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탁
연표
1942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읍에서 태어났습니다.
1962
고교팀 출전 허용 규정으로 1962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 선발되지 않았습니다.
1963
1963년 버마와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여수서초등학교, 여수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196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1964
필리핀과의 196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필리핀 측에서 기권을 통보함으로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으며, 팀은 3위를 기록했습니다.
1965
1965년 와세다 대학과의 정기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습니다.
1966
1966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본선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4위에 머물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66년 연고전에서 패널티킥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에 일조했습니다.
1967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단한 뒤 새로 발족한 양지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 해병대와 양지의 이중 등록 논란에 휘말렸으나 최종적으로 양지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공동 우승]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 팀의 공동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아시아 정상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1967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4강 말레이시아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습니다.
1969
1969년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본선 라이온스 FC와 베트남 경찰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각각 1골을 기록했으며, 도요 공업과의 4강전 경기에서도 배김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69년 킹스컵 조별 라운드 라오스전과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득점을 올리며 국가대표팀의 대회 우승을 견인하였습니다.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11 선정]
한 해 동안의 빛나는 활약을 인정받아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196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습니다.
1970
[금융단 축구 대표팀 동남아 순회 득점]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일본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활약했습니다.
1970년 양지가 해체된 이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합류한 뒤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의 군경합동팀, 말레이시아의 슬랑오르 FA, 태국의 은행연합팀, 일본의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메르데카컵 단독 우승 (주장)]
국가대표팀의 주장 완장을 차고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 팀의 사상 첫 단독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1970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 인도와의 4강전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한 뒤 버마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70년 9월 10일, 체력의 한계 및 후배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등의 사유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이후 국가대표 A팀인 청룡팀과 국가대표 B팀인 백호팀간의 평가전 직후 은퇴식이 거행되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정병탁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4강전 승부차기 실축]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득점을 올리는 등 활약했으나, 주택은행과의 4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며 팀의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1970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 득점을 올리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에 나섰으나 실축해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실업축구연맹전 추계 준우승 공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여러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에 공헌했습니다.
1970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여러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습니다.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판정 항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주심의 판정에 지나치게 항의하다 경고를 받아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1970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주심의 판정에 지나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다 경고를 받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1971
[신탁은행 축구단 첫 우승]
신탁은행 축구단 소속으로 팀의 창단 첫 공식 대회 우승을 견인하며 실업 축구 정상에 올랐습니다.
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을 결승 리그로 이끌었으며, 팀은 결승 리그에서 1승 2무를 기록하며 창단 후 최초로 공식 대회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도 몇 차례 득점포를 쏘아올리며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전국축구선수권대회 4강전과 결승전에서 연달아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일반부 우승을 이끌었으나, 대학부 우승팀 고려대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1971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상업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과 조홍은행 축구단과의 결승전에서 잇달아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일반부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팀은 대학부 우승팀인 고려대학교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선수 자격 정지 징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의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6개월간 선수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1971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물의를 빚은 것을 사유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6개월간 선수 자격 정지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1972
1972년 선수 은퇴를 선언한 뒤 강남조기축구회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남아시아 원정 도중 열린 싱가포르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21일 자신의 팬이었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74
[장덕진 축구협회장에게 감사패 전달]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장덕진에게 국가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감사패를 마련했습니다.
1974년에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던 정병탁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장덕진에게 당시 국가대표팀 소속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감사패를 마련하였습니다.
1979
1979년 열린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습니다.
1980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선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선임되어 부위원장까지 오르며 한국 축구 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뒤 부위원장에 올랐으며, 1981년 개인 업무를 사유로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1984
한동안 회양화학에서 상무로 근무하며 축구계와 거리를 두었으며, 1984년 연세대학교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및 감독상]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 지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98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84년 고려대학교 진학이 유력했던 김봉길을 스카우트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1985
[U-20 국가대표팀 감독 임명]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며 미래 축구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85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예선을 지휘하였습니다.
1987
1987년 1월 23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부인이 사망하였습니다.
1988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습니다.
1989
[대통령배 우승 및 감독상]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시키며 뛰어난 지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1989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한국대학축구연맹 기술이사 사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로 임명되었으나, 업무 소관 침해를 이유로 3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가 되었으나, 본인의 업무 소관을 침해당했다는 사유로 3개월만에 사임하였습니다.
1989년 개최된 제2회 연고 OB 정기전에도 40대 장년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득점을 기록하였습니다.
1992
['져주기 의혹'으로 감독 정지]
아주대학교와의 경기에서 불미스러운 '져주기 의혹'에 휘말려 1년 감독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1992년 아주대학교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잔디상태가 좋았던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를 택하기 위해 서로 져주기 의혹을 받아 한국대학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감독 정지의 중징계를 선고받았습니다.
