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연표
1898
[저우언라이의 탄생]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에서 교육받은 학자 계층의 가족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졌으나, 어린 나이에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였습니다.
1898년 3월 5일, 저우언라이는 청나라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교육받은 학자 계층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양부모 밑에서 성장했으며, 1살이 되기도 전에 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친의 동생에게 입양되는 유교 집안의 큰 스캔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양어머니는 그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4세 무렵에는 수백 개의 단어를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1919
[5·4 운동의 주역으로 부상]
일본 유학 중 귀국하여 베르사유 조약과 일본의 산둥반도 부여에 항의하는 5·4 운동에 참여하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톈진 학생회의 결성자이자 신문 편집자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5월 9일,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톈진에 도착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하고 일본군에게 산둥반도 부여에 반대하는 5·4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이 운동의 활동가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군벌들과 제국주의자들과 싸우고 중국을 구한다"는 목표로 톈진 학생회를 결성하고 신문 '톈진 학생'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인식사회'를 창립하고 훗날 부인이 되는 덩잉차오를 만나게 됩니다.
1922
[프랑스 유학 중 중국공산당 입당]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일하고 공부하는' 프로그램의 부패에 맞서 싸웠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한 후 유럽에서 사회주의 청년 연맹을 조직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혁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 11월 7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저우언라이는 '일하고 공부하는' 프로그램의 부패 문제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후 영국 유학을 준비하다 프랑스로 돌아와 공산주의 세포를 만들던 류칭양 등과 합류했습니다. 그는 1922년 가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청년 연맹의 주요 모집자이자 조직자, 활동 조정자로 벨기에, 독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했습니다. 당원들을 모스크바로 보내 혁명 기술을 배우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24
[황푸 군관학교 정치부 부국장 역임]
국민당과 공산당의 통일전선이 형성된 후 중국으로 귀국하여 장제스가 사령관인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황푸 군관학교) 정치부 부국장이 되어 군사 훈련과 정치 활동을 지도했습니다.
1924년 중국으로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사령관이었던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에서 정치부 부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협력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국민당 내의 반공 세력에 대한 의심을 품고 공산당 자체 군대의 필요성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후 군벌 천중밍에 대항하는 동부 원정을 이끌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산터우와 주변 지방의 특별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36
[시안 사건 해결과 제2차 국공 합작 성사]
장제스가 부하들에게 체포된 시안 사건 발생 후, 즉시 시안으로 가서 장제스의 석방을 돕고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제2차 국공 합작을 협상하여 민족 통일 전선 구축에 기여했습니다.
1936년 12월, 장제스가 일본에 저항하지 않고 공산당과 싸우려다 자신의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시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시안으로 날아가 장제스의 석방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일본군 침략에 맞서기 위한 제2차 국공 합작을 성공적으로 협상했습니다. 이 합작은 중일 전쟁 발발 직전 중국의 통일된 항일 전선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 및 외교부장 취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초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취임하여 신생 중국의 국가 건설과 대외 관계 정립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저우언라이는 초대 국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임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30년간 동맹 조약을 맺는 등 공산주의 정권 수립 초기부터 대외 관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습니다. 이로서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1972
[닉슨 방중 성공적 개최와 미중 관계 정상화]
헨리 키신저의 비밀 방중을 시작으로, 이듬해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미중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 저우언라이는 서방 세계와의 관계 재설립에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특별 교섭인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협상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사이의 역사적인 만남을 성공적으로 정리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상하이 공보를 체결하여 미중 관계 정상화의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76
[저우언라이의 서거]
방광암 투병 중에도 국정을 돌보던 중 마오쩌둥 사망 8개월 전 서거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인민들에게 큰 애도와 함께 정치적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년 방광암으로 입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과 함께 국무원 업무를 지속했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사망 8개월 전 서거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비동맹 국가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애도를 표하는 메시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화장되어 중국 전역에 뿌려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민들 사이에 자발적인 애도 표현을 불러왔고, 이는 이후 천안문 사건과 덩샤오핑의 일시적 제거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