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연표
1953
1977
1978
1984
1994
[MBC 뉴스데스크 주말 앵커]
1978년 MBC 입사 후 정치부 기자,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등을 거쳐 1994년부터 1996년까지 MBC 뉴스데스크 주말 앵커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1996
[MBC 퇴사, 정계 입문]
17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MBC를 퇴사한 후, 이해찬 의원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며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5대 총선 전국 최다득표 당선]
제15대 총선에서 전주시 덕진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YS 만주 폭격 발언 논평]
김영삼 대통령의 6.25 당시 만주 폭격 발언에 대해 '대통령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 시찰 중 김영삼 대통령이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자, 당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으로,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논평하며 강력 비판했다. 이에 신한국당은 안보 의식 결여를 지적하며 맞섰고, 한중 관계 악영향 여부에 대한 공방도 이어졌다. 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의 해명을 촉구했으며, 신한국당은 맥아더 주장을 지지했던 국민 정서를 언급하며 반박했다.
1997
[안기부 기획입북 발언 논란]
오익제 천도교 교령의 월북 사건 당시, 정보기관의 '기획입북' 가능성을 제기했다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소환 요구를 받는 등 큰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자신의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1997년 8월,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월북 사건이 터지자 당시 신한국당은 오익제 교령이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을 지낸 경력을 들어 국민회의에 해명을 촉구했다. 이에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정보기관이 밀파했을 가능성이 높고 기획입북의 가능성이 있다"며 역공세를 취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즉각 반박하며 안기부 명예훼손 혐의로 정동영 의원에 대한 조사를 예고하고 형사고발 위협까지 가했다. 안기부가 제보자 조사를 명분으로 수사에 나서자 정동영 의원은 '자신의 기획입북 주장이 오해의 소지를 사게 됐다'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정동영 의원에게 소환을 요구하며 강제구인 조치까지 거론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정동영 의원은 결국 9월 8일 참고인 자격 조사에서 기획입북 주장이 무의식적으로 한 명백히 잘못된 것이며 안기부 직원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해 사과했으나, 안기부는 국민회의의 추가 사과와 해명을 요구하며 법적 조치를 예고했다.
[전두환 노태우 사면 논평]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에 대해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국민들도 이해하고 용서할 것으로 본다'는 논평을 발표하며 국민적 용서를 요청했다.
1997년 12월 22일,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에 대해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국민들도 이해하고 용서할 것으로 본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진심어린 반성을 전제로 "국민이 용서와 화합의 차원에서 전노 사면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는 국민회의의 입장을 밝혔다.
2000
2002
[16대 대선 경선, 노무현 당선 기여]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도전했으나 노무현 후보에게 패했다.
경선 결과를 승복하고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2003
[새천년민주당 탈당, 열린우리당 주도]
기존 동교동계 당권 개혁을 요구하며 민주당 내 개혁파로 활동하던 중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두 달 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2004
[노무현 탄핵안 가결, 국회 대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당일,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탄핵 저지를 시도했으나 경호권 발동으로 퇴장당했다.
이후 의사당 내에서 무릎 꿇고 대국민 사죄문을 발표했다.
[노인 폄하 논란, 비례대표직 사퇴]
17대 총선을 앞두고 '60~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는 발언이 노인 폄하 논란으로 확산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비례대표직을 사퇴하며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2004년 3월 26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대학생 기자단과의 인터뷰 중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그 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는 발언으로 노인 폄하 논란이 일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야권 및 시민 단체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대한노인회는 정계 은퇴를 요구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열린우리당 측은 20~30대 젊은 층의 투표 독려를 강조하다 나온 발언으로, 본뜻이 왜곡되었다고 해명했으나 파문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정동영은 비례대표 후보직을 사퇴하며 제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17대 총선 열린우리당 제1당]
탄핵 역풍 속에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어 제1당으로 올라서자,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정동영은 출구조사 발표 후 눈물을 보였다.
[통일부 장관 겸 NSC 위원장]
원외에서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다 제31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직까지 겸직하며 참여정부 내 핵심적인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2005
[평양 방문, 김정일 단독 면담]
통일부 장관으로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면담을 가졌다.
6자회담 및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방안을 논의하고 귀국했다.
2006
[지방선거 참패, 당의장 사퇴]
통일부 장관 임기 종료 후 열린우리당 당의장으로 복귀하여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이끌었으나, 전북을 제외한 모든 시도에서 참패하자 의장직을 사퇴했다.
2007
[17대 대선 대통합신당 후보 선출]
범여권 유력 후보였던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이후,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화를 강조하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7년 1월 당시 범여권 유력 후보였던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이후, 열린우리당에서 개편된 대통합민주신당은 곧바로 경선에 진입했다. 유시민,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 등이 출마했으나 유시민은 첫판에 기권했다. 당초 손학규가 유리할 것으로 보였으나 박스떼기 논란 및 국민통합추진본부의 차량 동원 의혹이 발생하며 경선은 정동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친노 세력은 한명숙이 이해찬을 지지하며 사퇴하는 등 단일대오를 구축하려 했으나, 조직력에서 다소 유리했고 노무현 정부와 차별화를 강조한 정동영은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7대 대선 중도정당 최저 득표 낙선]
매우 낮은 지지율 속에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최종 개표에서 26.1%를 득표하여 중도정당 역사상 최저 득표율을 기록하며 이명박 후보에게 대패했다.
당시 참여정부와 집권 여당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등으로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은 매우 낮았고, 정동영 본인의 지지율 또한 20%대에 미치지 못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보다도 낮게 나와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명박 후보를 상대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으나 효과는 없었으며, 이인제, 문국현, 권영길 등 다른 범여권 주자들과의 단일화 시도 또한 모두 실패했다. 개표 초반 이명박 후보를 앞서며 역전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26.1%를 득표하며 중도정당(제1당) 역사상 최저 득표율을 기록했고, 이명박 후보에게 531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2008
[18대 총선 동작구 을 낙선]
대선 패배 후 이듬해 치러진 제18대 총선에 서울 동작구 을 지역구로 출마했으나 정몽준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2009
[민주당 공천 배제 및 탈당]
민주당이 전주 덕진 지역구 공천을 배제하기로 확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탈당했다.
이후 무소속으로 당선될 경우 복당할 뜻을 밝혔다.
[전주 덕진 재보선 무소속 당선]
민주당 공천 배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주 덕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0
[통일부 개성공단 방북 불허]
'남북 관계의 숨구멍인 개성공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부가 그의 개성공단 방문을 불허했다.
2011
[반값등록금 시위 중 폭행 피해]
반값등록금 시위에 참석했다가 50대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머리채를 잡히며 '김대중 노무현 앞잡이, 빨갱이'라는 말을 들었다.
2012
2015
[2015년 재보선 관악구 을 낙선]
2015년 4.29 재보궐선거 서울 관악구 을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6
[20대 총선 전주권 최다표차 당선]
제20대 총선에서 전북 전주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의원을 전주권 최다표차로 누르고 4선 국회의원에 성공했다.
2018
[국민의당 탈당, 민주평화당 참여]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에 반대하여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다음날 창당된 민주평화당의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민주평화당 대표 당선]
민주평화당 대표 경선에서 68.5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겠다'고 선언하며 좌클릭 행보를 보였다.
2020
2022
2024
[22대 총선 5선 국회의원 당선]
제22대 총선 전북 전주시 병 선거구에서 82.0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며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순직 해병 국정조사 위원장]
제22대 국회 전반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에 이어,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