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온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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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관료, 학자 + 카테고리
장온(張溫)은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관료이자 학자로, 자는 혜서(惠恕)이며 오군 오현 사람입니다. 소년 시절부터 비범한 용모와 절조로 명성을 떨쳤으며, 손권에게 발탁되어 고소(顧邵)와 함께 융숭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보의장군(輔義將軍)에 올라 촉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촉나라의 정치를 칭송하고 제갈량과 깊이 교류한 점, 그리고 평소 명성이 너무 높아 손권의 시기를 산 점 등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결국 기염(暨豔)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상황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춘추연(春秋衍)》을 저술했으나, 38세의 이른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군주의 의심과 정치적 파동으로 희생된 당대 명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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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212

[손권의 발탁과 관직 생활 시작]

19세의 나이에 손권에게 발탁되어 고소와 함께 의조랑(議曹郎)이 되었습니다.
손권은 장온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태자 손등의 시중을 드는 태자유덕(太子遺德)으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 손권은 장온을 매우 아껴 장온의 문지기조차 징소할 정도로 대우가 각별했습니다.

224

[보의장군 승진 및 촉한 사신 파견]

32세의 나이에 보의장군(輔義將軍)으로 승진하여 촉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손권은 그를 건안 태수로 임명하고 부절을 주어 외교 임무를 맡겼습니다. 장온은 촉나라에 도착하여 제갈량 등과 국정을 논하며 오나라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촉한에서의 활동과 평가]

촉나라 조정에서 뛰어난 언변과 식견을 보여주어 촉나라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촉의 정치를 칭송하고 제갈량의 통치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훗날 귀국하여 손권의 질투와 의심을 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손권과의 갈등]

오나라로 돌아와 촉나라의 정치를 미화하고 칭송하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손권은 본래 장온이 촉의 정세를 정탐하고 오기를 바랐으나, 장온이 촉을 칭찬하자 불쾌해했습니다. 또한 장온의 명성이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지자 손권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낙통의 구명 상소 거절]

장온이 투옥되자 낙통(駱統)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장온의 무고함을 변호했습니다.
낙통은 장온이 기염과 친하긴 했으나 그의 잘못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에 낙통의 간곡한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관직 박탈 및 고향 축출]

장온은 결국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인 오군으로 쫓겨났습니다.
그의 형제들인 장지, 장백 또한 연좌되어 관직에서 쫓겨나고 폐서인이 되었습니다. 장온은 유배 생활 중에도 원망의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지냈습니다.

[기염(暨豔) 사건 연루 및 투옥]

선조상서 기염이 인물 평가 문제로 죄를 얻자, 장온도 그와 한패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손권은 기염이 장온의 추천으로 등용되었고 두 사람이 사적으로 친밀했다는 점을 들어 장온을 엮어 넣었습니다. 실제로는 장온의 높은 명망을 꺾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탄압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225

[저술 활동 전념]

축출된 이후 6년 동안 문을 닫아걸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에 《춘추연(春秋衍)》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남겼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으나 학자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고 후세에 기록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230

[장온의 사망]

고향에서 병을 얻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은 후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쇠락하여 가문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재능 있는 인재가 군주의 시기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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