 보수 성향이 짙은 경기 북부에서 내리 5선을 달성하며 특유의 원만한 성품과 막후 조율 능력으로 여야를 뛰어넘는 신망을 얻었습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초대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어 합리적인 사법 체계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연표
1961
[강원도 양구군 출생]
강원도 양구군 동면 수복지구에서 육군 상사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직업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접경지역에서 잦은 이사를 다니다가 경기도 연천군에 정착하며 유년기를 보냈다.이후 학업을 위해 서울특별시로 전학을 가 단국중학교와 대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만난 3살 연상의 첫사랑과 훗날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하는 순애보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다.
198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재수 끝에 진학했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를 무사히 졸업했다. 치열한 학업과 함께 학생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다졌다.신군부 독재 시절의 엄혹한 대학 생활 속에서도 교내 언더서클에 가입해 활동을 이어갔다. 가두시위에 동참하던 도중 강제 연행과 불법 구금을 직접 겪으며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다.
1986
고시에 합격한 후 기뻐하기보다는 전두환 독재 정권 치하에서 지식인으로서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안 된다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에 뜻이 맞는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함께 '노동법학회'를 결성하여 실천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1987
[민주 항쟁 가두시위 동참]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노동법학회 회원들과 함께 6월 민주 항쟁의 뜨거운 열기 속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가두시위에 나섰다.당시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었던 사법연수생이 반정부 시위에 동참하는 것은 제적 등 중징계 처분을 받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역사적인 현장에 동참하며 지식인의 양심을 지켰다.
1989
[육군 소위 임관]
제18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직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강원도 철원군의 제3보병사단에서 공보정훈장교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그의 아버지 역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참전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이다. 훗날 병무청으로부터 '병역명문가'로 공식 인정을 받을 만큼 대를 이어 모범적인 병역 이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2
[육군 중위 전역 및 변호사 개업]
군 복무를 마치고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한 후 의정부지방법원 부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정식으로 열었다.경기 북부 지역을 무대로 각종 시국사건을 헌신적으로 도맡아 처리하고 소외된 서민들을 위해 무료 법률상담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다.
1996
[환경운동가로서의 활동]
경기 북부 지역의 심각한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경기북부환경운동연합'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5년간 공동대표를 역임하며 시민 운동가로서 맹활약했다.하지만 시민, 노동, 인권 관련 운동을 병행하면서 단순히 개별 소송과 운동만으로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벽은 결국 그가 제도권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만드는 핵심적인 동기가 되었다.
1999
그는 이전 15대 대선에서도 전국적인 개혁청년조직의 경기북부지부 창립을 주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정치적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 이 입당을 기점으로 단순한 지원자를 넘어 직접 정치의 전면에 나서며 지역 정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첫 도전]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동두천시·양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 배지에 도전하였으나 아쉽게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30대의 젊은 정치 신인으로서 3선 관록을 지닌 한나라당 중진 후보와 맞붙어 불과 3천여 표 차이로 석패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험지에서 거둔 높은 득표율은 정치인으로서의 강한 경쟁력을 널리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04
[제17대 국회의원 초선 당선]
열린우리당 후보로 재도전하여 4년 전 패배를 안겼던 거물급 상대 후보를 누르고 마침내 초선 의원으로 여의도에 화려하게 입성했다.초선 의원임에도 임기 시작 직후 8개월여 동안 무려 33건의 법안을 집중적으로 발의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법률제조기'라는 칭호를 얻었다. 열린우리당 바람을 타고 입성한 이른바 '탄돌이' 그룹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입법 활동을 펼쳤다.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재선 고지에 도전하였으나 2위로 아쉽게 패배하며 잠시 원외 정치인으로 물러나는 시련을 겪었다.원외로 밀려난 이후에도 낙담하지 않고 당의 지역위원장을 꾸준히 맡아 바닥 민심을 경청하며 지역 관리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지역 내 주요 공공기관 및 지자체의 고문 변호사로 활약하며 전문성을 통한 봉사로 지역민들의 깊은 신뢰를 회복해 나갔다.