1993
연세대학교에서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퇴진을 요구하는 항의가 잇따라 결국 1993년 감독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아들인 정상남 또한 축구인입니다.
1994
[전남 드래곤즈 초대 감독 선임]
전남 드래곤즈의 창단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초 허정무가 유력 후보였으나 고사함에 따라 계약금 1억 원, 연봉 6천만 원의 조건으로 계약하였습니다.
1994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95
[전남 드래곤즈 감독 데뷔전 패배]
전남 드래곤즈 부임 후 첫 경기인 1995년 리그컵 개막전에서 전북 현대 다이노스에 0-3으로 패배했습니다.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부임 후 첫 경기인 전북 현대 다이노스(현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1995년 리그컵 개막전에서 0-3으로 패배했습니다.
[월드컵 유치 방송 출연]
문화방송 '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 2부에 출연하여 2002년 월드컵 유치 붐 조성에 기여했습니다.
1995년 문화방송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방영한 '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의 2부에 출연하였습니다.
1995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일환으로 개설한 '청소년 축구교실'에 참여해 전라남도 순천시 지역을 담당했습니다.
1995년 개최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CA 보카 주니어스의 평가전 당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으나, 대한축구협회는 정병탁이 해당 1경기만을 지휘하도록 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이 원칙 없이 임시변통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K리그 기대 이상 성적 기록]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서 1995년 K리그에서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1995년 K리그에서는 전기리그 6위 (4승 2무 8패), 후기리그 5위 (4승 5무 5패)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였습니다.
1996
[선수 관리 미흡으로 징계]
1996년 리그컵 경기에서 선수 관리 및 지휘 통솔 책임으로 연봉 30% 감봉 및 엄중 경고 조치를 받았습니다.
1996년 리그컵 경기에서 팀의 핵심인 노상래와 김봉길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력 및 폭언을 표출한 것에 대해 정병탁에게 선수 관리 및 지휘 통솔의 책임을 물어 연봉 30% 감봉의 구단 자체 중징계 및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를 받았습니다.
1996년 K리그 개막 이후 2연패 및 같은 해 치러진 5차례의 홈 경기 무승 등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1996년 5월 경질되었습니다.
1997
1995년 참여했던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999
[축구화 기증 (가장 오래된 유물)]
축구회관 박물관 건립을 위해 선수 시절 애용했던 축구화를 기증하며 한국 축구 유물 보존에 참여했습니다. 이 축구화는 대한축구협회 소장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역대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축구용품을 수집한 뒤 축구회관 1층에 축구박물관을 마련할 당시, 자신이 선수 시절 사용했던 축구화를 기증했으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화가 되었습니다.
2000
[경평 OB 대항축구전 참가 시작]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부터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2001
2001년부터 다수의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했습니다.
2002
[한일 축구원로 친선경기 출전]
2002년 FIFA 월드컵 D-100일 기념 '일본 간사이 지방 OB 축구회'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했습니다.
2002년 FIFA 월드컵 D-100일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 간사이 지방 OB 축구회'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했습니다.
2002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의 한수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습니다.
2003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선정]
베스트일레븐 선정 '한국 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축구의 전설로 칭송받았습니다.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습니다.
2004
[이라크 U-23 대표팀에 '평화의 볼' 전달]
1968년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 동료들과 함께 이라크 U-23 대표팀에 '평화의 볼'을 전달했습니다.
2004년에 1968년 당시 이라크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이라크 U-23 대표팀에 '평화의 볼'로 명명된 국제축구연맹 공인구 및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구 등 100여개의 축구공을 전달하였습니다.
2004년 창립된 '고양시 유소년 축구협회'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창단한 60세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된 '고양시 실버축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 참가 시작]
다수의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에 '연세대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부터 다수의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에 '연세대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습니다.
2005
2005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2008
[남북 월드컵 예선 참관]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를 양지 축구단 동료들과 함께 참관했습니다.
2008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참관하였습니다.
2009
[양지 OB팀 친선경기 참가]
'양지 축구단 OB팀'의 일원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로 구성된 '구룡회'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했습니다.
2009년 '양지 축구단 OB팀'의 일원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로 구성된 '구룡회'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하였습니다.
2010
[서울시 실버축구단 활동]
새로 출범한 '서울시 실버축구단'으로 옮겨 활동하며 노년에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
2010년 새로 출범한 '서울시 실버축구단'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2011
[국가대표 OB 축우회 총무 취임]
65세 이상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OB 축우회'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2011년 창설된 65세 이상의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OB 축우회'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2016
2016년 2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