2012
재선 의원으로서 당내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수석대변인, 원내수석부대표 등 요직을 두루 맡으며 중진 의원으로 도약할 확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특유의 비정파적이고 합리적인 일 처리로 당 안팎에서 뛰어난 정치력을 인정받았다.
2016
[제20대 국회의원 3선 당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6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당히 3선 중진 의원의 반열에 올랐다.국회 전반기에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후반기에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상임위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품격 있는 의정 활동 덕분에 국회 출입 기자들과 동료 의원들이 꼽는 백봉신사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2020
[제21대 국회의원 4선 당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한번 확고한 승리를 거두며 당내 핵심 기둥 역할을 하는 4선 중진 의원으로 자리매김했다.당선 직후 곧바로 국가 예산을 총괄하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전 국회에서 이미 상임위원장을 지냈음에도 연이어 막중한 위원장직을 맡은 것은 그의 뛰어난 조율 능력과 당내 위상이 얼마나 독보적인지를 증명한다.
2021
[이재명 열린캠프 총괄특보단장 합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예비후보의 전위대 격인 '성장과 공정 포럼'을 이끌며 대선 캠프에 총괄특보단장으로 전격 합류했다.명목상의 보직 권한을 앞세우기보다는 대선 후보와 선거 캠프 사이를 잇는 든든한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과감하게 쓴소리를 던지고 내부 갈등을 다독여 캠프의 균형을 유지하는 막후 실세로 활약하며 자연스레 친명계의 맏형으로 불리게 되었다.
2022
[대선 국면 임명직 포기 선언]
초박빙의 대선 정국에서 지지율 정체 위기가 찾아오자, 측근 인사들과 함께 향후 임명직을 일절 수용하지 않겠다는 백의종군을 공식 선언했다.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선거에 매진한 그는 막후에서 치열한 협상을 벌여 이재명 후보와 김동연 후보의 극적인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나아가 대선 이후 김동연의 당 입당과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까지 매끄럽게 이끌어내며 탁월한 정치력을 재입증했다.
2024
[제22대 국회의원 5선 당선]
동두천시·양주시·연천군 갑 지역구에 단수 공천되어 출마한 결과 과반 이상의 지지를 획득하며 마침내 5선 의원의 위업을 달성했다.전통적으로 보수 색채가 뚜렷한 경기 북부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내리 5선에 성공한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기적이다. 오랫동안 공들여 추진해 온 서울 지하철 7호선 연장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이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비결이었다.
[국회의장 후보직 사퇴 결단]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 당당히 출사표를 던졌으나, 치열한 물밑 경쟁 끝에 며칠 뒤 자진하여 후보직에서 물러났다.당내 최다선 의원으로서 국회 수장을 향한 의지를 보였으나, 당의 결속과 전반적인 정치적 역학 구도를 고려하여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다른 후보들의 단일화 흐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2025
대통령과 호형호제할 만큼 막역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험난한 사법 시스템 개편과 검찰 개혁의 적임자로 낙점받았다. 애초 국무총리 후보자로도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이를 고사하고 개혁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장관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제71대 법무부 장관 공식 취임]
국회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가 무사히 채택된 직후, 대통령의 신속한 임명안 재가를 거쳐 법무부 장관으로 공식 취임했다.취임 직후 일부 강경파들의 무조건적인 검찰 해체 주장과 달리, 거대 권력이 될 타 수사기관을 견제하는 실용적이고 균형 잡힌 검찰 개혁 청사진을 추진하고 있다. 쏟아지는 당 안팎의 압박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냉정함을 유지하며 정부의 핵심 개혁 과제를 수행하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 직권 상설특검 발동]
장관 고유의 막강한 직권을 발동하여 검찰 조직 내부를 겨냥한 사상 최초의 상설특검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2014년 특검법이 제정된 이래 오직 장관의 결단만으로 상설특검이 출범한 것은 헌정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검찰 조직이 스스로 진실을 왜곡하려 했다는 짙은 의혹이 있는 만큼 내부 감찰로는 결코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며 굳은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